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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 속의 환상 (창 2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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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의 환상 (창 28:10-19)

저희가 한번은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이 본문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돌아가면서 말씀을 읽은 다음에 제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자, 이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니까 야곱이 도망을 가게 되었지? 그런데 도망을 가다가 밤이 되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지?' '길에서 잠을 잤어요.' '그래, 마을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밖에서 잠을 잤겠지? 그런데 그렇게 자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랬더니 우리 작은 아이가 얼른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모기에 물렸어요!':그래서 우리 네 식구가 예배를 드리다가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아이의 말 속에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저희가 러시아 같은 추운 곳에 살고 있었더라면 아이의 대답이 많이 달라졌겠지요? 가령 '동상에 걸렸을거에요.' 혹은 '자다가 눈에 덮였을지도 몰라요.'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저의 작은 아이의 머리 속에서 구성되고 있는 세계에서 밖에서 잠은 잔다는 것은 곧 모기에 물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사실에 접근할 때 우리의 가치관, 세계관의 기준으로 그 사실을 재해석해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아주 상대적이거나 혹은 심지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의 작은 아이가 생각하는 밖에서 잠잔다는 개념과 러시아에 사는 아이가 가질 수 있는 개념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구조나 경험 때문에 그 진리가 왜곡되어 수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며 살아온 사람이 이해하는 것과 사기를 당해서 홧병에 걸린 사람이 이해하는 것이 많이 다를 수 있기 않겠어요?

우선 사기를 당해서 홧병에 걸린 사람은 이 본문의 배경에서 사기를 당한 에서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 대해 무의식적인 피해의식을 가질 수 있겠지요. 야곱이 도주 길에 모기에 물리거나 동상에 걸리는 어려움에 처할 때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사기꾼 야곱을 축복해 주시는 장면에 가서는 좌절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해. 사기 치고 탈세하는 놈들은 사업도 잘 되고 잘 나가는데 나처럼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사기나 당하고 사업도 안되고.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실까?'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반면에 부도가 나서 빚쟁이들을 피해 다녀야 했던 사람은 도망 다니는 야곱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을 축복해 주시고 항상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실 때, 이 사람은 '역시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이야. 내가 지금까지 빚쟁이들을 잘 피해 다니며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처지와 경험이라는 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지만, 그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억지로 끌어다 맞춰서는 안되지요.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이 여행은 두 가지의 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왜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거야 물론 야곱이 죽을 짓을 했지요.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는데 늙어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를 속이고 그 축복을 가로챘으니 온전할 리가 있겠습니까?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는 낌새를 알아차린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피신시킬 핑계를 꾸몄습니다. 그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동족 가운데서 아내를 얻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에서는 현지인 헷 족속 가운데서 아내를 얻었는데 이것이 이삭과 리브가에게 상당한 두통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 야곱은 동족 가운데서 아내를 얻게 해야 한다는 리브가의 주장대로 야곱은 집을 떠나 화를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동족 가운데서 아내를 취하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그것을 이루어 나가시는 과정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하신 방법은 자신의 아들을 메시야로서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내시는가 하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메시야가 그의 후손으로 오시도록 아브라함과 그의 혈통을 특별한 보호 속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특별히 선택된 백성이 이 초기 단계부터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서 그 혈통을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비록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도주 길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메시야의 혈통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야곱이 그곳에서 그저 편안하게 살았더라면 어쩌면 에서처럼 가나안 여인들 가운데서 아내를 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위협이라는 비상수단을 통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동족 가운데서 아내를 얻도록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형에게 맞아 죽게 된 이 절박한 상황도 하나님의 은혜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깨닫게 되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철학의 틀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라는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요즈음 IMF 시대라 해서 참 어려운 고비를 지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너무나 속이 상하고 분하기까지 합니다. 딱 주어진 현실만 바라본다면 이처럼 분하고 암담한 노릇이 없습니다. 국내에 계신 분들은 그분들대로 수많은 고통 가운데 계실 것이고, 외국에 나와 있는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굴욕과 고통을 감수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희만 해도 생활비가 절반 이하로 줄었지요, 현지인들이나 정부에서 우리를 대하는 시각도 전과 같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별것도 아닌 것들이 괜히 거드름 피우며 잘난 척하더니 결국 그 모양이구나' 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당장 당하고 있는 굴욕과 고통의 현장만을 보지 말고 좀 더 큰 그림을 보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쌍둥이 형이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쫓아오는 오늘의 현실만 바라본다면 그 야곱이야말로 한없이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좀 더 큰 그림을 보자 이겁니다. 그 큰 그림 속에서는 메시야 혈통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야곱을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섭리가 작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러나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것은 그 형들이 그나마 남은 동정심으로 요셉을 죽이지 않고 외국의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아 넘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은 그림 속에서 절망하지 않을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큰 그림 속에서 본다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던가요? 그래서 애굽과 인근 나라들의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흉년에 굶어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잉태하게 될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이라는 피난처에서 거대한 민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 아닌가요? 요셉은 이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곡식을 사러 왔다가 요셉을 만난 형들이 무서워 떨고 있을 때 요셉이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IMF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큰 그림을 보는 믿음의 눈입니다. 아직 우리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암담한 현실의 작은 그림을 보면서 절망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 모두 앞에 펼쳐질 그 큰 그림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어쩌다가 우리가 재수가 없어서 당하는 고통도 아니고, 전임 대통령 한 사람의 잘못으로 겪게 된 위기도 아닙니다. 그 동안 우리 국민들의 삶의 행태라든가 마음가짐 같은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다시 겸손해지고 근면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정도는 우리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때 이스라엘이 경제위기를 맞았을 때 환율이 달러당 1,500세겔까지 치솟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사재기 안했습니다. 딱 1년 후에 환율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달러당 1.5세겔까지 낮아졌습니다. 제가 핀란드 사람 한 분을 만났는데 핀란드도 1980년대에 그런 경제위기를 겪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저에게 하는 말이 자기들이 그 위기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난 것처럼 너희 한국도 분명히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해 주더군요. 어려운 현실을 탓하지만 말고 큰 그림을 보도록 하십시다.

한 종족 집단이 그 주된 집단을 떠나 소규모의 집단을 구성해서 살아갈 때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하지 않고 계속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 혈통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제가 이링가에 살 때 저의 이웃들이 '발로치'라는 페르시아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가계의 혈통을 이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모두 가까운 친척들인 것이죠. 삼촌과 결혼하기도 하고, 형이 장인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수가 많지 않은 그 종족집단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야곱도 결국 사촌 누이들과 결혼하게 되지 않습니까? 근친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우리의 관습과 정서로 본다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동족 가운데서 아내를 얻도록 하신 하나님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니면 근친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의 관습이 잘못되었습니까? 이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문화적인 다양성과 예외적인 상황을 모두 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다양성과 차이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매우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동족 가운데서 아내를 취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그것을 오늘날 우리가 국제결혼을 반대해야 하는 근거로 우리 삶에 적용시킬 수 있습니까? 그건 좀 곤란하겠죠? 때로는 메시야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동원하기도 하셨던 하나님은 불과 다음 세대에서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통해서 메시야의 계보가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생 라합이나 룻 같은 이방 여인들이 메시야의 계보에 편입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외를 인정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이러한 예외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는 것을 허락하셨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같은 한국 사람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것은 차이와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행한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 해라. 십일조 해라. 새벽기도와 십일조가 강조되면서 그것들이 신앙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똑같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라면 어느 정도 참조가 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쉽게 범할 수 있는 실수는 그것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교수님이 강의를 하시는데 어떤 학생이 자꾸만 졸았습니다. 그래서 물었지요. '전도사님, 수업시간에 그렇게 졸면 어떡해요?' 그랬더니 이 전도사님이 새벽기도 하느라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잠을 못 자서 존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새벽기도 하지 말고 푹 자고 수업시간에 공부 열심히 하세요.' 나중에 이 교수님은 새벽기도를 반대했다고 몰려 가지고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십일조를 안하면 집안에 큰 사고들이 일어나 십일조 안한 만큼의 돈이 의외로 들어간다고 믿으세요? 그래서 십일조 못하는 것에 대해서 늘 마음 졸이고 죄책감을 가지고 계십니까? 십일조를 할 때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데 장사가 안되거나 불경기 때문에 십일조를 못했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덜 사랑하십니까? 그런 생각에서 십일조를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십일조를 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유하십시오. 십일조 안한다고 하나남이 여러분을 덜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십일조 안한다고 벌주시는 그런 째째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닙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십일조 안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여러분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편히 잡수시고 십일조 하지 마세요. 그런 다음에 여러분의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합당한 만큼 헌금을 하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한 한국교회가 이 IMF 시대를 초래한 책임의 일부분을 반드시 져야 할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남쪽 네게브 사막 근처에 있는 곳이고 하란은 지금의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지역이니까 직선거리로 약 800km쯤 되겠습니다. 얼마나 급하게 길을 달렸는지는 모르지만 한 곳에 이르러 밤이 되었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보병이었기 때문에 주로 하는 일이 걷는 일이었는데요, 10시간을 걸으면 40km를 갑니다. 24시간을 꼬박 걸어야 100km를 갑니다. 이 야곱은 집을 떠나서 약 90km쯤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행군하던 페이스로 갔다면 이틀째 밤이었을 것 같고요, 어쩌면 하루만에 그만큼 급하게 달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먹을 것은 어머니가 싸 주셨겠지요. 그렇지만 이 여행길이 보통 여행길인가요? 자기를 죽이려는 형을 피해 도망가는 길입니다. 또 하루 종일 걸었으니 얼마나 피곤하기도 하겠어요? 그래서 길바닥에서나마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모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단 모기뿐이었겠어요? 사자 같은 맹수나 혹은 강도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연로하셔서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는 아버지를 떠나왔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에 또 얼마나 서러웠겠어요? 이제 하란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가는데 그곳에 산다는 삼촌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도 없으니 불안하기도 하겠지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처량한 모습으로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야곱의 처량한 신세가 아니라 그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비록 야곱은 불쌍하고 처량한 처지이지만 하나님은 그 야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다고 하지만, 실상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고 그를 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말라기 1장에 보면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결국 우여곡절을 지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었을 뿐입니다.

모기도 많고 맹수가 나올지도 모르는 그 벌판에서 돌을 베개삼아 머리에 베고 자는 이 가련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그 밤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광스러운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의 환상입니다. 그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하면서 계단 오르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 가지고 이 땅으로 내려오기도 하고 이 땅의 일들을 하나님께 가지고 올라가기도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닥다리가 하늘과 땅에 닿아 있다는 사실에 유념하십시오. 그래서 이 사닥다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실 수 있고,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하는 곳, 즉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지요. 하나님은 야곱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구원의 계시를 이 환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모태의 근원으로 선발된 사람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바로 얼마 전까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슬픔과 외로움의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땅바닥에 쓰러져 자던 가련한 인간 야곱의 작은 그림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의 평생이 험난한 인생 길이었지만 그 영광스럽고 압도적인 큰 그림을 가슴에 품고 야곱은 그의 남은 여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처럼 오늘 어려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렵지만 이 힘들고 짜증나는 현실의 작은 그림만을 보지 말고, 저 큰 그림을 보십시다. 아직 희미할지 모르지만 그 큰 그림을 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자기 뜻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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