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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부르실 때 (출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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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부르실 때 (출 4:1-9)

제가 어느 교회에 전도사로 있을 때 여름 행사들을 앞두고 교사 헌신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부강사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여름 수련회와 성경학교 같은 행사를 앞둔 교사들의 헌신예배니까 어느 정도 윤곽은 잡히지 않아요? 그런데 이 목사님의 설교말씀 본문이 바로 이 구절이었어요. 이 본문 말씀에 보니까 뱀이 나오네요? 그래서인지 이 목사님이 한 시간 동안 뱀 이야기만 하다가 설교를 끝냈어요. 뱀의 특징, 뱀의 성질, 뱀에 물린 이야기... 그 목사님 아버지가 옛날에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독사한테 물렸대요. 그런데 뱀에 물렸을 때 그 뱀을 잡아 죽이면 물린 사람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대요. 그래서 그 목사님 아버지가 숲으로 도망가는 뱀을 쫓아가 잡아가지고는 그 뱀 머리를 이빨로 씹어 죽였대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교사 헌신예배 설교가 그래야 되겠어요? 뱀에 물리면 정말로 그 뱀을 잡아 죽여야 삽니까? 저는 당시 신학교 다니는 나이 어린 전도사로서 한참 선배되는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통탄했습니다. 속이 상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말이죠. 한국교회의 강단이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가 하고 슬프기도 했어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생명을 상실하게 되면 성도들이 영적으로 중병을 앓게 됩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죽기도 합니다. 설교자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말로 할 수 없어요. 저도 설교하다가 종종 죽을 쑤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님께 입술을 의탁하고 설교에 임하지만 잘 안될 때도 있단 말이죠. 그럴 때는 너무너무 창피하고 어디로 숨고만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죽쑤는 것하고 교사 헌신예배에서 뱀 이야기만 해 버리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얘기 아닌가요?

오늘 우리의 이 본문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장면의 일부분입니다. 그에게는 이집트 왕자로서 왕궁에서 40년 동안 온갖 영화를 누렸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집트 왕자가 아니라 고난과 슬픔 가운데 살아가는 히브리 동족을 구원해야 할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한 때의 꿈처럼 지난 일들이고, 지금은 외딴 광야에서 양을 치며 가정을 꾸려 나가는 한 소시민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40년 동안 양치기 생활을 해 온 모세의 얼굴에서 과거에 누렸던 영화나 왕자로서의 위엄, 한때 품었음직한 원대한 포부 같은 것은 아마 찾아보기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전에 왕자였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사실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저 미디안 사람들 틈에서 그들과 동화되어 한평생 살다가 가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가 왕년에 잘나가던 왕자였다고, 어쩌면 이집트 대제국의 황제가 될 수도 있었던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고난받는 동족을 구해야겠다는 부담도 그에게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사람을 죽인 죄도 이제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잡으러 오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말하고 살아가는 방식도 완전히 미디안 사람과 같아서 누가 보아도 모세는 한낱 평범한 미디안의 양치기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잊혀진 그의 정체성을 다시 되돌리셨습니다. 내면 깊숙히 파묻혀 있던 모세의 꿈을 다시 끄집어내셨습니다. 여태 잊고 살았던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사실, 이제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다고 믿었던 고난받는 동족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이 가슴 한구석에서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잔잔하던 모세의 정신세계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복잡해지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말할 수 없는 갈등과 고뇌가 뒤따랐겠지요. 겁도 났을 거예요.

때때로 우리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정말 오래 전에 소명을 느끼고 헌신했지만, 망각의 세월이 흐르면서 뇌리에서 사라진 일들을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다시 요구하시는 경우지요. 어느 장로님을 수십년 전에 처음으로 예수 믿으면서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 어린 신앙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살아오면서 정작 선교사가 될 기회도 없었고, 또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물건너 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20년이 지난 이제 와서 하나님께서 이 장로님을 통해서 많은 선교의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20년 전의 헌신을 회복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읏는 것입니다.

꼭 그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지나치고 싶은 일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TV를 켰는데 굶어 죽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 모습이 나오면서 '당신의 작은 도움이 이런 아이들 몇 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가 나옵니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 아이들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잠을 설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 광고를 안봤더라면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직장에서 어떤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비리에 관련된 일입니다. 나만 모르는 척하고 입을 다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리를 모르는 척하고 지내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왕따가 될 수도 있고,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것을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처럼 평온하던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 하나님의 도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그 도전에 응답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러한 도전 앞에서 모세는 할 수만 있으면 그 하나님의 도전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해야겠다'
'뭐라구요? 내가 뭔데 그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 번지수를 잘못 찾아 오셨군요.'
'걱정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바로에게 가는 건 둘째 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겠습니까? 누가 보냈느냐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사실 모세가 살인범이 되어 도망자가 된 것은 동족 이스라엘 사람의 밀고에 의한 것 아니었던가요?
'내 이름은 나다. 나라는 분이 보냈다고 해라.' '스스로 있는 자'라는 번역은 원래의 의미가 아니지요.
'근데요 하나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들이 내 말을 믿을 것 같지 않습니다. 무슨 증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내가 가서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나만 실없는 사람 되는 것 아닙니까?'

사실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을 때처럼 고독하고 괴로운 때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 초등학생이 선생님의 핸드폰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시는 안훔쳤는데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도 없구요. 결국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게 되었지만,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비극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런 곤란한 형편에 빠졌을 때 잘 써먹는 수법이 하나 있습니다. 뭔 줄 아세요? '내가 기독교인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했다는 거야?'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거지요. 10여 년 전에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한 운동권 여학생이 심문하는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떠들썩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그 경찰이 펄쩍 뛰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내가 교회 집사여.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야?' 결국 그 집사 경찰은 그 여학생을 성폭행한 것이 드러나 쇠고랑을 찼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름을 우리 스스로 그렇게 더럽혀서야 되겠어요? 또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그렇게 쉽게 들먹어셔야 되겠어요? 제가 한번은 탄자니아에서 신학교 강의시간에 한 학생한테 졸지 말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학생이 안졸았대요. 분명히 내가 보기엔 졸았는데... 그래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기어이 우기면서 뭐라는가 하면 자기가 졸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대요. 그래서 내가 막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너 안졸았다는 것이나 증명해 주시는 분이냐? 그런 하찮은 일에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대지 말라고 말이죠.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늘 외고 다니는 것을 믿음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아멘, 할렐루야... 너무 귀하고 좋은 말이지만 우리가 아무런 의미없이 습관적으로 입에 달고 다닐 때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탄자니아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더라구요. 그 사람들은 'Bwana asifiwe!'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주께서 영광받으시기를!'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아멘' 해야 돼요. 그런데 아무때나 그 말을 해요. 학생들이 아침에 저를 보면 'Bwana asifiewe!' 합니다. 그냥 아침인사 대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Bwana asifiwe는 단지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라는 의미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도 어떡합니까? '아멘'이라고 대답해야죠. 방학이 끝나고 돌아와서 오랜만에 만났을 때는 'Bwana asifiwe sana!'라고 합니다. sana는 '매우'라는 뜻입니다. 그럼 나는 'Amen sana' 해야 돼나요?

어떤 부흥사가 그랬대요. 말끝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는데, '제가 군대에 가서 고참한테 빳다를 맞는데 말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모세는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모세의 요구에 하나님은 몇 가지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에 문둥병이 생기고, 강물이 피로 변하는 이적입니다.

증거를 요구하는 모세에게 갑자기 하나님은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림 같은 데 보면 양치기가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는 짧은 등산용 지팡이가 아니잖아요? 기다란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가 갑자기 큰 뱀으로 변해 혀를 날름거리며 모세를 노려봅니다. 모세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려고 하는 모세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잡으니까 지팡이로 변했어요. 신기하지요? 이것이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증거라는 말이죠.

그것도 모자라 이적을 한 가지 더 주셨습니다. 품에 손을 넣었다 꺼내 보니 손에 문둥병이 생겼단 말입니다. 당시 문둥병이라면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에이즈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두려워하던 병이지요. 멀쩡하던 손에 갑자기 문둥병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절초풍할 노릇입니까? 그런데 그것도 다시 품에 넣었다가 꺼내 보니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증거까지 주셨지만 그래도 모세에게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근데 하나님, 백성들 만나서 설득도 해야 되고, 바로를 만나서 담판도 지으려면 말을 잘해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원래 말주변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되겠지요?' 슬쩍 빠져나가려는 좋은 핑계가 생긴 거지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래, 그럼 넌 불합격이다. 가서 양이나 쳐라.' 그랬으면 좋겠지만, '입을 누가 만들었느냐?' 말도 잘하게 해 주겠다는 것 아닙니까? 모세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핑계댈 것이 이제 없어졌단 말이죠. 그래서 그럽니다. '나는 안되겠습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지금까지 참으시면서 모세를 설득하려 하셨던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이놈이 말이 많구나. 가라면 갈 일이지 무슨 핑계가 그리 많아?' 하나님은 한번 하기로 작정하시면 꼭 하시고 맙니다. 그런 하나님께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며 피하려고 해 봐야 괜히 시간만 낭비할 뿐이죠.

한때 모세는 자신의 지위와 지식을 근거로 해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고난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젊음도 있었고 힘도 있었습니다. 권력도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벌써 나이가 80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패기도 사라졌습니다. 돈이나 권력 같은 것도 없고, 정말 가진 거라고는 손에 든 지팡이뿐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먹여살려야 할 식구마저 딸렸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갖추지 못했던 것 한 가지가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하는데,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소명이 있고 없고는 그 하는 일의 본질을 좌우하는 문제입니다. 고통 중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셔서 부르시는 장면을 살펴보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어떤 일로 부르시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처럼 민족을 구원하는 일로 부르시는지, 다른 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으로 부르시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꼭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좋은 남편으로 부르시고, 현명한 엄마로 부르시기도 합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지요.

누가 지어낸 농담이겠지만, 미국에서 한 농부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갑자기 신학교를 가야겠다고 하더래요.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P.C.라는 글자가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Preach Christ, 즉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소명을 주셨으니 농사 그만 짓고 신학교를 가야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대요. 그 P.C.는 Preach Christ가 아니고 Plant Corn, 옥수수를 심어라는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옥수수를 심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일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청년을 만났는데 저에게 이렇게 물어요. '목사님은 목사가 직업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갑자기 그 질문을 받으니까 좀 헷갈리더군요. 목사가 직업입니까? 아닙니까? 그럼 장로는 직업업니까, 아닙니까?

'그럼, 목사도 직업이지요.'
'직업이라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목사는 생계유지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복음을 위해 일하는 거잖아요?'
결국 목사를 직업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소명도 없이 그저 생계유지 수단으로 목사가 되었다는 말이 되는군요.

여기서 우리는 획일적으로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나누어 생각하는 이원론적 사고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거룩한 일이고 회사에 다니거나 장사하는 일은 속된 일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 성직자가 아닌 여러분은 속직자인가요?

우리는 성도(聖徒)라고 불리웁니다. 실제로는 교회에서 아직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받지 않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 성도라고 불러서 마치 집사보다 낮은 게 성도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성도처럼 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거룩한 무리,' 우리가 모두 거룩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성도가 하는 일이 설교하는 일이든 장사하는 일이든 성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속된 일이겠습니까?

어떤 일로 부르셨든, 여러분이 그 일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면 여러분은 성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일로 부르시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저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실 수도 있고,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낙후한 한국정치의 수준을 높이라고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마음에 안드는 일일 수도 있고, 부담스러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렇게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기대에 따라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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