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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시는 하나님 (출 1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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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의 구별이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세력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살아가면서 겪는 갈등과 고통을 다룬 사건들이 많습니다.

여기 출애굽기의 내용도 그렇지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 나라인 애굽에 가서 죽도록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그들의 절규와 호소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출애굽기에서는 정말 지독한 사람이 나옵니다. 애굽왕 바로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압제했는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했는지 정말 지독하기가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10가지의 재앙을 만나기까지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밉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지요?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보기에 그렇게 밉고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지만, 그래서 어서 빨리 망했으면 하고 생각되는 사람이지만, 정작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의 속을 &50026;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사사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훼방을 놓고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던 그 이방인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이방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만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이방인들은 마귀가 만들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의 조상이 따로 있고 이방 민족들의 조상이 따로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도 아담의 자손이고 이방 민족들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시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기는 하셨지만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든 이방 민족이든 모두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틀림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한 배에서 나온 아이들이 어쩌면 그렇게 서로 다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말을 잘 듣고 부모를 기쁘게 해 주는 놈이 있는가 하면, 하는 짓마다 꼴보기 싫은 짓만 골라서 하는 녀석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예쁘고 말 잘 듣는 놈만 자식으로 삼고 말 안 듣고 말썽부리는 놈은 자식 아니다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해 주신 이야기 가운데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셨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마 재산이 상당한 부자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죽으면 모든 재산이 두 아들에게 상속되겠지요. 그런데 작은 아들이 망나니였던가 봐요.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서인지 자기밖에 모르고 뭐든지 제 멋대로 하는 성미였던 모양입니다. 이놈이 하루는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자기가 상속받은 재산을 지금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못된 놈이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가 시퍼렇게 경영일선에서 한창 뛰고 있는데 아들놈이, 그것도 작은 아들놈이 사업을 나누자는 거지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못된 놈이 있나? 혼짝을 내야겠지요? 어쩌면 이 아버지도 그랬을 거예요. 달래 보기도 하고 호통을 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안됐습니다.

결국 이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억지로 뺐다시피 물려받은 재산을 챙겨가지고 멀리 떠났습니다. 어쩌면 그것으로 부자간의 정을 끊자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로서는 상속해 주어야 할 모든 분량을 주었기 때문에 더 주어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재산이 탐나거든 호적에서 네 이름도 파가거라, 이놈아!'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죠. 아들로서도 그렇게 억지로 아버지의 재산을 뺐었으니 어디 아버지 근처에서 낯들고 살 수가 있었겠어요? '좋아요, 이것으로 아버지와 나는 끝입니다. 더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구요.' 이러면서 떠났겠죠.

그런데 이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흥청망청 먹고 노는 데 탕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돼지우리에서 돼지밥을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질 노릇이지만, 이것은100% 자기 잘못이니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겠습니까? 부자간의 정을 끊고 집을 나왔으니 아무리 굶어 죽어간들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런 멍청하고 못된 망나니는 그런 고생을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시죠?

그런데 그 아버지는 어땠을까요? 아마 아버지는 아들이 그 모양으로 패가망신하게 될 줄을 알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날마다 먼발치를 바라보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이 염치없고 한심한 아들이 다 죽어가는 거지꼴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맨발로 뛰어나가 그 더러운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기 계셨다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아니 아버님, 부자간의 정을 끊겠다면서 아버지 재산을 뺏어 나간 놈을 다시 맞아들이겠다는 말씀입니까? 정신차리세요. 이놈을 당장 내쫓으세요!' 이러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소를 잡고 대잔치를 벌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버지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못된 짓을 하고 말썽을 부렸어도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소중한 법입니다.

큰 아들이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아니 아버지, 나는 죽어라고 일하면서 아버지를 섬겼는데 나와 친구들을 위해서는 염소 한 마리 안 잡아 주셔놓고,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한테 갖다 바치고 온 이 못된 놈을 위해서는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인단 말입니까?'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큰 아들을 또 하나의 탕자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성실하게 일해 온 것 같지만,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기는커녕 아버지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를 자본의 논리로 접근하는 사람입니다. 재산이 중요합니까? 자기 동생의 목숨이 중요합니까?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온 동생의 처지는 관심 밖이고 오로지 그 동생이 날려버린 재산만 아까워하는 철저한 자본주의자 아닙니까?

여러분이 그 자리에 서 계시다면 뭐라고 한 마디 거드시겠어요? '에라 이 못된 놈아, 너는 네 동생 살아 돌아온 게 반갑지도 않느냐? 이 돈밖에 모르는 놈아! 자식 살아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버님, 이놈이야말로 진짜 탕자입니다. 당장 내쫓으세요. 이런 놈을 어떻게 믿고 앞으로 가업을 물려 주시겠습니까?' 이런 말이 안나오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이 아들이 숨겨진 탕자였던들, 아무리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들, 이 아들도 아들입니다. 아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에요. 이 아버지의 말투를 보세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새로 번역한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영어 성경에 보면 '내 아들아'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작은 아들은 이방인이고 큰 아들은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방인이든 바리새인이든 하나님께는 모두가 소중한 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간구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7절, 38절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이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런데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틈에 왜 중다한 잡족이 끼었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이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가장 상징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이 중다한 잡족이 포함되었다는 말입니다. 충격적인 일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을 두고 미리암과 아론이 그를 비방한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 구스 여인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구스라는 말은 원래 이디오피아이지만 성경에서는 이집트 남쪽의 아프리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스 족속은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와 아라비아 반도 및 앗시리아 지역 등에 널리 퍼져 정착한 검은 피부색의 함족 계통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구스 여인을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동일시하는 견해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 어쩌면 아내가 죽은 후에 모세가 출애굽시 함께 탈출해 나온 잡족 가운데 한 여인을 골라 재혼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든 문제는 모세가 이스라엘 여자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이방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미리암과 아론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드셨습니까? 모세를 편들어 주시고는 미리암은 끔찍한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참 우스운 얘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모세가 비록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를 비난하던 미리암이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종인 목사를 함부로 비난하다가는 미리암처럼 형벌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목사가 설령 잘못을 저질러도 함부로 비난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벌하시도록 해야지 다른 사람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그럴 듯하군요. 저도 옛날에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유치한 분이 아니세요. 우리 속담에 세 살 먹은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모세라고 잘못은 모세가 했는데 벌은 잘못을 지적한 사람이 받아야 되겠어요?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것은 모세의 잘못을 지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 도전한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모세가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구요? 네, 그것은 오히려 잘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잘한 일을 가지고 시비를 걸면서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니까 하나님이 열받으셨던 거지요.

바움가르텐(Baumgarten)이라는 학자는 이 모세의 결혼을 '율법에 표현된 바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평등사상 및 친교관계를 직접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게를락(Gerlach)이라는 학자는 '미래에 이루어질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복된 연합 관계를 본보기로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 잡족들도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것을 알았던 거지요. 그래서 모세는 그 하나님의 뜻을 직접 행동으로 나타내 보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미리암이 그렇지 않아도 못마땅하던 차에 시비를 걸었다가 된통 뒤집어쓰고 말았던 겁니다.

우리가 선교에 관해 말할 때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빼놓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부터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나서고 계신 거지요.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십니까? 신문이나 TV에 광고를 내십니까? 그보다도 하나님은 집에 있는 아들을 밖으로 내보내십니다. 나가서 시장에도 가보고 다른 마을에도 가보고 고아원도 뒤져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오라고 우리를 내보내신단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다음에 먼저 구원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그리고 이 땅에서의 모든 과업을 마치시고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분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제 하나님이 급해지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종종 나타나지만,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그 아들을 찾아 나서셨다는 것입니다. 그 오랜 세월 잃어버린 채 버려 두셨던 자신의 피조물들을 이제 다시 되찾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으신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고 듣습니다. 1997년 한 해에만 3,529명의 미아가 발생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집은 한 순간에 모든 행복과 평화가 사라지고 맙니다. 어린이찾아주기종합센터에 3개월된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모와 연락이 끊어졌는데, 1년 후에 그 아이의 아빠가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아이 아빠는 중국집에서 일을 했는데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다니다 보니 업무에 충실하지 못했고 결국 실직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겪는 부모들이 1년에 수천명이 새로 생겨난다는 얘깁니다. 그 부모들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그 부모를 다시 행복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입장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자기 형상대로 아름답고 거룩하게 창조해서 사랑하며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아들들 중에서 어떤 아이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어떤 아이는 유괴를 당해서 끌려갔습니다. 어떤 아이는 길을 잃어버려서 낯선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못된 사람들에게 붙잡혀가지고 앵벌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남의 집에 양자가 되어서 엉뚱한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잃어버린 아들들을 이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하나님의 심정이 오죽하시겠습니까?

어떤 아들은 저 아프리카에서 조상신을 두려워하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아들은 알라신이 자기 아버지인 줄 알고 진짜 아버지인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아들은 저 외딴 섬에서 아직도 구석기 시대를 살면서 무지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잃어버린 아들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이아와 땅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어라.' 그 잃어버린 아들들을 빨리 찾아서 아버지에게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우리 교회에 주신 것이지요. 어떤 목사님은 이 말씀을 우리의 사명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사명의 차원에서 접근할 성질이 아니고 명령이라는 것이지요. 명령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명령에 불복종했다가는 징벌을 받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이 선교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군대에서 대장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데 내가 시간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할 수 있습니까? 내 관심분야라고 더 열심히 하고 나는 그 방면에 소질이 없으니까 하는 척하다가 말아도 됩니까? 하나님은 이 선교하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가라!'고 했으면 가야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하셨으니 이 족속 저 족속 있는 대로 다 찾아가서 복음을 전해야지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이유에든간에 만약 선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의 모든 전쟁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이 씻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어떤 한 가지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어야만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계 방방곡곡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사역은 우리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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