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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과 범죄의 주체 (창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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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여러 가지의 근원, 또는 시작을 밝히고 있습니다. 세상의 시작에 대해서, 인간의 시작에 대해서, 또는 가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최초의 살인자는 누구였는지 등등, 시작, 근원, 최초의 사건과 사실 등을 말해줍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는 특별히 인간의 불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좋았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이 모두 선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거기에는 분노나 증오나 염려나 위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3장의 사건에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밝히고 있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천사들을 지으셨는지, 그리고 죄의 근원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하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가 어떻게 사탄으로 타락하게 되었는지는 창세기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출현은 창세기 2장과 3장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우리로서는 천사의 창조와 사탄의 타락이 인간의 창조 이전의 일인지 이후의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 등장하고 있고, 2장까지에서는 사탄이라는 존재의 암시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탄의 등장이 창세기 2장과 3장 사이의 일이라고 잠정적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여기 나오는 사건을 통해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롬 5:12). 세상, 즉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에는 아직 죄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사이의 갈등이나 오해나 폭력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완벽한 세상에 사탄의 유혹이라는 형태로 죄가 인간의 마음 문을 두드리면서 찾아온 것입니다. 뱀의 달콤한 속삭임을 듣고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보았을 때, 그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와는 아직까지 죄에 접촉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완벽한 행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열매는 하와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탐스럽고 먹음직하게 보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뱀의 말을 듣고 나서 보니 그 열매가 그렇게 탐스럽게 보였을까요? 그 열매가 탐스럽게 보였다는 것은 하와의 마음 속에 이미 그 열매에 대한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먹기 전에 이미 범죄했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행위를 범죄의 시작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이 그 열매를 따먹는 행위였고, 하와는 그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범죄를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부터 하와가 범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열매에 손을 가져가서 딴 순간입니까? 아니면 그 열매를 입으로 베어먹은 순간입니까? 아니면 그 열매를 보고 따먹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28). 그렇다면 하와도 금지된 열매가 탐스럽게 보인 순간부터 범죄한 것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미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욕을 품은 순간부터 범죄한 것이 되지만, 하와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하와의 마음 속에는 죄성이 없습니다. 아직 죄에 접해본 적도 없고 죄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금지된 열매가 탐스럽게 보였다는 것을 죄라고 하기에는 곤란합니다. 다만 하와에게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만 있었습니다. 하와는 금지된 열매가 탐스럽게 보이는 순간에 그 열매를 따먹는 죄를 범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죄를 범하고자 하는 욕망과 싸워 탐스럽게 보이기는 하지만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와의 마음 속에서 저 탐스러운 열매를 따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이 일어나고 있을 때까지는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손을 뻗어 그 열매를 따먹었을 때에야 눈이 밝아져서 자신의 벌거벗음을 깨닫게 되는 범죄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금지된 열매가 탐스럽게 보이고 그것에 대한 욕망이 생겼다는 것만 가지고 하와가 이미 범죄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즉 그 열매를 따먹든지 따먹지 않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달린 것이고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만 할 수 있는, 마치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로봇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가 전혀 없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하와가 사탄으로부터 죄에 대해서 소개를 받았을 때, 그 죄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은 하와 자신의 역할이었고 자신의 책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와는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죄를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놓고 나중에 뭐라고 핑계를 댑니까? 자신의 책임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마치 자신을 유혹한 뱀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책임을 전가합니다. 자신의 결백이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가 범죄를 한 것은 환경의 책임이 아닙니다. 범죄를 할 수도 있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죄를 받아들이게 된 패턴을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하와에게는 죄의 개념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뱀에 의해 죄가 어떤 것인지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이 너무나 귀가 솔깃할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전에는 그 금지된 열매를 따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뱀의 말을 듣고 지금까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그 열매를 보니 그렇게 탐스럽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그 열매를 따서 한 입 베어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죄에 굴복하는 경우에서도 이런 패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특정한 범죄에 대해서 개념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그 범죄에의 유혹을 받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것들이 보면 볼수록 탐스럽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것이 죄를 범한다는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면서라도 기어이 얻어야 할 만큼 가치있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말이지요. 그러면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하와와 같이 잘못된 선택을 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놓고 나중에는 자신의 범죄를 환경과 유혹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하와가 자신의 범죄를 뱀 탓으로 돌렸다고 하나님이 벌을 면제해 주셨던가요?

다윗을 보세요. 다윗에게는 아내가 이미 여럿 있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뺏어오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특히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부하의 아내를 빼앗을 만큼 다윗이 그런 나쁜 짓을 할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옥상에 올라갔다가 목욕하는 여자를 본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볼수록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여인은 지금 자기를 위해서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는 부하의 아내가 아닙니까? 다윗이 얼마나 갈등을 했을까요? 그러나 결국 다윗의 그 여인을 데려와 동침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선택이었습니다. 다윗이 범죄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이 여자가 목욕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를 한 것은 다윗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범죄의 책임은 목욕한 여자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다윗 자신에게 있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어떤 일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야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화들짝 놀라 거기서 손을 떼는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너무 깊이 개입되어 있다거나 혹은 그것이 놓치기 아까운 것이라고 생각되어 손을 떼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범죄인 줄 몰랐을 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것이 범죄라는 인식을 한 후에는 매우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과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은 스릴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마음 속 한편으로는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 갈등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범죄 속에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빨리 그 범죄로부터 탈출할 것이지를 선택하는 것이 거기서 판가름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범죄의 주체는 나 자신인 것입니다. 결코 제3자가 내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어쨌든 범죄의 가능성에 우리가 가까이 접하고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한번은 제가 윤목사님과 심하게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채팅에 대해서입니다. 문제는 여자와 채팅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윤목사님은 절대로 할 수 없고, 또 자신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하거든요. 그러니 해도 된다고 해야 되지 않겠어요? 윤목사님 주장은 여자와 채팅을 해서 무슨 선한 것이 기대되겠느냐? 결국에는 범죄로 가는 길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여자와의 채팅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홈페이지를 통해서나 또는 어떻게 제 메일 주소를 알아서 연락을 해오는 사람들과 메일을 주고받는 수가 있는데, 그렇게 알게 된 한 자매와 종종 채팅을 합니다. 이 자매가 한번은 목사님, '무슨 필요한 것 있으면 보내드릴까요?' 해서 약이랑 책도 보내온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목사님, 한국에 오시면 꼭 연락하세요.' 그러더군요. 그 얘기를 했더니 윤목사님이 정색을 하면서 그럼 혹시 한국에 가게 되면 그 자매를 만날 거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자매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범죄가 될 수 있으며, 또 나는 범죄를 계획하거나 그럴 의사도 전혀 없다고 해도, 윤목사님은 그래도 어떻게 될지 누가 아느냐,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은 아예 시작도 말아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참 논쟁을 하다가 결론 없이 각자 자기 길을 가기로 하고 끝났습니다. 옆에서 듣고 계시던 권목사님은 '채팅은 채팅으로 끝나야겠지요'라고 결론을 내리시더군요.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범죄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는 말처럼, 술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 자연히 술고래가 되는 것이고, 도박하는 곳에 자주 드나들다 보면 도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게 할 수 있는 일로부터는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조심해서 운전을 한다고 사고가 안 나던가요? 내가 조심해도 상대방이 와서 부딪혀버리면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범죄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범죄의 유혹 앞에서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우리가 유혹을 멀리하고 범죄의 가능성을 피해 다닌다 해도 그런 것들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혹이 없다는 사실보다도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하와는 결코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와가 범죄와 순종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유혹이 전혀 없어서 그 자유의지가 작동해볼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유혹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 자유의지가 어떤 것을 선택하게 될 것인지 그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하와가 범죄하게 된 것은 사탄의 유혹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도 하와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유혹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살도록 하실 참이었다면 애초에 뭐하러 자유의지를 주셨겠어요? 한번도 범죄의 유혹을 받아보지 않았고 그래서 한번도 범죄한 적이 없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운전면허를 딴 후에 한번도 운전을 해보지 않아서 사고경력이 없다고 모범운전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와에게 있어서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 즉 범죄한 적은 한번도 없고 범죄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상태를 보고 완벽한 의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고 범죄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거절했더라면, 그제서야 하와는 완벽한 의인의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고 인류의 불행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일부러 유혹을 찾아다녀서는 곤란하겠지요. 유혹을 이길 힘도 없으면서 괜치 자청했다가 범죄에 빠져버리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도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일생일대의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여자와의 채팅을 불가하다는 윤목사님의 견해를 존중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윤목사님은 성자같은 분입니다. 일부러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반드시 사고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혹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유혹이 우리에게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즉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곳입니다(벧전 5:8). 그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가는 곳마다 온갖 유혹을 덫처럼 설치해 놓고 우리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에 우리가 노출되지 않고 할 수만 있으면 이 유혹들과 담을 쌓고 안전하게 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다가 우리가 유혹을 만나서 넘어지고 범죄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유혹에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유혹에게 책임을 미루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 때문에 범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유혹을 받아들였던 것이고, 다윗 역시 목욕하는 여인 때문에 범죄한 것이 아니라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영적 어두움 때문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혹을 피하는 지혜도 필요하고, 그 유혹을 이기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유혹이 닥쳐왔을 때 그것과 대적해서 싸우면 그 유혹이 우리를 피해 도망갈 것입니다. 유혹은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기만 하다가는 당하기도 쉽습니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더 좋은 것입니다. 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범죄에 빠지지 않고 유혹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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