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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와의 자리, 아담의 자리 (창 0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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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의 자리, 아담의 자리 (창 3:1-13)

지난 2년의 세월을 돌이켜 봅니다. 날수로 계산해도 겨우 730일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우선 저는 겨우 2년으로 주사랑교회에서의 사역을 접게 된 것에 대해 말로 할 수 없는 자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20년, 30년을 목회하신 분들이 많은데, 겨우 2년 만에 도중하차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제가 처음 주사랑교회에 부임해 왔을 때 이렇게 2년 정도로 끝낼 생각을 하고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교회가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든든하게 제대로 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년은 목회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부임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물러가게 되어 여러분께 죄송하고, 또한 하나님께 송구스럽고, 저 자신에게조차도 부끄럽습니다.

저는 지난 2년에 걸쳐 약 150번의 설교를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마지막 설교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언제나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단편소설에 보면 아멜 선생님이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면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잘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까? 늘 하던 수업이었지만, 앞으로는 더 이상 그 아이들을 프랑스어로 가르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모아놓고 고별설교를 하는데, 모두가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했던 모세는 또 어떠했겠습니까? 함께 지내면서 가르치고 지도하는데도 늘 실패했던 그 백성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모세의 심정이 얼마나 착잡하고 안타까웠을까요? 우리 주님 역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기나긴 고별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가르치거나 지도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에 아직까지 가르치지 못한 것들을 모두 그 짧은 시간에 전해주려는 마음과,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아쉬움, 또 헤어지는 슬픔,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마지막 수업은 늘 무겁고 심지어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설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여러분께 말씀을 선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의 마지막 설교를 위해서 왜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내용의 성경말씀을 읽었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이 본문이 고별설교를 위한 좋은 본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난주에 이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할 뿐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난 2년에 걸쳐 약 150번의 설교를 했다고 말씀드렸는데, 가장 중점을 두고 반복해서 강조했던 주제는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교회가 부서진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부임하면서, 그 상처를 치유하고 성령의 교제가 있는 교회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저의 첫 번째 사명과 역할로 설정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서로 견제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그립고 만나면 행복한 그런 교회를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에서도 교회와 그 구성원의 역할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외부의 어떤 특정한 분들이 우리 교회에 나오고 싶어하는데도 제가 반대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속좁은 목사라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처럼 되찾은 우리 교회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었습니다. 이 해밀턴에 있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을 우리가 익히 보아왔기 때문에, 그리고 이 교회 저 교회 옮겨다니면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저는 아무나 우리 교회에 나오는 것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한두 사람의 열심으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지와 동의를 얻지 못한 한두 사람의 열심이 교회 전체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앞에서 설치는 사람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설치는 사람이 많은 교회는 그만큼 붕괴의 위험을 내포한 교회입니다. 목사 한 사람 앞에서 설치는 것으로 충분해요. 사실은 목사가 설치는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나 앞에 나서서 설치던가요?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스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설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앞장서서 일한다는 것과 앞에서 설친다는 것은 좀 다르지요? 제직회를 하더라도 자기 주장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고, 할 말이 없으면 쓸데없는 말이라도 꼭 한 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고, 어디서나 늘 중심인물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 말이지요. 자신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차라리 없으면 좋을 사람들입니다. 교회에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이 필요하고, 앞에 나서서 설치는 사람보다 뒤에 숨어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붕괴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도 제가 무척 신경을 썼던 부분입니다. 가능하면 그렇게 설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좀 섭섭했던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저는 교회 안에서 마치 이방인처럼 겉도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번에 MTC 앨런 학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참여하고 모두가 주인이 되는 그런 교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좀 소극적이고 교회 일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은 분들에게는 제가 좀 부담스럽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주사랑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더 아름답고 더 좋은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한 저의 노력이었습니다.

교회는 여러 사람과 여러 직책, 그리고 여러 기능들이 각자 최선을 다하며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균형을 갖춘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만 강조되고 한쪽만 발달하면 비정상이 되는 것입니다. 빨리 가겠다고 수레바퀴 하나를 큰 것으로 갈아 끼웠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똑바로 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비록 작을지라도 둘 다 균형을 이루어 천천히 가는 것이, 비틀거리며 빨리 가려고 하다고 넘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더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손이 발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코가 입 대신 음식을 먹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 교회가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저는 오늘 마지막 설교에서도 이 본문을 통해서 교회가 지키고 가져야 할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바로 각자의 역할에서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하와였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열매를 따먹고 나서는 남편에게도 그것을 주어 먹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즉 인간이 최초로 범죄하는 일에서 리더십을 행사한 것이 하와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바울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여자의 리더십을 인정하기 어렵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지금 리더십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하와의 존재 의미는 아담의 돕는 배필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와의 역할은 아담이 앞장서서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또는 아담이 실패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아담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코가 입 대신 음식을 먹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이러한 역할의 혼동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의 역할이 있고 교인의 역할이 있습니다. 또 여러 교인들이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자기 역할만 잘 하면 돼요. 능력이 넘쳐서 다른 역할까지 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먹도록 유혹을 받았다 하더라고 자기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았더라면 먼저 남편과 상의하고 남편이 이 사건을 주도해서 이끌어가도록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먹어버렸습니다. 자기가 결론을 내리고 결정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자신의 결정을 남편에게 받아들이도록 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아담은 가정과 세계의 지도자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하와가 이미 금지된 열매를 먹어버린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내가 내미는 그 열매를 냉큼 받아먹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그 난국을 수습하려고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담이 얼마나 갈등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생각 끝에 그 열매를 받아먹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여기서의 아담의 행동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책임지기를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는데, 한 사람만 그 책임을 포기해 보십시오. 그 여파가 교회 전체에 미치게 됩니다. 결국 건강하고 힘있는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거기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올바로 대처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운명이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만한 주제가 있습니다. 하와가 이미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을 안 아담은 왜 자신도 따라서 그 열매를 먹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사랑하는 아내가 이미 몸을 버린 것을 보고 자기만 깨끗하게 살겠다고 할 수가 없어서 사랑하는 아내와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서 함께 몸을 더럽히기로 한 것일까요? 만일 하와만 금지된 열매를 먹고 아담은 먹지 않았더라면 두 가지 종류의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일까요? 마치 범죄한 천사 그룹과 범죄하지 않은 천사 그룹처럼 말이지요. 저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와 혼자서는 인류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하와 혼자서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는 범죄의 효과, 즉 눈이 밝아 벗은 것을 깨닫게 되는 현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아담이 그것을 받아서 먹었을 때에야 그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하와만 금지된 열매를 먹고 아담은 아직 먹지 않은 상태는 범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결국 아담이 그 범죄에 참여함으로써 인류의 범죄가 통합적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범죄의 길로 들어가고 있던 하와를 붙잡아서 다시 되돌아오도록 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담이 하와가 내미는 금지된 열매를 냉큼 받아먹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실수입니까? 이것은 하와가 처음에 먹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일찍 교회를 사임하게 된 것이 마치 아담이 자기 책임을 포기한 것처럼 생각되어 참 괴롭습니다. 여러분, 불변하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자주 바뀌는 교회는 절대로 부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교회는 절대로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게 되면 저와 같은 사람을 모시지 마십시오. 정말 오랫동안 교회를 지킬 수 있는 분을 모시기 바랍니다. 또 목사님이 오랫동안 교회를 지킬 수 있도록 하셔야 됩니다. 목사님이 오래 목회를 하실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달렸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들 보면 목사님이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바뀝니다. 이유는 목사님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대가 센 장로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거나, 교인들이 목사로 하여금 열심을 가지고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교회는 문제교회로 인식이 돼서 목사님도 가려고 하지 않고, 교인들도 오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죽을 쑤든 밥을 하든 교인들이 거기에 호흡을 맞추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죽이 나오든 밥이 나오든 말이지요. 그런데 물이 적네, 불이 너무 약하네, 주방장이 게으르네, 경험이 없네 하면서 목사를 자주 갈아치워서는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다음에 오시는 목사님은 누가 되든지 10년 이상 모실 각오를 하고 모셔오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주사랑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또 교회에는 서로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보니까 아담과 하와가 서로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겁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사실 이것이야말로 타락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범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나니까 사람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왜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먹었느냐?'고 하실 때,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나님 말씀을 깜빡 잊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자신의 잘못과 자기 책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인류의 운명이 또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담은 아담대로, 하와는 하와대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면 그 교회는 아담과 하와의 뒤를 충실하게 따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집사라고 해서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여선교회 회장이라고 해서 권력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로 책임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월급 때문에 책임을 지고 다른 보상 때문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책임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 책임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사람이 많은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고 든든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교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교회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우리의 우선순위에서 저 아래 랭크되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인류를 불행으로 몰고 갔던 하와의 범죄가 시작된 순간은 바로 교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하와가 혼자 있을 때 뱀의 유혹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뱀이 기회를 노린 것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아담이 없는 틈을 타서, 보다 연약한 그릇인 하와를 넘어뜨린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옆에 있으면서 시험을 이기도록 격려하고 잘 이끌어주었더라면 우리 인류의 운명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지고 범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은 우리가 많이 겪어온 일 아닙니까? 또 혼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합니까?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며 격려하고, 함께 시험을 대항해 싸우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 우리는 힘을 얻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고 믿음이 자라면서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주사랑교회가 여러분에게 그런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우리가 이 교회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교회입니까?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는 비록 이 교회를 떠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제가 어디에 있더라도 여러분이 이 주사랑교회를 아름다운 교회, 좋은 교회, 행복한 교회로 가꾸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이 변화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풍성하신 사랑이 이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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