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130년의 성적표 (창 47:7-10)

첨부 1



130년의 성적표 (창 47:7-10)

우리는 종종 파란만장한 생애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경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꼽힐 만한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젊은 시절의 간교함,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을 만나서 겪어야 했던 좌절, 끊이지 않았던 나그네 생활, 절체절명의 위기와 슬픔 등등의 숱한 사연을 모두 뒤로 하고 이제 야곱은 얼마 남지 않은 삶이나마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죽음을 맞이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잘 아는지 야곱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여기 소개된 한 토막의 일화는 야곱이 애굽의 왕을 만난 자리에서 주고받은 짧은 대화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긴 세월과 수많은 사연과 깊은 교훈들이 함축되어 표현되고 있습니다. 애굽의 실권자로 등장한 요셉이 아버지를 바로에게 소개합니다. 첫 대면한 자리에서 바로는 야곱에게 나이를 묻습니다. 말하자면 첫 번째 질문이 나이를 묻는 것이었군요. 왜 하필 나이를 물었을까요?

예를 들어 친구가 오랜만에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는데, 몇 년 전에는 조그만 꼬마였던 아이가 장대같이 키가 커가지고 왔다면 맨 먼저 무슨 질문이 튀어나올 것 같습니까? “너 키가 얼마니?” 이러지 않겠어요? 만일 여러분이 스모 선수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딱 한 가지 질문만 할 수 있다면 무슨 질문을 하겠습니까? 몸무게가 얼마인지가 제일 궁금하지 않겠어요? 바로가 야곱에게 나이를 물은 것 역시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야곱의 머리가 하얗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살이 패였고, 쇠약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바로가 무슨 질문을 먼저 하겠어요? “노인장, 연세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먼저 이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철칙입니다. 무슨 불로초를 찾아 달여 먹고 사슴피를 날마다 마신다 한들 늙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젊은 시절에는 그렇게 날고뛰던 야곱도 이제 늙어서 힘없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사자와 용맹을 다투던 장사도 늙으면 쇠약해지는 것이고, 오드리 헵번 같은 아름다운 여인도 늙으니까 쪼그랑 할머니가 됩니다. 그래서 늙으면 더 이상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 용사는 용맹과 힘으로 인정을 받고, 미인은 아름다운 용모가 재산이 되지만 힘과 미모를 잃어버린 늙은이는 무엇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늙어서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긴 흔적, 즉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이 130이 된 야곱의 모습과 스무 살 때나 마흔 살 때의 모습은 얼마나 달랐을까요? 스무 살 때는 남을 속이고 잽싸게 피하는 재주로 삶을 유지했던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맞아 죽을 뻔한 일도 많았겠지요. 마흔 쯤 되었을 때는 맞지 않기 위해서 먼저 때려야 하고 속지 않기 위해서 먼저 속여야 하는 생존경쟁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한 온갖 경험과 또한 갖가지 불행스러운 일을 겪으면서 야곱이라는 한 인간이 얼마만큼 다듬어지고 변화되었겠습니까? 모진 풍상에 꺾이고 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가꾼 노송과 같은 원숙한 인격, 이것이야말로 늙어 힘도 없고 예쁘지도 않은 늙은이의 유일한 재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 19:32). 우리는 그렇게 고통과 아픔의 세월을 살아온 노인들을 존경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도 역시 머지않아 늙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존경을 받는 노인이 되어야 하겠지요. 노인이라는 것,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는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야곱이 속임수로 살던 젊은 시절과 무자비한 생존경쟁의 중년을 지내고 나서 늙어서도 역시 다듬어진 인격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 그래서 아직도 속임수로 살고 무자비하게 행동한다면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존경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나이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는 사고도 치고 젊었을 때 실수도 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이해하고 용서하며 참을 줄 아는 인격이 형성되어야죠. 그것이 나이 든 사람의 내세울 수 있는 장점입니다.

나이가 몇이냐는 바로의 질문에 야곱은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처럼 야곱의 생애를 잘 표현한 말이 어디 있을까요? 야곱이 처음 나그네 길을 떠난 것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챈 후였습니다. 분노한 형 에서의 칼날을 피해 도망하는 길이었지요. 그렇게 급하고 외롭게 수백 리 피난길을 떠난 야곱이 그나마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도망길을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베델에서의 꿈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도망길에 광야 아무데서나 돌을 베개 삼아 누워 자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야곱에게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야곱의 객지생활은 정말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요? 집안이 어려워 객지에 나가 공장에 취직해서 일하는 나이어린 여공들은 한 마디로 봉이에요.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나 등쳐먹어요. 악덕기업주는 일은 죽도록 시켜먹으면서 월급을 떼어먹질 않나, 몇 푼 안 되는 방세 좀 밀렸다고 집주인은 엄동설한에 쫓아내질 않나, 어쩌다가 눈이 맞아서 좋아하게 된 남자는 단물만 빼먹고 변심해서 떠나버리질 않나... 그래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잖아요.

야곱이 딱 그 짝이었어요. 그래도 외삼촌이라고 믿고 찾아갔는데, 두 딸을 미끼삼아 14년 동안이나 죽도록 일만 시켰어요. 그러고 나서 월급을 주겠다고 하더니 열 번이나 말을 바꾸면서 속였습니다. 남을 속이는 데는 소질이 있는 야곱이었지만 외삼촌의 속임수 앞에서는 새발의 피였어요. 나그네가 당해야 하는 설움이었지요. 결국 전쟁을 하기 직전의 험악한 지경에 이르러 도망하다시피 떠나야 했습니다.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세겜에서 나그네로 붙어살다가 또 얼마나 수모를 당했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그 동네 추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했단 말이죠. 성질 급한 아들들이 무자비하게 복수를 하긴 했지만 또 그곳을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어디 한 곳 편하게 마음 붙이고 살 수 있는 곳이 없고, 어디를 가도 환영하며 맞아주는 곳이 없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렇게 나그네로 살던 야곱이 마지막 남은 생애를 역시 나그네로 살게 되었습니다. 바로 애굽에서 말이지요. 비록 출세한 아들 덕분에 고생은 면하게 되었지만, 나그네 생활에 이력이 난 야곱입니다.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야곱은 죽으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무덤에 장사해 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죽어서나마 고향에서 편히 쉬고 싶었나 봅니다.

뭐 따지고 보면 야곱만 나그네 세월을 사는 게 아니네요. 우리도 지금 모두 나그네 세월 아닙니까? 저만 봐도 고향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어려서도 맨날 전학다니느라 친구 사귈 틈이 없었습니다. 저 멀리 영국에서도 조금 살았고, 아프리카에 가서 살면서 고향 삼을까 했더니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더군요. 그러다가 이렇게 뉴질랜드까지 나그네로 흘러들어왔네요. 우리야 비록 나그네 신세지만 공기 좋고 아름다운 곳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나그네라고 크게 불평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나그네로서 불편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나그네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행인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한다”(벧전 2:11)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어차피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열거한 다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13절)고 말합니다. 비록 그렇게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약속을 우리처럼 명확히 받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나그네처럼 그것을 찾아 헤매는 삶이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 땅에서 이처럼 여기저기 떠도는 나그네로 살다가 결국 어디로 가시렵니까? 야곱처럼 죽어서나마 고향의 땅에 묻히는 것이 소원입니까? 우리의 돌아갈 본향 하늘나라, 우리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곳으로 우리가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이상 나그네의 세월이 아닌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130년 나그네 세월의 길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회고합니다. 오늘 한 해의 마지막을 지나는 우리가 지난 1년의 세월을 돌이켜본다면 어떻게 회고할 수 있을까요?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이었습니까? 아니면 감미롭고 부드러운 세월이었습니까? 그러나 사실 험악한 세월이었는지 감미로운 세월이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서 자신의 삶에 점수를 매기기도 하더군요. 90점이라는 좋은 점수를 줄 수도 있겠고 50점이라는 낙제점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며칠 전에 2학기 성적표를 받았는데, 무척 실망스러운 것이더군요. 그것이 공부든 일이든 혹은 관계이든 반드시 평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공부에서 B학점을 맞았다면 제가 가정에서 아버지로서는 몇 점을 맞았는지 평가가 있지 않겠어요? 또 친구나 이웃들과의 관계를 얼마나 성실하고 진실하게 꾸려왔는지 평가를 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몇 점짜리 교인이었는지, 저는 몇 점짜리 목사였는지 우리가 각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은 몇 점을 받을 수 있는 지난 1년이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몇 점을 주실 것 같은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평가를 해보는 이유는 우리에게 내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50점 밖에 못 받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내년에는 60점 이상을 받아야겠다고 다짐해야겠지요. 올해 나의 나그네 세월이 50점짜리였는데 내년에도 또 50점짜리로 산다면 나이만 한 살 헛먹는 거지요. 계속 그랬다가는 늙어서도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130년의 험악한 세월을 살면서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인격을 갖게 된 야곱처럼, 지난 한 해의 삶을 통해 더 성숙하고 더 사랑하며 더 아름다운 인격으로 변화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바이블넷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3-03 16:50)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