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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 1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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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 뉴질랜드에 이민와서 살면서 부러운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가족들을 불러와서 근처에 같이 사는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동생 가족을 데려오기도 하고, 언니네 식구들을 불러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동기들을 불러와 가까이 살면 많은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우리가 수화기만 들면 언제든지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할 수 있고, 비행기를 타면 다음 날 새벽에 한국에 도착할 수 있지만, 가까이 살면서 서로 마주앉아 기쁨과 걱정거리를 함께 나누는 것은 전화통화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우리가 고향과 친족을 떠나 이 멀고 낯선 곳으로 와서 사는 데 있어서 이처럼 혈육이라는 것이 애절하게 그립고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와 같은 처지의 한 사람을 보게 되는데, 바로 아브람입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멀리 이민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는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이 동행했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떠난 길이었지만 도중에 하란에 정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 일행은 데라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했던가요? 그래도 하란에서 어느 정도 정이 들고 안정이 되었건만,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나서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은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70이 넘도록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동생은 이민 떠나는 길에 따라나서지 않았고, 형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고, 외로운 이민생활에 남은 피붙이라고는 세상을 떠난 형의 아들 롯뿐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따라온 것은 그가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삼촌 아브람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자식이 없는 아브람은 아버지가 없는 조카 롯을 아들처럼 키웠을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으로서도 정 주고 마음 의지할 피붙이는 롯밖에 없습니다. 떠나온 고향에는 아직 다른 친척들이 살고 있지만, 우리처럼 비행기를 타고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 친척들을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에게 있어서 롯은 특별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롯과 함께 낯선 땅에서 생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는가 싶었더니, 아브람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의 가축이 너무 많아서 좁은 땅에 함께 거주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이제 조카 롯과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외롭고 힘든 이민생활, 가능하면 고향에서 동생도 데려오고 언니도 불러와서 함께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동안 어려운 시절을 동고동락한 조카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롯을 불러 얘기를 했습니다. 8절에서 아브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허허벌판과 같은 이민사회에서 유일한 한 점 혈육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도 부족할 지경인데, 서로 다투게 되었다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헤어지기로 하고 아브람이 제안을 합니다. 9절 보세요.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어디로 가야 할지 먼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롯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삼촌, 지금까지 자식처럼 보살펴주신 은혜가 너무 큰데 오히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꼭 떠나야 한다면 삼촌께서 먼저 땅을 선택하시고 그 후에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는데, 롯이 눈을 들어 어디가 기름지고 아름다운 땅인지 살펴보더니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선택해서는 떠나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뒤에 혼자 남게 된 아브람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얼마나 상심이 되었을까요?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고, 온정을 베풀면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때로는 호의를 악용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섭섭하고 또 외로움에 처하게 된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절망적인 일을 만났을 때 다른 가능성까지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롯이 기름지고 물이 넉넉한 땅을 차지하고 떠나버렸을 때 아브람은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나 남은 혈육도 잃어버리고, 가서 살아야 할 땅도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 보이는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조카도 잃어버리고 땅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아브람에게 땅과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눈을 들어 바라보는 순간이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회복하는 전환점입니다. 그렇게 눈을 들어 바라볼 때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 감추어진 보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눈은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전에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롯 역시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기적인 욕망의 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아들처럼 돌봐준 삼촌의 호의는 깨닫지 못하고 물질적인 풍요만 좇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그것은 소돔이라는 최악의 선택, 멸망의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저는 여러분이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기적인 욕망의 눈으로 동서남북을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동서남북을 바라보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너 있는 곳에서”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실패했던 곳에서, 우리가 배신당했던 바로 그곳에서, 우리가 좌절하고 낙심했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봉사하고 섬겨야 할 일들이 보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누구에게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지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약속과 축복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밝아오는 새해에 우리 교회를 위해서, 또 우리 성도들의 각 가정을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그 약속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 우리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믿음의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로 맞는 이 2006년 새해에는 여러분의 삶 속에 실망과 좌절이 극복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영광과 승리의 날들로 채워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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