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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사람 (출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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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한 때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의 교육을 받고 자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오늘 본문에서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을 치는 양치기로 나옵니다. 그 양치기 생활이 벌써 40년이 되었으니 마음속에 맺힌 한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제 80먹은 노인이니까 광야생활로 그을린 얼굴에 주름살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 그를 만나주시고 소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왕자를 만나주시지 않고, 광야의 양치기를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항상 높은 사람들과 일하시지 않고 낮아진 사람들과 일하십니다. 왜냐하면 낮아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줄 아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45세 쯤 모세에게 나타나시면 얼마나 더 일을 잘하겠습니까? 그러나 힘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힘이 있는 사람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가끔 우리는 '내가 10년만 젊으면 얼마나 더 하나님 일을 잘할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조금 많아도 믿음만 있으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제 말씀을 준비하는데 믿음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다가 하나 찾았습니다. 믿음의 반대말로는 어떤 말이 적절할까요? 저는 포기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포기는 결코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기가 막힌 기회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 기회를 누가 잡을 수 있습니까? 포기하지 않고 준비한 사람이 잡을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나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와 준비로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족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곳은 대단한 곳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떨기나무는 광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과 같이 생긴 2미터 정도 되는 나무입니다. 비옥한 곳에서 자라는 쭉 뻗은 나무나 고목나무에서 만나면 얼마나 더 멋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화려하게 인테리어가 된 곳으로 찾아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화려하게 인테리어가 된 곳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 하나님이 찾는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와 같은 교회를 더 찾고, 떨기나무와 같은 사람을 더 찾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가 부족하고 볼품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사람들만 만나주십니다. 목회자의 삶을 보면 대부분의 목회자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만 길인 줄 압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안정이 되고, 교회가 커지면 그 다음에는 간절한 기도가 없습니다. 살 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관심이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는 길이 없는 목회자의 기도에 더 관심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목회자'를 더 찾는 줄 압니다. 총회에 가도 큰 교회 목사님은 인기가 좋지만 작은 교회 목사님은 외면 당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의 능력과 인기에 매혹될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볼품없는 목사님을 찾아가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높으신 분은 하나님을 만나기 힘듭니다. 부족하고 볼품없는 분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저도 이번 미국의 교단 총회에 갔다 와서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힘이 없는 목사님, 연약하고 소외된 선교사님에게 더 관심을 가지자!'고 말입니다. 미국에서 큰 교회 목사님이 오신다고 전화하면 기꺼이 공항까지 갈 마음이 있지만 나이 어린 목사님이나 작은 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하면 그런 마음이 별로 없는 것! 그런 태도는 하나님의 복을 정말로 못 받을 태도입니다. 심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큰 교회 목사님의 눈에 들면 교회 성장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얻은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는 성장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크면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인 줄 압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과 멀어도 그분 교회는 커질 수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목회자라도 그분이 섬기는 교회는 작을 수 있습니다.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은 교회가 커지니까 무릎 꿇는 횟수가 줄어들고, 무릎 꿇어도 간절함이 없어지니까 하나님께서 멀어지는 것 같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솔직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자에게는 등을 돌리십니다. 사람은 높은 자에게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은 높은 자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관심이 없는 분'을 찾으면 사람의 도움은 얻어도 하나님의 도움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가지면 사람의 도움은 못 받아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작고 초라한 것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런 마음은 사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연약하고 부족한 줄 아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성공하면 더 기도하고, 건강하면 더 기도하고, 높아지면 더 기도해야 합니다.
반대로 낮은 위치에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기회가 적게 주어져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기회가 적게 주어질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찬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혹시 초라한 일을 하고 초라한 처지에 있습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초라한 집에 살고 계십니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몸이 많이 아프십니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 은혜를 받을 절호의 찬스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원에서 기도할 때나 특별집회를 할 때만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어떤 집회에 가서 감정이 찡해야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찡한 맛을 주는 탄산음료를 먹으면 조금 지나면 더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찡한 맛 속에는 이미 또 다른 목마름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감정이 찡한 것을 찾아다니면 그 영혼은 반드시 더 목마르게 됩니다.
언제 우리는 가장 하나님을 잘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 중에 감사하며 예배하는 마음으로 살 때 가장 잘 만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목적으로 40일 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며 양 무리를 인도하는 중, 호렙 산에 갔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파헤치며 살지 마십시오 >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호렙 산에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저기 앞에 보니까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사라지지 않는 신기한 장면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려고 가까이 가는데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때 모세가 '예! 저 여기 있어요' 하니까 하나님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가까이 가서 하나님을 보고 심지어 만지기까지 하면 더 짜릿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곳까지만 있고, 알게 하신 곳까지만 알려고 하십시오. 성경 말씀도 하나님이 신비로 남겨둔 것은 너무 파헤치며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말씀은 지식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양식으로 삼아서 먹는 것입니다. 때로 성경에 나오는 풀지 못할 의문이 있다면 그것은 그냥 의문으로 남겨두십시오.
말씀을 파헤치기만 하면 지식은 증가할 수 있어도 삶은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연구의 대상이 아닌 순종의 대상으로 보고 순종해야 삶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많이 아는 것보다 말씀을 많이 순종하는 것을 더 추구해야 합니다. 어떤 분을 보면 진리에 대한 추구가 대단해서 진리를 손아귀에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분에게는 대개 진리가 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서울대 출신 선후배 9명이 진리를 찾겠다고 삭발하고 절로 들어갔습니다. 그들 모두 박사과정에 있었고, 고시에 합격한 중앙부처 공무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진리를 찾을까요? 멋있게 보이지만 그런 분들에게 진리는 찾아가지 않습니다.
성철 스님은 돌아가실 때 '나는 아비규환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8개 지옥 중 제일 나쁜 지옥이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이라고 하는데 훌륭한 스님께서 아비규환 지옥으로 간다고 한 것은 그냥 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 스님은 진리는 내가 노력해 손아귀에 쥐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 아닐까요? 믿음이란 말씀을 내 손아귀에 넣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리는 내게 다가옵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읽으니까 나중에는 자기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자기를 읽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단순히 읽지 마시고, 성경이 내 마음을 읽도록 만드십시오. 그러면 그 마음에 진리가 임하고 그 진리가 그 사람을 자유하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이 선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
계속해서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거룩한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 하면 무엇인가 신비로운 느낌이 들어야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처럼 내가 밟고 있는 땅을 거룩한 땅으로 알 때 우리의 삶은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있는 가장 큰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 가든지 '내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라는 의식이 투철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한국에서는 미국을 동경하며 살고, 미국에 가서는 한국을 그리워하며 삽니다. 그렇게 다른 곳만 바라보며 일손을 놓은 모습은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가든지 그곳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서울 마포의 양화진에 가면 한국에서 순교하신 선교사님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묘비를 보면 사명자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비문은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썼습니다.
영국 사람들의 최고의 소원은 죽은 후에 거룩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교사님은 사명지인 우리 나라를 가장 거룩한 곳으로 여기고 사셨습니다.
이런 비문도 있습니다.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이 모든 생명을 한국을 위해 바치기를 원하노라!'
이 선교사들은 자기 나라를 떠나 선교지 한국을 자기 나라보다 더 사랑하다 죽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기 자리를 사랑하고, 그곳을 거룩한 곳으로 여겨야 합니다. 얼마 전에 임병철 목사님이 선교사 최종 인터뷰에 합격하고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이제 정든 곳을 떠나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남은 생애를 몽고에서 보낼 것입니다.'
또한 안식년을 마치고 몽고로 돌아가면서 임준호 선교사님도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기도로 내민 동역의 손길로 더욱 튼튼히 저희들의 옷자락을 붙들어주신다면 저희는 더 손을 펴 불쌍한 몽고 영혼을 주님 품에 이끄는데 죽을힘을 다하겠습니다.'
이 선교사님들처럼 자기가 보내어진 곳을 하나님께서 보낸 선교지로 알고 그 자리를 가장 귀하고 거룩한 곳으로 여기고 살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일터가 다 거룩한 곳입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갈 천국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룩한 곳이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도 거룩한 곳인 줄 알고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발에서 신을 벗으십시오 >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거룩한 곳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있는 곳을 거룩한 곳인 줄 알고 그곳에서 신을 벗는 태도입니다.
본문 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을 벗으라는 말은 결국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모세를 업고 가시겠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고독한 자, 상처 입은 자, 연약한 자, 실패한 자, 가나한 자, 지친 자라도
자기가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인 줄 알고, 그곳에서 신을 벗을 줄 알면 길은 열립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의 가나안 땅은 우리의 신을 벗어야 들어갈 수 있는 땅입니다.
옛날에 노예는 맨발로 다니고, 맨발로 일하며 주인의 기쁨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을 벗는 것은 내 것을 포기하고 주님 종이 되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처럼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삶의 중심에 계셔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살면서 세상에서 제일 복을 못 받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복주의입니다.
왜 기복주의가 나쁩니까? 기복주의에 빠지면 하나님이 어느새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기만 하면 그게 장땡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추구해야 그의 소원을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세요!' 하면서 아예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 지나친 태도입니다. 사실 축복 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천국에 갔는데 한 창고에 자기 이름의 선물 꾸러미들이 가득 차 있어서 '배달사고 아니냐!'고 섭섭한 마음으로 어떻게 된 거냐고 베드로 사도에게 물으니까 베드로가 '너에게 주려고 한 것인데 네가 구하지 않아서 못 줬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여러분! 열심히 구하십시오. '나를 축복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십시오. 다만 정욕으로 구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먼저 생각하며 구하십시오. 돈을 우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태도만 확고하면 사업의 축복도 구하시길 바랍니다. 자녀를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우리 자녀가 크게 쓰임 받는 자녀 되게 하소서!'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우리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제가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치며 살게 하소서!'
제가 올해 42세입니다. 조금 늦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저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저의 꿈은 45세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준비 과정으로 영어 말씀 사이트를 맛보기로 조금씩 선보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온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열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세계 많은 영혼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가 되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평생 300페이지 책 약 200권 정도 분량의 글을 남겼고 19세기에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도 역시 약 200권 정도의 분량의 설교를 남겼습니다. 현재 저의 인터넷 사이트에 제가 써서 올린 글의 분량은 300페이지 책 44권 분량인데, 저도 웨슬리나 스펄전 이상의 글과 영향력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 열심히 준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모습이 연약해도 준비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저께 저는 최근에 교회에 등록한 한 분과 꿈을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글쓰는 것이 꿈인데, 서로의 꿈을 격려하며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어떤 꿈을 꾸든지 그 꿈은 반드시 영혼을 일으키는 방향을 지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설을 써도, 방송대본을 써도, 사업을 해도, 붕어빵 장사를 해도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활력을 줄 것을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그런 방향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런 꿈을 심겨주고, 항상 하나님의 꿈을 불어 넣어주어야 합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자녀의 대학입시입니다. 입시가 중요하긴 하지만 자녀의 입시만 생각하면서 기도하지 말고, 내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생각하면서 기도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을 예비해놓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나에게 복이고, 그 복을 언제 주시는 것이 좋은 줄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장 좋은 길을 허락하실 분'이라고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십시오 >
그리고 '신을 벗는다'는 행위가 뜻하는 한가지 중요한 뜻은 '안식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는 신을 신다가 신을 벗을 때 비로소 쉬지 않습니까?
그처럼 우리는 열심히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 조용히 앉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안식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나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 조율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 안에 있어야 우리에게는 진정한 안식과 평안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영적으로 높고 크게 성공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정 시간을 구별해서 그 시간만은 예배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일 예배하는 시간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는 신앙을 확립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금방 무너지게 됩니다. 사업도 무너지고, 인생도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되면 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사단이 그때 더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영향력도 없고, 자기 변화와 발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사단도 그냥 놔둡니다. 사단은 믿지 않는 사람처럼 마음대로 살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느 미련한 사단이 그런 사람을 목표로 공격하겠습니까? 사단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단은 교회 잘 봉사할 수 있는 사람, 무엇인가 달리 살려고 애쓰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힘을 다해서 공격할 것입니다.
그 사단의 공격 중에서 최고의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혹이라는 무기입니다. 사실 환난보다 유혹이 더 무섭습니다. 환난은 1단계 무기고, 유혹은 2단계 무기입니다.
환난은 육신을 힘들게 하지만 유혹은 영혼을 망치게 하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궁원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유혹하면 그 유혹을 쉽게 이기겠습니까? 저는 어제 제가 남궁원처럼 잘 생기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얼굴이 그렇게 생기면 성도들의 마음이 울렁거려서 제대로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유혹에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거룩해도 내일은 장담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매일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우리가 신을 벗고 하나님 품에서 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 은혜의 자리에 이 아침에 있는 것도 진실로 큰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떨기나무처럼 보잘것없는 우리일지라도 하나님만 만날 수 있다면 길이 열립니다.
이 시간에 모세가 만난 '낮은 자의 하나님'을 여러분도 말씀 안에서 새롭게 만나시고 다시 한번 여러분들을 향한 고귀한 사명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 목사(분당 사랑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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