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마 05:21-22)

첨부 1


제 6 계명은 아주 단순한 명령이지만, 특별히 현대에 있어서 수많은 윤리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살인은 물론이요, 사형제도와 자살, 낙태와 안락사, 전쟁, 그리고 미움과 분노, 폭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를 제 6 계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 6 계명은 특별히 현대의 우리들에게 더 많은 어필을 하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계명은 아주 일반적인 명령입니다. 단지 “죽이지 말라”라는 말뿐입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선택의 자리에 섭니다. “무엇을 죽이지 말라는 말인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은 당연하겠지만, 이 명령에 동물을 죽이지 말라는 표현도 적용된다는 뜻인가?” 등의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동물을 죽이는 문제는 성경적으로 볼 때 엄격하게 금지된 사안은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위해 동물을 허락하셨습니다(창9:3). 또한 제물로서 동물들은 끊임없이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무조건 동물을 죽이고 먹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모든 동식물을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먹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 다음에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들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런 점에서 채식주의는 성경적인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이 순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생물에 대해 합당하게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지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이나, 즐거움을 위해서 함부로 생명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는 모든 생물을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잘 돌봐주는 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출23:5).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은 궁극적으로 인간 생명에 대한 경외감에서 극대화됩니다. 모든 생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지만,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1:26-27). 이런 점에서 인간의 생명은 여타의 어떠한 생명보다도 더 독특하고 유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매우 중대한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성경은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또한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입니다. 심지어 구약성경에서도 모든 인간의 가치를 동등하게 부여하고 있습니다. 왕이나 종의 생명의 차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고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야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칼로 우리야를 죽였으니, 칼이 네집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삼하12:9-10)”고 말씀하십니다. 아합왕의 멸망에 있어서도 동일한 접근이 가능합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나봇을 죽였습니다.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피를 흘린 것 때문에 아합의 피를 취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21:19). 이 모두가 창9:6절의 대 원칙에 준해서 취하신 하나님의 행동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먼저 고백해야할 신앙고백이 바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생명을 주관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리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든, 타인을 죽이는 것이든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명제는 be의 문제이지 become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어떤 기능과 능력이 있고, 상태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래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어떤 근거도 가지지 못합니다(낙태와 안락사 등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원리).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명령으로 6계명을 주셨는가?”입니다. 6계명은 과연 어떤 절차로도, 어떤 인간의 생명을 취할 수 없다는 것 즉 인간 생명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입니까? 분명 인간의 생명은 이 땅위의 어떤 다른 생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생명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결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절대성은 상대적인 절대성일 뿐,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절대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생명이 절대성이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생명체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물이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주신 것이라면 짐승을 죽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개인이 아닌 정부에 검을 허락하셨다면 그 정부는 인간의 생명을 제한할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비합법적인 모든 살인은 불가합니다.
비합법적인 살인의 대표적인 몇가지 경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낙태.
우리 나라에만도 한해 약 200만명의 태아가 낙태를 당한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이 생명을 자의로 제한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살인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 안에서 불법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묵인할 수 없습니다.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사회 환경이 낙태를 더 많이 시행하게끔하지만 교회는 절대 이것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1)
둘째는 안락사.
동일한 맥락에서 그가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원리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그의 생명의 중지를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의학적으로 논의되어야할 세부적인 원리들이 많이 있지만, 단지 그가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죽음으로 결론짓는 것은 상황주의적인 삶의 해석이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 속에 있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기적과 또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생명을 중지시키는 모든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안락사를 원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아가듯이 죽는 것 또한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마지막을 보내야 할 뿐,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멈추도록 스스로 결단할 자격은 없습니다.
셋째, 자살.
자살도 같은 맥락에서 자기 자신을 살인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리는 동일한 살인의 범주에 들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자살은 금지되어 왔으며, 초대교회는 자살한 사람들은 교회의 매장지에 매장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대한 범죄행위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살은 하나님을 향해 범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원칙적인 선에서 그러합니다. 성경에 언급된 자살의 경우는 항상 옳지 못한 경우를 언급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가령 사울과 가룟 유다 등의 자살에 대해서 성경은 비판적이지만, 삼손의 죽음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입니다. 이런 경우 자기 희생적 죽음(self-sacrifice)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한복음 15:13절에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다 거룩한 가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보다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기 희생적인 죽음의 동기가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자신의 불행이나 고통 등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있을 때 가치있는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을 제한함에 있어서 허용되는 경우들은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도 이 두 가지를 모두 허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정부의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부에 사람의 목숨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어떤 죄인들에 대해서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권한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또한 모세나 장로들에게 이런 일들이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지적합니다. 로마서 13장에서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셨으며,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과 동일하게 간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13:4절은 그 권세 즉 국가가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권세는 하나님의 대리로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칼을 합법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가지고 있는 칼의 기능은 두 가지 입니다. 먼저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응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단지 한 사람을 멸망시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이 문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 105문에서 제 6계명이 가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내 이웃을 생각이나 말이나 외모나 몸짓으로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는 실제 행동으로 얕잡아보거나 모욕하거나 증오하거나 죽이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이러에도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복수에 불타는 모든 마음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또한 내 자신을 해롭게 하거나 성급하게 위기에 빠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정부가 무기를 갖추고 있는 까닭의 하나는 바로 살인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언급합니다. 정부가 칼을 가지고 있는 까닭은 보응에 기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인을 막기 위한 동기라고 분명히 지적합니다. 이것이 정부가 가진 칼의 기능입니다. 합당하게 잘 사용된 칼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고 증진시키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물론 칼이 어떤 개인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직 정부에게 주어진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성경의 원리를 따라 개인적인 보응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롬13:4에서 언급하듯이 정부도 헛되이 칼을 휘둘러서는 안됩니다. 정부의 악에 의해 칼이 휘둘러질 가능성 때문에 정부가 가지고 있는 사형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것은 시기적절하다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형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부의 검을 쓸 권세에는 전쟁의 영역도 포함됩니다. 성경은 단순히 평화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정부가 안으로 검을 쓸 권세를 가지고 있듯이 국가를 공격하는 적들에 대해서 합당하게 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주 제한적으로 전쟁의 합법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선 합법적인 정부의 합법적인 결정과, 합법적인 목적과 원인, 유익과 비용에 대한 고려, 시민과 군인에 대한 명확한 구분 등을 전제로 할 때 제한적으로 전쟁이 용인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부주의한 살인입니다.
가능한 경우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정말 의도하지 않았던 살인의 경우입니다. 가령 갑자기 뛰어나오는 사람을 피하지 못해 죽게 만든 운전자의 경우나,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실수에 의해 사람을 죽게 만든 간호사의 등이 제 6계명의 원칙에 따라서 처리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부주의했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우발적인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가벼운 처벌을 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해서 “살인자”라는 칭호또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현행법이 그렇게 하듯이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람을 죽게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세상의 역사는 부주의한 살인의 경우는 도피성 제도를 두어서 살수 있는 길을 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더 확대시킨 살인의 개념을 정리해야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에 대해 교훈하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일은 분명 살인의 범주에 속합니다(요일3:15). 또한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것도 사람을 죽게 하는 것입니다(잠14:30).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서도 이웃에 대해서 생각이나 말, 외모나 몸짓으로 얕잡아보거나 모욕하고 증오하는 일을 6계명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복수에 불타는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6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까지 제 6계명이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깊은 동기까지도 보심으로 세상의 법률이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셨습니다. 6계명이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생각하며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임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나아가서 나 자신과 이웃을 살인하지 않는 6계명의 보다 적극적인 순종은 단지 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에 있음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묻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이웃을 사랑과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우정으로 대하며 할 수 있는한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107문)
/강화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