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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탐심을 버리라 (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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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탐심을 버리라(출20:17)

열 번째 계명은 여러 교단 안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는 십계명의 제 1,2계명을 하나로 통합하고, 10계명을 두 개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루터파 교회들도 10계명을 둘로 나누어 놓았지만, 천주교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로마 천주교회는 10번째 계명을 둘로 나눌 때 신명기의 법을 따랐고, 루터파는 출애굽기의 법을 따랐기 때문에 차이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 신명기와 출애굽기가 이 열 번째 계명의 순서를 달리 하기 때문에 세분화 하다보니 계명에 차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제 9계명을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신5:21)이지만, 열 번째 계명은 “너는 이웃의 집 등을 탐내지 말지니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루터파는 출20:17의 교훈을 따라 제 9계명을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이며, 제 10계명은 네 이웃의 아내나 종 등을 탐내지 말지니라“입니다. 이런 차이가 오는 것은 근본적으로 10번째 계명을 둘로 나누려는 잘못된 시도에서 출발합니다.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 자체가 10번째 계명을 둘로 나누는 것이 옳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롬7:7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라고 인용함으로 열 번째 계명을 하나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또한 롬13:9에서는 계명들을 언급할 때 동일한 맥락에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라고 언급함으로 열 번째 계명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열 번째 계명은 이전의 계명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줍니다. 사실상 유심히 살펴보면 이전에 열거했던 계명들과 매우 많이 닮았습니다. 7계명은 성적인 부분에서의 탐심을 반영하고, 8계명은 재물의 관점에서, 9계명은 거짓증거의 문제와 명예의 부분에서의 탐심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제 10계명은 일종의 모든 계명에 적용되는 원리를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탐심이라는 것은 행동하기 이전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의미합니다. 이 탐심에서부터 살인이 나오고, 간음이 나오고, 도적질과 거짓말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각 계명이 가지고 있는 율법으로서의 정신적인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왔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 10계명은 모든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마음과 동기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 번째 계명은 이전의 계명과는 달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을 다루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지 않음으로 율법을 지켰다고 말할 수 없음같이, 제 10계명에 이르러서야 이 열 번째 계명이 모든 계명들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죄의 문제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세상의 법은 어떤 죄가 저질러져야 그를 징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법률은 더 근원적인 죄악으로 그 마음의 동기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마음의 근원까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말을 했느냐 안했느냐, 어떤 행위를 했느냐 안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의 계획을 품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열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내적인 동기와 자세를 점검하도록 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적질을 하였다는 사실 자체보다 더 근원적으로 그 물건들을 탐낸 것이 문제였습니다(수7:21). 모든 죄악에는 우리 안에 있는 탐심으로부터 기인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열 번째 계명이 마음 속에 있는 탐심의 문제만을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인 탐심은 반드시 외적인 탐심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미2:2) 본문에서와 같이 탐하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동기만이 아니라 내적인 자세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들을 포함합니다. 탐심의 문제가 근원적인 문제이기에 우리가 탐심에게 계속적으로 자리를 내어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실제적인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10 계명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이웃의 아내와 이웃의 집과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이웃을 무너뜨리며 탐욕스러운 손을 뻗힐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을 다스려야 합니다. 약1: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내 속에 끊임없이 오고가는 탐심의 문제들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오늘은 그것이 단순한 탐심이겠지만, 내일은 그것이 우리를 깊은 죄악으로 빠뜨리는 원천적인 동기가 될 것입니다.
탐심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성경은 훨씬 더 심각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것이 마음 속에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탐심이 하나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이끌고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동기는 탐심입니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배우려고 하지만, 정작 건강하지 못한 욕구입니다. 부모를 공경함에 실패하는 것 역시 탐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십계명을 범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를 탐심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게 가지고도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이 가지고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 번째 계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온전히 누리고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내 속에 있는 탐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단지 이웃의 소유들을 탐내지 말 것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더 많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명예와 권력, 쾌락과 지식 등에 대한 탐심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좋고 합리적인 이유들을 들어가면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지만, 그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탐하는 것은 분명 그것으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르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 속에서도 이런 탐심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제도화하셨습니다. 신명기 24장은 추수할 때 혹시 한 부분을 잊어버리고 추수하지 않았다면 다시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추수하다가 떨어뜨린 곡식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아 줍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객을 위하여 추수할 때 100%를 추수해서는 안되었습니다. 탐심을 경계하심입니다. 인간이 탐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극도의 이기적인 상황으로 빠지게 되며, 곧장 공동체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영달과 자기의 지식과 명예와 성취에 마음을 쏟다가는 공동체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탐심은 인간 개인을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인 셈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5:3-5) 모든 탐심을 나의 마음에서 &51922;아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항상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지혜로움과 믿음이 현대의 우리들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마치 무엇인가를 가져야만 성취하는 삶을 살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정작 우리가 가지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준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실상은 잃어버린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탐심에 따라 많이 소유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확정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천국 심판대에 이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제목은 우리가 얼마나 가지고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주었느냐가 실제적인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모든 욕구가 다 잘못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욕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가령 스포츠를 하면서 승리에 대한 욕심을 가지는 것은 정상입니다. 배우자를 보고 성적인 욕구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을 더 쌓아가고 더 좋은 직장을 얻기를 소원하는 마음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문화명령(창1:28)을 주셨을 때 우리에게 주신 욕구입니다. 이 욕구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이 발전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일과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에까지 탐심을 가지고 탈취하고 쟁취하려고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자기의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사자의 경우 자기의 배가 부른데 사냥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바로 앞에 영양이 돌아다녀도 사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심은 끝이 없습니다. 이 쯤되면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정당한 욕구의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결국엔 탐심이 자신을 죽게 만들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탐심으로 인해 올라가는 것같지만, 결국엔 탐심이 우리를 추락하게 만들 것입니다. 모든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돈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딤전6:10).
범죄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욕구를 잘 다스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먹고 자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억제치 못하게 과도하게 먹고, 과도하게 잠을 자며, 과도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은 분명 정당한 욕구의 분출 단계를 넘어선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심의 문제는 불교와 기독교를 나누는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불교는 먹을 것있고 잠잘 곳있으니 더 이상 욕심을 내고 추구하는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먹고 마시는 것이 있으므로 만족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일하지 않는 것, 선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입니다. 그것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욕구도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오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42:1-2)라고 노래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갈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소망하기까지 하였습니다(빌2:23) 우리는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라는 본문에 근거해서 다양한 덕목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욕망은 죄로부터 말미암지만, 건강한 욕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과 주어지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상황 가운데서 만족하며 감사할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참 만족이 없음도 고백해야 합니다. 전5:10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분깃이며 영원한 재산이며 삶의 의미가 되신다는 사실 때문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시73:25-26).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가 되심으로 그 분안에서 우리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시23). 그러나 하나님의 덕목을 향해서는 끝없는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사모하는 열심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하고 악한지 모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들 모두는 외형적인 모습만으로 볼 때는 모두가 성자라 불리울만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어 보이면 우리는 지옥에 가는 것이 지극히 합당할만큼 죄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말했습니다. 이 연약함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도 끊임없이 갈등하게 했으며(롬7장),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생들 속에서 볼 수 있었던 부패한 마음입니다(창6:5).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죄악을 깨끗케 해 달라고 기도하며,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정결케 해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113문이 말하듯이 우리는 진심으로 항상 죄를 미워하고 선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이 많이 있겠지만, 세상으로부터, 죄악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잠4:23).

오늘로서 십계명 강론을 마치게 됩니다. 십계명은 구약시대의 죽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새롭게 우리에게 재조명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원리적인 측면에서 십계명의 가르침은 가장 적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드러내는 장치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예나지금이나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삶의 원리요 표준이 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반드시 십계명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십계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십계명은 처음부터 열개로가 아니라 하나의 계명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누구든지 그 중 하나를 범하는 자는 곧바로 열 가지를 범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나라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십계명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강화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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