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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실패 (삿 16: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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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은 이방여인 들릴라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실패한 성도가 되고 말았다. 삼손은 잘못된 사랑에 빠졌고, 잘못된 이성을 사용했고, 잘못된 고백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그의 실패를 통하여 가장 큰 교훈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깨우치셨다. 이로 말미암아 실패한 삼손은 하나님의 위대한 교훈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삼손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도의 실패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려주신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실패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신앙의 실패를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1. 이방신이 득세한다 (23-24)
삼손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블레셋 사람들은 이방신 다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블레셋의 방백들과 백성들이 동일하게 말하였다. '우리의 신이 우리의 원수 삼손을 우리의 손에 붙였다' (23,24). 삼손의 실패로 말미암아 이방종교가 더욱 강화되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 모여' (23) 대규모 집회를 열고, '큰 제사를 드리고' (23), '찬송하며' (24), 즐거워했다 (23,24). 성도의 실패는 이방종교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성도들이 신앙을 지킬 때는 고난을 받더라도 결단코 이방신이 득세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이방신은 위축당하고 만다. 이 사실을 엘리야 선지자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바알종교가 온 땅에 범람했을 때, 엘리야는 혼자서라도 신앙을 굽히지 않고 싸웠다. 이때 결국은 바알종교가 꺾이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앙인들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을 때 고난을 받았으나 마침내 우상숭배는 위축되었다. 그러나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지 못할 때는 고난을 받건 영광을 얻건 반드시 이방신이 득세하고 만다. 이에 대하여 솔로몬 왕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솔로몬은 이방여인들과 결혼함으로써 신앙보존에 실패하자 온 땅에 이방신들이 가득차게 되었다.

성도의 신앙실패는 일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전투에서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악한 영의 득세를 야기시키고 만다.

2. 성도가 조롱당한다 (25-27)
삼손은 신앙에서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마음이 즐거울 때에 말했다.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조를 부리게 하자' (25). 삼손은 이방사람들을 위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조를 부리니라' (25). 삼손은 본래 '하나님의 나실인' (13:5)이었다. 그러나 신앙에 실패했을 때, 삼손은 이방인들을 위한 어릿광대가 되고 말았다. 온 이방백성들이 부끄러운 삼손의 재조를 구경하였다. '그 집에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명 가량이라 다 삼손의 재조 부리는 것을 보더라' (27). 삼손은 원숭이 성도, 연극배우 성도, 길거리의 크라운 (Crown) 성도가 되고 말았다. 신앙을 지키려다가 구경거리가 된다면야 얼마나 훌륭한 일이겠는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이다. 그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8)을 가지고 세상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느부갓네살 왕이 굴복하고 말았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이다. 다리오 왕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경배하지 말라는 엄명을 알고도 다니엘은 신앙을 지켰다 (단 6:10). 이때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결국 다리오 왕이 굴복하고 말았다. 사도 바울도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고전 4:9).

신앙을 지키려다가 구경거리가 된다면 이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불신앙 때문에 구경거리가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유다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여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도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고말았다. 시 137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시 137:3). 이때 포로가 된 유다백성은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서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놓고 부끄러워하면서 울었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일은 이미 벌어지고 만 것이다.

신앙에 실패한 성도는 세상사람들의 노리개가 되고 만다. 성도의 실패는 일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세상사람들의 노리개와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는가 살펴보자. 우리가 세상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가. 아니면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가. 회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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