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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에서 삽시다 (느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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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삽시다(느 11:1-6)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가장 알려진 산 둘을 꼽으라 하면 이북의 금강산과 이남의 지리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저는 두 산 모두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운 금강산'이라는 가곡을 부르거나 많은 실향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론을 자주 접했습니다. 일만 이천봉우리 저마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금강산 언제인가 정말 통일이 되는 날 찾아보고 싶은 산수입니다.
또 우리의 가슴에 살아있는 산이라면 지리산입니다. 모든 역사의 아픔이 담겨있는 산, 민족의 역사가 살아있는 산이 바로 지리산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강산은 빼어나긴 하지만 장중하지 못하고(秀而不莊),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莊而不秀)고 했습니다. 금강산은 그 수려한 봉우리들이 하늘에 빼어나 있되 장중한 무게가 없고 반면에 지리산은 태산부동의 너른 품으로 대지를 안고 있되 빼어난 자태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빼어나기도 하고 장중하기도 하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의 경우이든 사람의 경우이든 이 둘을 갖추고 있기란 매우 드물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둘 중에 하나, 빼어남이냐 아니면 장중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빼어남은 금방 눈에 뛰는 것입니다. 한 눈에 반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두드러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것에 의해 일생을 바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장중함, 무게가 있음, 어쩌면 열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눈에 띄지는 않고, 감동도 느리게 오는 그런 것들은 사람들이 그리 찾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서 예수님께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사람들은 빼어난 것, 길이 환히 열려져 있는 곳, 들여다 보면 금새라도 매혹적인 것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1장에는 예루살렘 성내의 거주자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잘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와 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성내에는 말하자면 폐허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구 조사를 통해 그 예루살렘 성안에 인구를 재정착 시켜야 하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은 둘레가 거의 6.5킬로미터가 되었기 때문에 그 성을 지킬 사람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옛적에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것보다도 예루살렘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는 곳,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루살렘이 바로 신앙의 핵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안에 살게 된 사람의 명단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사실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징적인 장소인 예루살렘의 성벽을 짓기는 했지만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싶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예루살렘 성안에는 정리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따라서 성벽이 완성되기는 했어도 살기는 훨씬 불편한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바깥 세상이 훨씬 살기가 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곳에 누가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말씀의 서두에 언급한 것을 빌어서 말하자면 빼어난 곳이 아니라 장중한 곳, 얼핏 당장 보기에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장소인 예루살렘 성, 들어가면 오히려 할 일이 태산같은 곳, 편안함을 누리기 보다 투자해야 할 일이 엄청난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과 중심으로 영광을 누렸던 옛적 예루살렘이 아닌 헌신과 투자와 봉사가 요구되는 그런 장중한 장소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발견하고 싶은 것입니다. 빼어남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근본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근본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합니다. 오히려 겉으로 드러난 것만 추구하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보이는 것은 잘하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에는 투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영광과 편안함을 누리고 이름을 드러내는 것에는 금방 뛰어들려고 하지만, 노력과 수고가 들어가야 하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표가 나지 않는 곳에는 자신을 바치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예루살렘 성이 그렇습니다. 그 옛날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머물러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곳에 있음으로 해서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더 많은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 들어가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없을 것 같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빼어난 금강산을 좋아하는 듯 하지만 얼른 눈에 띄지도 않고 그것에서 오는 감동도 매우 더딘 지리산의 근본을 추구하는 장중함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일 첫 번 부류를 보십시오. 1절 앞부분입니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제일 먼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지도자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도자들은 빼어남보다 근본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누리게 될 영광 때문에 자신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아무것도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없어도, 예루살렘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바로 지도자들입니다. 옛적 영광이 이미 사라진 예루살렘, 이제는 성을 지켜야 하고 새롭게 일으켜야하는 곳인 예루살렘에 자신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바로 지도자다운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영광이 보이는 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자신을 투자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옛적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금 너무도 할 일 많은 예루살렘에 자신이 살겠다고 결단하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교회는 지도자 풍년의 교회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도자들은 어려움 때문에 미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투자의 두려움 때문에 안락함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옛날에는 목사가 결혼 배우자 순위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라지요? 몇 번째 간다고들 합니다. 아마도 그 자리가 영광을 누리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땅에 1993년 통계에 의하면 318개의 신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매년 1만 2천명 이상의 목회후보자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직 이민 교회에는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자주 들은 이야기지요? 목회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지도자의 자질은 영광보다 앞선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여러분 백성의 지도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러시다면 예루살렘에서 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곳인 예루살렘에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남들은 편안히 쉴 때 깨어서 그 성을 지키는 자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눈앞의 영광이 아니라 영원히 누릴 참 영광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그룹입니다. 1절 뒷부분을 보시면 백성 중에서 십분의 일을 제비뽑았습니다. 그 제비로 뽑힌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살게 된 것입니다. 제비 뽑혀 예루살렘에 살게 되는 것도 거대한 축복입니다. 비록 자원해서 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제비 뽑혀서 예루살렘에 거한다는 것도 사실은 은혜입니다. 비록 당장은 힘들고 어려워서 불평이 터져 나온다고 해도 언제인가는 그 예루살렘 때문에 영광의 꽃다발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보상이 있습니다.
옛적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Honesty pays라 했습니다. 정직함은 언제인가 갚아줄 것 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원칙도 이러합니다. 고난처럼 보이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살게되면 언제인가는 아름다운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부류의 사람입니다. 3절을 보실까요?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마지막 부류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원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멋진 사람들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참으로 멋이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누가 칭찬해 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가장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그 사람들을 위하여 백성들이 무엇을 했다고 했습니까? 자원한 자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복을 빌어 주는 백성들이 자원하는 자들에게는 있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자신을 위하여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님, 누구 누구 성도에게 복을 내려 주옵소서. 날마다 우리들의 기도 속에 여러분의 복을 빌어줌이 있다면 그런 기도를 받는 사람들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참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모델이 됩니다. 교회는 이런 자발적인 헌신자로 인하여 성장합니다. 누가 장로님들에게 월급 주는 것 보셨습니까? 매주일 마다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성도들의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권사님과 집사님, 교우들이 월급받고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발적이지 않습니까? 자발적인 것이 아름답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불편합니다. 기쁨이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불편을 느끼게 합니다. 왠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 힘이 듭니다. 차라리 없으면 더 즐겁게 할텐데 그렇게 생각이 들 때가 생기는 것입니다.
요즘 저희 교회가 조금은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자발적인 헌신자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빨리 바뀔 수가 없는데, 건축 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자원하는 사람들이 일하니까 얼마나 즐겁고 신나게 일하는지, 그래서 변화가 빠릅니다. 교회전면 벽을 허물고, 강대상을 새롭게 만들고, 페인팅을 하는 모든 일들이 자발적인 헌신 때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교회를 위해 일합니다. 어제도 약 10여명이 넘는 숫자가 1시가 다 되어가도록 교회를 위해 일을 했습니다. 자발적이지 않으면 돈을 받아도 1시가 되도록 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발성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일하는 사람 본인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들도 즐겁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바로 백성들의 복빌음을 받는 사람들이기에 더욱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Henry Law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구속받은 무리는 구원의 초장에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구원의 초장인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 사십시오. 비록 어려움에 있는, 당장 눈앞의 영광을 보여주지 않는 예루살렘이라 할지라도 우리 신앙의 근본이 되는 예루살렘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예루살렘이 가진 참 의미를 향해 달려가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영광, 사람들의 복빌음을 마음껏 누리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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