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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에 04: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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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삼일절에 도봉산 산행이 있었습니다.
사순절이기도 하고 삼일절의 의미도 남다른데 산행을 하는 것이 가한 일인가 생각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만 주님께서도 안식일에 도움이 요청되는 병자를 고치심으로 안식일을 안식일되게 하셨던 것을 생각하여,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 그 날의 의미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적극적으로 무엇을 함으로써 그 날의 의미를 성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분이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광동교회의 올해 표어인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 그리고 친교 공동체로 모이자는 지침을 나름대로 충실히 이행한 행사였다고 판단됩니다.
더욱이 등산을 마치고 도봉산 입구에서 등산객들에게 우리 교회 전도지와 기미독립선언문을 우리 교회 봉투에 넣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왠 봉투인가 의아해 들 하였지만 아마도 귀가하는 차 안에서 우리 교회 전도지를 통한 복음의 말씀을 읽었을 것이고 또한 한글로 번역된 기미독립선언문을 읽으면서 삼일절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는 귀한 기회를 우리 교회가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도봉산 정상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할 예정이었는데 도봉산 정상이 너무 협소하고 사람들은 많았고 해서 행사를 하질 못했습니다.
삼일운동은 그 대표 33인중에 기독교인이 16명 천도교인이 15명 불교인이 2 명 이었던 것으로 보나 삼일운동으로 인한 피해에 있어 교회와 기독교인이 많았던 점 등으로 보아도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한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삼일운동은 약 3개월 정도 지속되면서 전국 211곳에서 200여만명이 참가하였으며 모인 횟수도 154회이며 총이나 칼에 맞아 죽은 동포가 7,509명, 다친 사람은 15,961명 감옥에 갖힌 사람이 46,948명 집이 715채가 불에 탔고, 교회가 47개 학교가 2개 면사무소가 47개가 타거나 부서졌다고 합니다. 특히 다친 사람은 눈이 빠지거나 다리 귀 코가 잘린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삼일운동은 우리나라 기독교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신앙유산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삼일절 애국주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자 합니다. 원문대로 읽을 수도 있지만 뜻을 전달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한자어를 우리말로 옮긴 선언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삼일운동과 같은 절박한 상황을 맞이한 유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하만이라는 사람의 계략에 의해 전멸될 위기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두 사람에 의해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는 데, 한 사람의 이름은 모르드개이고 한 사람은 당시 왕후였던 에스더입니다. 모르드개는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자이고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이 문제에 대해 행동한 사람입니다.
모르드개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역사와 상황 앞에 하나님의 부름과 사명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에스더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나님의 그 부름과 그 사명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한이 있어도 숨거나 도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 라도 그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밤을 수놓고 있는 붉은 십자가를 이상히 여깁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십자가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열차를 타고 전국을 다녀봐도 교회가 없는 동네가 없고 또 교회마다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저 작은 동네에서 어떻게 저런 교회를 지었을까 의문이 가지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십자가의 꽃은 우연히 핀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선교초기부터 개화기 그리고 삼일운동에서 육이오에 이르기까지 이 땅 곳곳에 흘린 순교자의 피가 씨앗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 70년대 80 년대 90년대에는 기독교가 하느라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얼마나 많은 십자가의 씨를 심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형편입니다. 21세기의 기독교가 그 검증이 될 것입니다.
이제 21세기 이 나라 이 민족의 앞날에 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교회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소위 말하는 교회만의 하나님의 나라에 숨어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 이 민족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망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세상의 단체들이 하는 방법으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더가 그 일을 감당하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산에 있는 모든 유다인이 기도하고 자신도 기도함으로 이 일을 감당하겠다고 한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소금처럼 보이지 않게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말 아래 놓여 있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 등불처럼 모든 사람들이 보이도록 일 해야 합니다.
이 일을 거꾸로 해서는 안됩니다. 자랑하고 싶어도 남이 모르게 할 일은 모르게 해야 하고 하기 힘든 일, 회피하고 싶은 일이라도 알게 할 일은 드러 나게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 민족의 3/4에 해당하는 믿지 않는 자들을 전도하는 일에서도, 남북통일을 이루는 일에서도, 이 땅의 공의와 정의를 이루는 일에서도 이 땅의 구조악과 싸우는 일에서도 그리고 이 땅의 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에서도 적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순절 주님의 발자국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범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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