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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오미의 그루터기 (룻 01: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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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의 그루터기 (룻 1:22-2:1)

1. 보리 추수할 때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피붙이 살붙이는 다 죽어 없어져 버리고 고향 사람들의 눈에는 낯설기만 한 모압 여자 하나를 며느리라고 달랑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과연 이 두 과부들이 어떻게 생존해 나갈 것이며,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사라져 버릴 것인지, 그렇다면 그 뒷 이야기는 더 볼 것도 없겠지요. 1장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2장이 기록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1장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세요. 나오미가 모압에서 돌아왔는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다는 것입니다. 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라는 것은 나오미와 룻의 남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상황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 보리 추수가 아니었다면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는 그대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르지요. 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나오는 이 한 마디,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이 이르렀다는 짧은 언급은 룻기의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설에서는 이것을 복선(複線)이라고 하지요.

물론 이 룻기는 단순히 룻이라는 효성이 지극한 한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보다 훨씬 위대하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룻기는 완벽한 구성과 스토리를 담은 단편소설입니다. 아무리 룻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메시지가 있다 하더라도 이 룻기의 구성이 엉성하고 이야기가 아무 흥미도 없게 기록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나타내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훨씬 효과적이지 못하게 되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이 룻기를 기록한 사람의 공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우리 개혁신앙에서 동의하는 대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계획과 뜻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는데, 그 계시의 한 방편으로 기록된 계시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기록하셔서 우리에게 소포로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조셉 스미스가 천사의 지시를 따라 땅을 팠더니 몰몬경이라고 하는 금판이 나왔다는 식이 아닙니다. 선지자 무하마드가 알라신의 말씀을 그대로 암송해서 전달되다가 한 자의 오류도 없이 기록된 것이 코란이라는 식으로 성경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들과 달리 이 성경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 자기들이 살았던 역사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과 같은 뛰어난 시인은 주옥같은 아름다운 시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했고, 잠언 같은 지혜서는 구구절절 탁월한 교훈들로 채워져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갈릴리 문인협회 회원이었다면, 예수님의 생애가 한편의 서사시로 남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룻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소양과 탁월한 표현력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룻기의 또 다른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은 인간 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잘못 전달하지 않도록, 그의 기록에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영감하시고 보호하셨지만, 그에게 없던 문학적 소양을 주셔서 이 완벽한 구성과 아름다운 문체의 룻기를 만들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룻기의 저자는 그가 가지고 있던 문학적인 재능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게 된 영광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재능,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 이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만약 저에게 문학적인 재능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노래를 잘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홍사덕 씨처럼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 있게 말을 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면 복음을 변호하고 이교와 이단을 대항하는 변증가가 되고 싶습니다. 또 만약 제가 이인제 씨처럼 선동과 선전에 능하다면 부흥사가 되어서 방방곡곡을 누비며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없는 재능을 탓할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재능을 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시인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굳이 달란트 비유를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모습, 우리의 가진 것으로 주님을 섬기고 그분께 쓰임받도록 내어드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어쨌든 제가 보기에도 여러분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쓰일 수 있는 재능이나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들이 잘 활용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도록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2. 희망이 시작되는 곳

이제 2장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편 죽고 아들들도 죽고 재산도 남은 것이 없이 완전히 몰락해서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남은 연줄이 있어서 희망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력한 사람이라는 뜻은 재산이 많다는 뜻과 함께 법률적인 지식이나 지위가 상당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보아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족보를 살펴보면 유력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이고 할아버지는 나손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형이며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의 아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입니다. 그러니까 아론의 아내가 보아스에게는 고모 할머니인 것이지요. 또 나손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에 각 지파를 통솔하는 족장이 있었는데, 유다지파의 족장이 바로 이 나손이었어요.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선봉이 되었던 것이 유다 지파 아닙니까? 바로 그 유다 지파의 족장이 보아스의 할아버지였단 말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유력한 집안이겠습니까?

또 보아스의 어머니는 누구인가요? 저 유명한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입니다. 기생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이긴 하지만, 이 라합은 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마치 잔다르크처럼 추앙되는 여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미모도 빼어났을 것이라고 짐작되지요? 이 라합의 도움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라합의 가족은 이스라엘에 편입되었는데, 보통 서민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힘깨나 있다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라합을 아내로 맞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유명해지고 가문에도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경쟁이 치열했겠지요? 그런데 결국 누가 차지했습니까? 그 막강한 유다 지파의 족장 나손이 자기 며느리로 삼은 것입니다. 쟁쟁한 경쟁자들이라 할지라도 유다 지파의 족장과는 상대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말하자면 최고의 권력자의 아들과 최고의 인기스타가 결혼한 경우가 되겠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누군가 하면 보아스인 것입니다. 보아스가 어깨에 힘을 줄만 하겠지요?

우리 한국사람들도 족보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통성명을 하다가 성이 같으면 본을 묻습니다. 또 본이 같으면 항렬을 따지지요? 그래서 금방 위아래가 결정됩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사람이 형님 되는 수도 있고,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렇게 족보를 따진다는 것은 그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소위 양반 집안이라는 것이지요. 하긴 족보 따지다 보면 우리나라 오천만 국민 중 양반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전주 이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그래서 다 왕족이고 다 귀족입니다. 김이박, 3성만 해도 우리나라 인구의 47%라고 합니다. 글쎄 양반들은 자손도 많이 낳아서 이렇게 번창한 반면에 신분이 낮았던 사람들은 자손도 낳지 못해 다 멸종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보아스라는 사람은 굳이 족보를 따질 것도 없이 이스라엘 민족 중 가장 큰 지파의 어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아스가 나오미의 친족이라는 것입니다. 몰락할 대로 몰락해 버린 나오미의 형편을 묘사한 1장에서는 그런 희망이나 가능성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는데, 고향으로 돌아와서부터, 2장으로 들어와서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1장의 절망과 한숨이 이제 희망과 기대로 바뀝니다. 아주 깜깜하던 1장의 분위기에 작은 불빛이 스며들고 있지요? 보아스가 친족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다 망해버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런 희망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중요한 테마가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 환상에서 하나님은 유다의 멸망을 커다란 나무가 베어져 넘어지는 것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지와 잎이 무성했던 큰 나무가 그만 밑둥이 잘려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한때 흥왕했던 유다 왕국이 바벨론이라는 신흥제국의 침입에 완전히 파괴되고 모든 백성이 포로가 되어 잡혀가게 됩니다. 한번 잘린 나무는 그대로 끝장입니다. 잘린 나무를 다시 세워 심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접합수술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멸망한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록 나무가 잘려 넘어졌지만 거기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나무가 잘리고 난 곳에 무엇이 남습니까? 나무 밑둥이 남지요. 그것을 그루터기라고 합니다. 그 그루터기가 바로 회복과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그루터기가 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루터기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그루터기에서 새 싹이 돋아납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희망이고, 회복이 이루어지는 시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루터기를 남겨두셨다는 것,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나오미의 집안은 마치 나무 밑둥이 잘린 것처럼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집안의 뿌리를 뽑아서 몰락케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나무는 쓰러졌지만, 그루터기가 남아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 그루터기로부터 새로 시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재기하고 그 집안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루터기를 남겨두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넘어지거나 몰락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도 무너져내리고 절망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도 좋고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던 사람들 중에서 믿음을 잃고 떠난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다시 일어서며 잃어버린 믿음과 열심을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여러분이 힘들고 지쳐서 쓰러졌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그루터기를 남겨두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그루터기를 붙잡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그 믿음의 뿌리가 살아 있는 한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서 크고 울창한 나무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그루터기를 남겨두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또 다시 일어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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