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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국인 새색시 (룻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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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그녀를 환영했습니다. 10년이나 지나서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그동안에 일어난 변화를 보면 놀랍기도 했겠지요. 동네의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베들레헴 타임즈가 있었다면 그날 1면 톱기사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나오미의 뒤에 따라온 룻이라는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의 한 마을에 파란눈 며느리가 들어온 것처럼 신기한 구경거리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외국 여자, 즉 이방인 여자라는 것, 젊어서 과부가 되었는데도 시어머니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것 등등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이야기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의 소문은 금방 퍼졌고, 온 동네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룻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한편 룻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고향 모압에 있을 때부터 남편이나 시어머니로부터 베들레헴 이야기를 종종 들었었겠지요. 전에는 유다니 베들레헴이니 하는 곳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이제 남편의 고향이니까 궁금하게 생각되기도 하고, 가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또 시어머니 나오미는 종종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곳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되면서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시어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낯선 나라에 오게 되었습니다. 전에 모압에서는 나오미가 이민자였는데, 이제 룻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오게 된 것입니다.

룻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 늘 사모하던 시어머니의 고향,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마침내 발을 딛게 되었을 때 룻의 감회가 어땠을까요?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의 자서전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아프리카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정말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저도 처음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의 그 흥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뉴질랜드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의 감격을 기억하십니까? 지상 최후의 낙원,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자연, 그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땅, 한국에서 우리가 꿈꾸던 뉴질랜드의 모습은 이처럼 이상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환상이 깨진 때는 언제였습니까? 우선 당장 먹고 살 일이 캄캄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가 아니던가요?

룻이 보았던 베들레헴은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풍요롭고 여유로운 땅이었습니다. 모두들 나와서 모압에서 돌아온 자기들을 환영해 주는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의 땅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의 땅이었습니다. 여기서 산다면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연환경이 좋고 아름다운 땅이라 해도 먹고 살 일이 캄캄하다면 그 아름다움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땅이라 할지라도 굶어죽을 상황이라면 그 거룩한 땅에 대한 애정이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말하는데, 맨처음 단계를 관광객 단계라고 합니다. 아무리 거칠고 힘든 곳이라 할지라도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그런대로 즐겁게 지낼 수 있습니다. 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관광객이 이것저것 호기심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즐기는 것과 같은 상태라 해서 관광객 단계라고 합니다. 이 관광객 단계가 끝나면 고통이 피부에 느껴지고 불편함에 대한 불평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룻은 이 새로운 땅에서 관광객 단계를 거칠 여유도 없이 당장 생존의 문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르지요. 하나님을 믿겠다고, 그의 백성이 되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그 하나님의 땅에서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인도해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서 룻의 믿음이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룻은 하나님 백성이 되기로 한 것을 후회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모압으로 돌아가고 말겠지요.

며칠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들어가 살 집을 마련하고 살림살이도 급한 것부터 모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룻은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겠지요. 자기 집에서 쓸만한 노동력은 자신뿐입니다. 자기가 자신과 시어머니의 생계를 완전히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이 있어야 생산활동이 가능하지요. 농경사회에서 자본은 토지인데, 모압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토지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생각처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얻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닙니다. 당시 사회에서 모든 자본을 소비해버린 사람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노동력을 파는 일인데, 오늘 우리 사회에서의 개념처럼 고용되어 직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팔아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이처럼 남의 종이 되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모압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 겨우 종이 되기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마침내 룻이 입을 열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무슨 말이었을까요? '어머니, 여기서 도저히 살 수가 없네요. 다시 모압으로 돌아갑시다.' 그 말이 아니었습니다.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나가서 이삭이라도 주워오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룻의 인격과 인간성을 다시 한번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 앉아 있지만 말고 이삭이라도 주으러 나갑시다. 그래야 끼니라도 때울 것 아닙니까? 내가 길을 압니까?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창피해서 어떻게 혼자 나갑니까? 어머니가 좀 같이 가 주셔야죠.'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쉬고 계십시오. 제가 나가서 이삭을 주워오겠습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봉양해야겠다는 룻의 마음이 이 한마디에 그대로 묻어 나오고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특히 오늘은 우리가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낳고 길러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오미가 룻을 낳았습니까, 길렀습니까? 남편이나 살아 있어야 어머니가 될 터인데, 시집오자마자 남편이 죽었단 말이죠. 자식이라도 하나 낳았다면 내 아이의 할머니가 되겠지만, 그것도 없는 상황에서 룻이 나오미를 어머니로 모시고 효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충심으로 공경하고 봉양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를 너무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베들레헴 동네 입구에 커다란 열녀문을 세우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룻은 온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금방 눈에 띌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사실 구걸행위나 같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룻은 지금 시어머니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이처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가장 낮아지는 일을 자처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 창피하다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고집을 부리다가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지요. 겸손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미덕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현실적으로 겸손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낮은 곳에 처하게 하셨을 때입니다. 그 섭리가 우리를 낮추셨음에도 불구하고 낮아지기를 거부할 때 무슨 소리를 듣게 됩니까? '쥐뿔도 없는 것이 분수를 모른다'는 말이겠지요.

제가 뉴질랜드에 와서 참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많은 교민들이 그처럼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오클랜드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한국에서 법대를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하는 일은 수퍼마켓에서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법대 나온 사람이 수퍼마켓 청소를 하면 안된다는 법은 없지요. 그러나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 어울리는 일은 아닙니다. 룻이 모압에 있었더라면 남의 밭에 이삭을 주우러 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청년도 한국에 있었더라면 취직을 못해서 백수 생활은 했을망정 수퍼마켓 청소는 하지 않았겠지요. 내가 그래도 법대를 나왔는데 고시공부는 못할망정 청소부 노릇을 어떻게 하나? 하는 식으로 자존심을 꺽지 않았다면 이 사회에서 생존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낮아져야 할 때 낮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명한 일이고 칭찬을 받을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낮아진 룻을 부끄러워합니까? 아니지요.

룻이 나오미에게 하는 말을 다시 한번 보세요.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어려움을 자주 당하고 피해를 많이 겪은 사람은 피해의식이 강해서 공격적이 되기 쉽습니다. '내가 아무 밭에나 가서 이삭을 줍는다고 누가 시비를 걸지는 않겠지요? 추수하다가 이삭 떨어진 것은 어차피 버리는 것인데 못줍게 하겠어요? 나도 자존심이 있지, 이삭 줍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 해가면서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구요. 까짓 것 못줍게 하면 말지요. 밭이 한두 군데인가요? 우리가 당장 이렇게 어려워서 이삭을 주워 먹고 산다고 누가 업신여기거나 놀리기만 해 봐라. 가만 두지 않을테니까.' 그러나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으면... 어느 밭주인이 나에게 이삭을 주워가라고 허락을 해 주시면... 내가 그를 따라가서 이삭을 줍겠습니다.' 누가 은혜를 베풀지 모르지요. 룻이 아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마음이 넓은 사람인지, 누가 구두쇠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 보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모습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옛날에는 백수라는 말이 건달이라는 말과 같이 쓰여서 아주 듣기 나쁜 말이었는데,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못하고 얼마간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니 백수라는 말이 부끄럽거나 모욕적인 말이 아니라 평범한 호칭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여자들은 백수라고 하지 않고 백조라고 합니다. '백수와 백조' 이런 책도 있더군요. 어쨌든 룻은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고고하게 보이는 백조가 되는 것보다 나가서 허리를 굽히고 이삭 줍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백수와 백조들이 일하기 싫어서 노는 것은 아니지만,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너는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을 것이다'라고 하셨거든요. 바울 사도도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잠언에 보면 현숙한 여인의 모습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규모있게 열심히 일하는 여인입니다. 이것을 보고 남자들이 여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미화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말장난이나 하고 쉬운 것도 어렵게 만드는 소위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소립니다. 전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는 쓸데없는 소리지요.

이처럼 룻은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만한 성품과 인격을 갖춘 사람을 어디서 쉽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룻의 이야기가 효성이 지극했던 한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여인에게 임한 크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룻의 성품과 인격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성품이 온유하고 성실한 사람과 고집불통에 안하무인격의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두 사람이 같이 예수를 믿었다면 어떤 사람이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 물론 둘 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차이가 없겠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좋지 않은 성품이 다 없어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만 사람의 성품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룻과 같은 훌륭한 인격의 신앙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믿음과 아름다운 인격을 본받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도 있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감화하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야 하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도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성품과 인격을 만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자기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존경받고 신망있는 인격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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