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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연한 만남 (룻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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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 ((룻 2:1-7))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노사연의 이런 노래가 있었지요? 오늘 우리는 룻과 보아스가 만나는 극적인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만남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은 한 여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더 나아가 한 민족의 영화를 이루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만남은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류 구원이라는 성경의 대주제의 줄기를 잇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만남은 중요하고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자, 우선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보아스는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이었기 때문에 결국 룻과도 어느 정도의 친족관계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 연결고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 연결고리는 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보아스는 아직 룻을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돌아왔을 때 온 동네사람들이 나와서 환영했는데, 그 환영식장에 보아스는 나가지 않았던가 봅니다. 어쩌면 보아스의 신분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그렇게 사람들 모이는 곳에 쉽게 나갈 수 없게 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보아스처럼 유력한 사람과 가련한 이방여인 룻이 대면해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생기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는가 하면 그야말로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룻이 시어머니의 허락을 얻어서 이삭을 주우러 나갔는데, 누구네 밭으로 갔는가 하면 바로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삭을 주우러 가기 전에 내일은 누구네 밭에서 추수를 할 것인지 알아보고,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염두에 둘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아무런 계획이 없었습니다. 밭 주인이 누구인지, 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생각이 없었고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로지 누구네 밭에서든지 이삭을 줍도록 허락을 해 주면 그저 이삭을 주워다가 시어머니와 자신의 끼니거리라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룻의 발길이 닿은 곳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룻이 우연히 보아스에 밭에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인간의 의지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한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분명한 원인에 의해서 분명한 결과가 발생하는 일을 필연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를 우연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원인이 없이 무슨 일이 발생한다거나, 원인이 있기는 있겠지만 그 원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거나, 또 그 원인에 대한 전혀 기대하지 않은 엉뚱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을 100도로 가열하면 끓는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금요일에 암살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적인 일이지요. 또 일어날 확률이 많은 사건은 필연이고, 확률이 아주 적은 일이 일어났을 때를 우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권에 떨어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고, 복권에 당첨되는 일은 정말 우연이지요. 필연적인 사건은 우리가 예측하고 기대할 수 있지만, 우연적인 사건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거나 놀라게 합니다.

어쨌든 이 우연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과 콘트롤의 범주를 벗어난 세계입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그런 것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령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애타게 찾고 있는데 서로의 행방을 모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연히 두 사람이 같은 길에서 서로를 향해 걸어오게 되었습니다. 1분만 지나면 감동과 눈물의 상봉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길가에 껌을 팔고 있던 소녀가 '껌 한 통 사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마음씨가 착한 주인공 여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 소녀에게 다가가 껌을 한 통 삽니다. 또 그냥 껌만 사는 게 아니지요. '몇 살이니? 이름이 뭐야? 점심은 먹었니?' 이런 몇 마디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는 사이에 남자 주인공은 그 옆을 지나가 버립니다. 참 안타까운 순간이지요?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어떻게 연락이 돼서 이 두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여자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약속시간 30분 전부터 나가서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지쳐서 결국 포기하고 돌아섭니다. 이 남자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한편 남자는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그날따라 왜 그렇게 차가 밀리는지, 길에서 한 시간이나 소비했습니다. 그래서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뛰어오다가 하수도 공사하느라고 맨홀 뚜껑 열어놓은 것을 보지 못하고 거기에 그만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나와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약속장소까지 달려갔더니 약속시간에서 두 시간 1분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연입니다. 왜 하필 그 순간에 그 소녀가 '껌 사세요' 하고 외쳤는지, 왜 하필 그 때 하수도 공사를 하고 있었는지, 왜 여자는 1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가 버렸는지, 왜 남자는 좀 더 열심히 달려서 1분을 빨리 오지 못했는지, 그리고 평소에는 사소한 이런 일들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이런 것들은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인 계산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애를 태우는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제가 만들어낸 이 가짜 영화 이야기는 우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쉽게 설명해 줍니다. 왜 껌 파는 소녀가 주인공 여자에게 껌을 사달라고 외쳤습니까? 바로 감독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입니다. 감독의 의지에 따라서 그날따라 유달리 길이 막힌 것입니다. 또 감독이 시키는 대로 남자 주인공은 알면서도 하수도 맨홀로 빠진 것이지요. 각본에 의하면 여자가 떠난 후 1분이 지나서 남자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도착하는 순간 여자는 길 건너편에서 막 버스에 올라타고 떠납니다. 관객들이 보기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일이고 애가 타서 가슴 속이 새까매졌을지 모르지만, 그 모든 일들은 감독이 시키는 대로 정확하게 일어났을 뿐입니다. 감독에게는 우연이 아니라 자기 계획대로 하는 일이었던 것이지요.

룻과 보아스가 만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계획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룻기의 저자가 여기서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더라'고 한 것은 '룻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었더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이것을 우연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에 보면 악한 왕 이스라엘의 아합과 선한 왕 유다의 여호사밧이 동맹을 맺고 아람 군대와 전쟁을 벌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람 왕은 군대에 명령을 내리기를 다른 사람과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약은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왕복을 입고 나가도록 하고 자신은 변장을 하고 군사들 틈에 끼여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추었습니다(왕상 22:34). 아람 군대에서는 아무도 아합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적군을 향해 무작정 활을 쏘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군사들 중에서 변장한 아합에게 그 화살이 날아왔습니까? 그것도 갑옷 솔기, 그러니까 갑옷의 이음새에 정확히 화살이 박혔단 말이죠. 정말 우연도 그런 우연이 없겠지요?

참새 두 마리가 1앗사리온에 팔립니다. 앗사리온은 센트의 개념입니다. 2앗사리온을 내면 다섯 마리를 줍니다. 전깃줄에 참새 다섯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포수가 총을 쏘았습니다. 어떤 참새가 맞았을까요? 재수없는 참새가 맞았습니다. 그 참새가 죽은 것은 우연이지요. 왜 하필 그 시간에 그 전깃줄에 앉아 있었으며, 그것도 왜 포수가 맞추기 좋은 곳에 앉았다가 죽었을까요? 완전히 우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하나라도 그렇게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하찮은 참새의 목숨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잊어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에서 우연이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을 무슨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한국에서 살다가 뉴질랜드로 왔고 그것도 이 해밀턴에서 살게 되었고 또 주사랑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우연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정확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에 반영되어 나타나야겠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간파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제가 주사랑교회의 목사가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목회를 잘하지 못합니다. 목회를 해 본 경험도 없고 또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이민목회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 한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는 (저와 같은 또래의 아줌마인데) 제가 아프리카에 갔다는 것이 그렇게 안쓰러웠나 봅니다. 그래서 저에게 한다는 말이, 이제 아프리카 가지 말고 한국에서 자기랑 같이 교회 하나 차리자는 것입니다. 별로 믿음이 없는 친구라서 말을 그런 식으로 했지만, 그 말에 제가 그랬습니다. '나는 교회 차리는 데 별로 관심 없어. 차라리 가게를 하나 차리겠다.' 그랬더니 당장 차리재요. 돈은 자기가 대겠다고.

제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뉴질랜드에 온 것도 우연이고, 1년 정도 공부 마치고 아프리카로 갈 계획이 바뀌어 들어보지도 못했던 해밀턴으로 오게 된 것도 우연입니다. 그 무렵 제 아내가 임신을 했었는데, 만약 그때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아프리카에 가 있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나거나 평소에는 사소한 일들이 큰 영향을 미쳐서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주사랑교회의 목사가 되고 나서 보니 어찌 사람이 계획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백성들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고 복된 일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목회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이 일로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 중매쟁이가 중간에서 노력한다고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만약 중매에 의해 두 사람이 만났다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기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룻의 발걸음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름으로써 이루어진 이 만남은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하나님이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에 일이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또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일어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우리의 계획이나 예정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신다면, 어찌 우리 인생들이 분요하고 소동해야 하겠습니까?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함으로써 평안한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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