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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아스 만나기 (룻 0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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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문

우리는 지난 번에 보아스의 배경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 유다 지파를 통솔하던 족장의 손자였고, 유력한 사람이라고 성경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품을 가졌었는지, 사귀어 볼만한 괜찮은 사람인지 모릅니다. 흔히 비난을 받곤 하던 재벌 2세들처럼 부모의 후광을 입고 오만불손하게 행하던 사람은 아니었는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고집과 독선으로 특징지워지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돈 좀 있다고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착취하는 못된 사람은 아니었는지, 어떤 이유로든지 동네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은 아니었는지, 어쨌든 우리의 사랑스럽고 현숙한 여인 룻의 일생을 그의 손에 맡길 만한 사람인지 인사청문회를 한번 해 봐야 되지 않겠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랬다더라'에 근거한 것입니다. 경상도 말로 '카더라' 통신에 의한 것이지요. 그가 유력한 사람이라더라. 할아버지가 광야에서 유다지파를 통솔하던 사령관이었다더라. 그리고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이라더라. 이제 그 소문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나볼 차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소문과 실제가 종종 다른 경우를 보게 되지요? 객관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은 평가는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헛소문으로 발전하게 될 가능성이 많지요. '얘, 그 남자 너무 잘생겼더라.' '어머, 얼마나 잘생겼는데?' '완전히 배용준 빼닮았어.' '그럼 꼭 한번 만나게 해 줘.' 이런 식으로 해서 미팅을 했는데, 만나서 보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배용준이 아니라 배삼룡이 앉아 있습니다. '야, 그 아가씨 정말 천사야 천사. 그렇게 순진하고 마음씨가 착한 여자는 처음 봤어.' 소문이 그렇게 나면 모두들 궁금해하고 만나보고 싶겠지요? 그런데 정작 만나보고 와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야, 그게 천사냐? 푼수지.'

이 소문이라는 것이 참 중요해요. 푼수가 천사로 소문이 나는 수도 있고, 천사가 푼수로 소문나는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도 소문이 잘못 나서 매장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좋지 않은 소문은 얼마나 빨리 퍼집니까? 그러니까 가능하면 좋게 소문이 나야지요. 사람뿐만 아니라 음식점도 그렇지요? '그 집 참 맛있더라' 이렇게 소문이 한번 나면 사람들이 줄을 서지요. 어쨌든 소문이라는 것은 타당하든 타당하지 않든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이고, 또 일종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소문은 일단 좋게 나고 볼 일입니다.

저는 이 해밀턴의 한인사회에서 저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주사랑교회에 목사가 새로 왔다더라. 그런데 그 목사가 어떻다더라. 저에 대한 소문이 어떻던가요? 들어보신 분 계십니까? '그 목사 인상이 참 좋더라.' 이 정도만 되어도 다행이지요. '그 목사가 돈만 밝힌다더라.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더라.' 소문이 그렇게 나면 우리 교회도 끝장이지요. 목사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도 우리가 신경을 써야겠지요? 물론 거짓으로 좋은 소문을 퍼뜨리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소문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도 좋은 소문이 나고, 우리 교회에 다니는 모든 분들에 대한 소문이 좋은 소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주사랑교회 아무개 집사처럼 믿어야 해.' 안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이런 말이 나오도록 해야지요. '아, 그 친구 말도 하지 마. 생각만 해도 밥맛 떨어져.' 이런 소문이 나서는 본인에게도 안되겠지만, 교회를 위해서도 덕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도 큰 누가 되겠지요?

2. 관대한 주인

자, 이제 말로만 듣던 보아스가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추수가 한창인 자기 밭에 나온 것입니다. 이 때 일하던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들과의 관계가 어떤지 하는 것은 주인의 인간성과 됨됨이에 따라 큰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제가 요즘 본의 아니게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이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장치가 됩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체면도 차리고 내숭도 떨고 하면서 가능하면 자신의 본심을 감추고 숨기려 하지요. 그러나 군대에서는 인간성이 다 드러납니다. 저 스스로도 느낀 것은 졸병 때는 한없이 비굴해지고, 고참이 되어서는 만용을 부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졸병 때는 고참들 눈치보느라고 말이나 행동을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감추게 되는데, 고참이 되어서는 자신의 인간성이 100% 발휘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힘이나 권력이 있을 때, 즉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것 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사람의 인간성이 그대로 드러나기 쉽습니다. 보아스와 같은 유력한 사람이라면 부리는 종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종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보아스 마음대로입니다. 보아스가 포악하고 무정한 사람이라면 종들을 학대하고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가 온유하고 동정심이 많았다면 역시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다스렸겠지요. 지금 보아스와 종들이 만나는 장면을 보세요. 보아스가 나타났다고 갑자기 종들 사이에 비상이 걸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축복의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종들이 일하고 있는 곳에 나타난 주인이 '일 잘 돼가나?'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이 짧은 한 마디에서 보아스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기 수하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가 오셔서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주인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에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종으로 부릴 때에는 가혹하게 부리지 못하도록 한 조항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종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리는 주인이나 부림을 받는 종이나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무릇 사람을 부리는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래 있는 사람이나 똑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성향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이나 종업원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가혹하게 다스리는 경우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종이나 종업원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고 인격적으로 대한다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시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한 가지만 보아서는 일단 보아스는 괜찮은 사람 같습니다. 종들을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관대한 주인, 하나님의 율법을 잘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1단계는 합격입니다.

3. 고아의 아버지

구약의 율법에서 자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타국인입니다. 고아와 과부가 왜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는 굳이 설명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타국인이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뉴질랜드에서 사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은 이 세 가지 범주 가운데 두 가지에 해당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보호와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과부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아원은 있지요. 옛날 교회 청년회에서 고아원을 종종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갈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조그마한 아이들은 우리에게 안기고 싶어서 자꾸 달려드는데 너무 더럽고 냄새가 나서 안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겨요. 한번은 한 여자 청년이 세 살 쯤 된 아이를 한참 안아 주었는데, 시간이 돼서 가려고 하자 아이가 안 떨어지려고 얼마나 울어대는지, 그렇게 난감한 일도 생기더군요. 어쨌든 이 고아원은 보호받을 수 없는 아이들을 우리 사회가 보호해야 하는 의무의 실행이지요.

그런데 고아의 아버지를 자처하고 고아원 운영하면서 착복하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또 고아들 앵벌이 시켜가지고 돈벌어 오면 뺏어가는 사람들도 많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가진 것을 형편되는 대로 내놓아서 그것으로 고아들을 보호해야 할 것인데, 보호하기는커녕 악용해서 그들의 인권을 짓밟고 자기 배를 채우는 못된 사람들은 지옥에서도 더 뜨거운 방에 가두었으면 좋겠어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세요.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

솔직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 찔리는 것이 많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손길들을 너무 많이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와준 적이 많이 있지요. 병원비, 학비, 차비, 집세, 먹을 것 등등... 현지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도와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와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거짓말이지요.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자기 부인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당장 수혈을 해야 한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얼마나 급합니까? 수혈을 못하면 죽을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하면 준비하고 오겠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해놓고 영영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전문적으로 어리숙한 선교사들 찾아다니면서 사기치고 다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와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에요. 한번은 처음 보는 여자가 와서 이빨이 아파서 치과에 가야겠다며 돈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짜증이 났습니다. 이빨이 진짜로 아픈지도 모르겠거니와, 왜 이빨이 아프면 나한테 와야 하는 것이며, 또 애들도 아니고 어른이 되가지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전후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로 이빨 아프니까 돈 좀 달라고 하는 것이 얄밉기도 하고,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마음에 걸리는지 모릅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물론 저희가 아프리카에서 풍족하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후원금이 충분하지 않을 때는 다른 선교사님들에게 우선 빌려다 쓰고 나중에 갚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엄청나게 풍족한 사람들이었지요. 그때 그렇게 좀 도와준다고 우리가 굶을 상황도 아니었고, 또 안 도와주어서 우리가 잘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손에 선을 베풀 힘이 있으면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창고에 저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보아스를 보십시오.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낯선 여자가 과부요 타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정성껏 보호와 도움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보아스가 맨 먼저 한 일은 자기 종들에게 주의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절대로 이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젊은 과부는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울타리가 없지요. 그것을 알고 보아스는 우선 그 울타리를 만들어 룻이 희롱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룻을 불러 하는 말이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밭에 가 봐야 이삭을 줍도록 허락을 얻을지도 모르고, 더욱이 모든 위험에 노출될 뿐입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실은 보아스 자신이 자신의 날개 아래 이 가엾은 여인을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개 아래를 떠나지 말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식사시간이 되니까 룻을 불러다가 함께 식사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룻에게 먹을 것을 잔뜩 줍니다. 왜 룻에게 이렇게 많이 주었겠습니까? 젊은 여자가 많이 먹고 살만 디룩디룩 찌면 안되잖아요? 보아스는 룻이 먹고 남기도록, 그래서 남은 것을 집으로 가져가도록 많이 준 것입니다. 결국 시어머니 몫까지 챙겨서 준 셈이지요. 이처럼 남을 도와줄 때도 받는 사람이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조금 주면서 생색이나 내는 것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덕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받으면서도 고맙다는 생각이 안들 때가 있잖습니까?

그리고 보아스가 룻을 위해서 종들에게 뭐라고 지시하는지 보세요.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추수하다가 실수로 떨어진 부스러기를 줍는 것입니다. 추수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손실이 없도록 이삭이 떨어지지 않게 해야지요. 또 여차하면 떨어진 이삭도 다 쓸어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는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곡식을 벨 때 밭의 모퉁이는 거두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합니다(레 19:9-10). 룻처럼 가난한 사람이나 의지할 곳 없는 타국인이 그거라도 주워다가 먹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보면 감을 딸 때 다 따지 않습니다. 한두 개는 남겨두지요. 그것을 까치밥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우리 조상들의 여유,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이 살면서 그런 여유와 정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텅빈 감나무 가지 사이에 한두 개 남아 빨갛게 익어가는 감, 얼마나 운치도 있고 상징하는 것도 많은 모습입니까?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구조가 바뀌고 생활패턴이 서구화되면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쨌든 이삭을 남기도록 한 율법의 정신은 한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품고 공존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종들에게 지시한 것을 보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추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이삭을 흘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인데, 보아스는 일부러 이삭을 빼서 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보아스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이 보이지요? 제가 보아스를 평가하고 점수를 줄 수 있다면 100점을 주겠습니다. 보아스야말로 진정한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입니다. 큰 아버지에게서 큰 아들이 난다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이 있다면 보아스에게 해당될 것 같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큰 할아버지에게서 큰 손자가 났다고 합시다.

오늘 우리가 보아스를 잠깐 만나보았습니다. 이런 위대한 사랑과 정신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것이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 되어서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보아스를 우리 앞에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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