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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룻이 가져온 것 (룻 02: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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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주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한인현 작사, 이흥렬 작곡의 '섬집 아기'입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 가면...' 집에 아기를 혼자 놔두고 일하러 나가야 하는 엄마의 애환이 담긴 노래이지요. 수년 전에 한국에서는 맞벌이 부부가 아이들만 집에 두고 문을 잠그고 일나갔다가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아이들이 죽은 일이 몇 번씩이나 일어나서 우리의 마음을 참 아프게 한 적이 있었지요. 그 후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시설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조그마한 섬마을에도 탁아소가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아기만 혼자 두고 굴을 따러 나간 것이지요.

그런데 다행히 아기는 울지 않고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 효자도 없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노래를 1절만 부르고 맙니다. 그래서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지요. 이 노래는 2절에 그 진한 감동과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아기는 곤히 잠이 들어서 엄마가 아무 걱정 없이 차분히 일을 해도 되는데, 엄마는 그것을 모르지요. 그러니 불안해서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괜히 갈매기 울음소리가 아기 울음소리로 들리는 거지요. 아기가 집이 떠나가도록 울어대고 있는지, 똥을 싸서 빨리 치워줘야 할 상황인지, 배가 고프지는 않을지... 그저 마음이 바쁘고 걱정이 돼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 뉴질랜드 같으면 당장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겠지요? 그래서 이 엄마는 아직 반도 안찬 굴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헐레벌떡 모랫길을 달려온다는 것입니다.

룻을 밖에 내보내놓고 하루 종일 집에서 기다려야 했던 나오미의 심정이 그렇지 않았을까요? 피붙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외로운 늙은이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착한 며느리, 모압에서 이제 막 와서 물정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이삭이라도 주워오겠다고 무작정 나간 며느리가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 아이가 다니면서 놀림이나 박대를 당하고나 있지는 않는지, 마땅히 이삭 주울 곳을 찾지 못해 이리 저리 헤매고 있지는 않는지, 어디 가서 간신히 이삭을 줍도록 허락을 얻었다 해도 뙤약볕 아래 얼마나 고생이 많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룻은 이제 딸보다도 훨씬 가깝고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사이는 서로가 유일한 위로가 되는 관계입니다. 죽음보다도 더 지독한 슬픔과 고난을 함께 나눈 사이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극한 상황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경우에 거기에서 동지애가 생기는 법입니다. 생사를 같이 해야 하는 군인들에게 전우애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죠. 사람이 정말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함께 죽도록 고생을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낚시를 갔다고 합시다. 고기도 많이 잡고 재미있게 지냈다고 해서 두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배낚시를 나갔다가 갑자기 폭풍을 만나 죽음의 문턱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합시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그야말로 운명을 함께 하는 경험을 한 것이지요. 그 사건 후로 이 두 사람은 피를 나눈 것보다 더 가까운 동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룻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침 일찍 집을 나간 룻이 저녁 늦게까지 소식이 없으니 나오미는 걱정이 돼서 동네 어귀까지 나가 서성거리며 룻을 기다렸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진 후 한참이 지나서야 룻이 돌아왔습니다. '아이고 이것아, 어쩌자고 이렇게 늦게까지 있었느냐? 대충 끝내고 돌아오지 않고.' 그나마 늦게라도 돌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그런데 룻이 왜 그렇게 늦게 왔습니까? 보아스의 호의에 힘입어 룻은 얼마든지 이삭을 주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삭이 없어서 줍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주워가라고 일부러 이삭을 흘려 놓았으니, 줍는 만큼 내 것이 되는 거지요. 전에 미국의 한 은행에서 고객 유치를 위한 행사를 하나 열었는데, 은행 안에 1달러짜리 지폐를 잔뜩 쌓아놓고 한 사람에게 정해진 시간만큼 그 돈을 작은 가방에 담아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얼마나 빨리 가방에 담아서 갖다 놓고 또 와서 담아 가는가에 따라 얼마나 많은 돈이 내 것이 되는지가 결정되겠지요. 그렇다면 천천히 한가하게 움직이겠어요? 30분인가 한 시간인가를 했는데, 그 행사 끝나고 그 사람이 들것에 실려갔다던가요?

룻의 형편이 꼭 그렇지요? 변수는 오직 자기가 얼마나 부지런히 이삭을 줍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들다고 일찍 끝내고 집에 갈 수 있나요? 이 모습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과 그 은혜를 받는 우리의 모습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닥이 나서 우리에게 혜택이 돌아오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변수는 오직 우리가 게을러서 또는 어리석어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또 넘치게 부어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의 그릇이 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너무 작았다던가, 빵꾸가 났다던가, 아니면 거꾸로 엎어놓았기 때문이지요. 그릇을 거꾸로 엎어놓아 보세요. 아무리 은혜가 쏟아져도 한 방울도 받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읽은 시편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었지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우리가 구하는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시고 크게 부흥하도록 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많이 불러모으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열고 준비하느냐 하는 것이 변수가 될 것입니다. 1분 1초가 아까워서 잠시도 쉴 수가 없었던 룻의 열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이삭이 널려 있어도 룻이 자기 손으로 그것들을 주워야 자기 것이 되지요. 보아스는 일부러 이삭을 흘리는데, 그것을 줍는 룻이 한가하게 그늘에 가서 쉬기나 하면서 이삭 줍는 일에 열심이 없다면 보아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부흥케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감나무 아래 누워 입벌리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실지도 모릅니다.

룻이 이삭을 얼마나 많이 주웠는지 보세요. 저녁이 돼서 그 주운 것을 떨었는데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22리터쯤 된다고 하는데, 떨어서 그 정도가 되려면 이삭은 두어 가마니쯤 주워야 했을 것입니다. 룻이 얼마나 허리가 아팠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지요? 나오미는 늦게야 돌아온 룻이 가지고 온 곡식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너 이거 다 어디서 났니?' 통상적으로 이삭을 주워서 가져올 수 있는 분량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얘가 어디서 훔쳐왔나? 얘가 뭘 몰라서 남이 쌓아놓은 것을 퍼왔나? 아니면 이삭 주운 사람들끼리 내기를 해서 다 땄나? 아니면 다른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얻어왔나?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겠지요? 반면에 룻은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어머니, 이것뿐만 아니에요. 점심 때 먹고 남아 어머니 드리려고 가져온 맛있는 음식도 여기 있습니다. 얼른 잡숴 보세요.'

그제서야 나오미는 '네가 오늘 어떤 친절하신 분의 은혜를 입었구나.' 하면서 누구인지 모르는 그 사람을 축복합니다.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 사람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래서 또 물어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냐?' 룻의 대답은 다시 한 번 나오미를 놀라게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라고 합디다.' '어쩐지 너에게 그런 은혜를 베푼 사람이 있었나 했더니 바로 보아스였구나. 보아스라면 전에 우리가 여기 살 때도 우리 식구에게 그렇게 잘해 주던 사람인데, 또 우리가 은혜를 입는구나. 사실은 그 사람이 우리 친적이란다.' 나오미는 지금 너무나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유대 땅에 생전 처음 발을 딛어 본 이 모압 며느리가 밖에 나간 첫날에 그 보아스를 만나 이렇게 큰 호의를 입고 돌아온 것은 우연이라 해도 엄청난 우연이고, 인연이라 해도 기가 막힌 인연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고 기대할 수도 없었던 일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바로 룻을 그 보아스에게 시집보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믿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다는 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셨으면 가능하지 못한 일이고, 또 보아스가 룻에게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베풀어 준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보아스가 나오미의 근족이고 또 유력한 사람이며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룻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나오미의 계획은 성사될 수 없지요. 그런데 룻이 말한 것을 들으면서 나오미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보아스라는 그 어른이 그러시는데 저더러 추수가 끝날 때까지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했습니다. 자기 종들이 많이 도와줄 거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최소한 추수가 끝날 때까지는 룻이 보아스의 식구들 중 하나가 된 것입니다. 동기야 어찌됐든 보아스는 룻을 붙잡아 두고 싶은 것이 분명하고, 이것은 나오미가 볼 때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자기 민족과 신을 버리고 온 이 모압여인, 평생 어머니를 모시며 살겠다고 따라온 이 착한 며느리에게 나오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기회란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기회를 얼마나 잘 포착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모습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기회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렇지만 나오미는 며느리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고 혼자서만 조용히 계획을 세웁니다. 다만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룻이 주의해야 할 일을 몇 가지 일러줍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고 했다고 말하는데, 나오미는 소녀들과 함께 다니라고 합니다. 보아스의 말은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했지요. 그런데 룻이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무심코 그렇게 말이 나왔는지, 아니면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는 말을 그렇게 해석했는지, 혹은 일부러 말을 바꾸었는지 모르겠지만 남자 일꾼들 가까이 있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나오미가 바로잡아 주지요. 여자 일꾼들과 같이 다니라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계획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젊은 사람 생각과 나이드신 어른 생각의 차이입니다. 신세대가 무조건 쉰세대를 모방할 수는 없지만, 어른들의 지혜를 무시했다가는 큰코를 다치게 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었지요. 나이든 신하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젊은 친구들의 의견을 따랐다가 나라가 두쪽이 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잠언에서도 이렇게 말하지요?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 1:8).

나오미의 계획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룻이 가볍게 처신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혹시 그 사이에 다른 남자를 만나 눈이 맞는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면 물거품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너 절대로 다른 밭에 가서 사람들 만나지 마라.' 사람도 못만나게 자유를 구속한다고 불평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오미의 거사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룻은 나오미의 꿍꿍이속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어머니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릅니다. 룻이 처음에는 남자 일꾼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서도 그랬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리 추수뿐만 아니라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소녀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이삭을 주웠습니다. 사실 룻이 누구네 밭에 간들 이런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고 좋아서 더욱 그 은혜를 붙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낫다고 했지요.

우리는 이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나오미와 룻의 인생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친히 계획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자비와 은총 아래 살면서 그분의 뜻을 발견해 가는 큰 기쁨이 여러분의 삶에 늘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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