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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며느리 시집보내기 (룻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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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시집보내기 (룻 3:1-5)

얼마 전에 특이한 법원판결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사자의 동의없이 부모끼리 자녀들을 결혼시키기로 한 약속은 무효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두 집사님들이 친하게 지내다가 각자 아들과 딸이 미국에 유학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래가 잦아지고 서로에 대해 좋게 생각하던 이 부모들은 유학가 있는 양가의 자녀들을 결혼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자녀들이 서로 만나게 됐겠지요. 한쪽에서 마음에 안들었는지 아니면 둘다 마음에 없었는지, 어쨌든 당사자들은 부모들이 약속한 결혼은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서로 좋아서 그랬는지 무슨 정략적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결혼을 성사시키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 문제가 재판까지 가게 된 것을 보면 부모가 억지로 혼인신고까지 해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은 당사자가 싫다는 결혼을 부모가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자녀를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집념이 보이는 사건 아닙니까?

어느 집이나 딸이 혼기가 차게 되면 걱정이지요. 우리 황장로님 댁에서도 걱정이 많으신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딸 시집보내는 데도 그런 대단한 열심과 집념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딸은 아니지만 딸보다 더 귀한 며느리를 시집보내기 위한 나오미의 집념을 볼 수 있지요?

고대 이스라엘에는 특이한 결혼제도가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아직 자녀를 낳지 못했는데 남편이 죽었을 때는 제도적으로 이 여자의 재혼을 보장해 주고 있었는데, 그 죽은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족-그러니까 주로 동생이 되겠지요-이 이 여자와 의무적으로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이 제도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유다의 아들들 이야기입니다.

유다에게는 엘, 오난, 셀라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엘을 위하여 다말이라는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았습니다. 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얼마나 하나님께 밉보였는지 하나님이 그를 죽이셨어요. 엘은 그 이름값도 못하고 죽은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새로 시집온 다말만 불쌍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본 유다가 둘째 아들 오난에게 말합니다.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창 38:8). 동생이 의무적으로 형수와 결혼해야 하는 것은 형의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의 개념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형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이런 편법으로 이어주는 것이지요.

엘의 동생 오난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전통과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고, 그래서 형수와 결혼하기는 했는데 자기 아들이 형의 아들 될 바에 차라리 안 낳겠다고 하면서 피임을 했습니다. 오난은 그래서 최초의 피임법 개발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피임 자체가 악한 일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서 죽은 형의 대를 잇도록 한 의도에 고의적으로 반항했다는 것이 악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죽이셨습니다. 오난이야말로 전통과 제도에 온몸으로 항거하다가 맞아죽은 사람이군요.

이렇게 되니까 유다의 집안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 다말이라는 여자가 남자들 씨를 말린다고 생각했겠지요. 두 아들을 잃고 새록새록 커가는 막내아들 셀라를 볼 때마다 유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이놈도 다말에게 주어야 할 것인데, 남자 잡아먹는 저 며느리에게 막내마저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셀라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겠다는 다말의 집념도 끈질기지요. 셀라가 다 장성했는데도 자기와 결혼시켜주지 않는 것을 보고 다말은 유다에게 복수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유다를 통해서 아들을, 그것도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어쨌든 이 제도는 나중에 모세의 율법에서 확실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결혼에 관한 법으로 정착됩니다. 아들이 없이 과부가 된 여자는 시동생에게 결혼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이 시동생은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러나 시동생이 이 의무를 거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럴 경우에는 장로들을 초청해다가 그 앞에서 여자가 시동생의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최악의 모독을 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를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룻은 아들이 없이 과부가 되었기 때문에 시동생과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오미에게 더 이상 남은 아들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룻이 다시 결혼하기 위해서는 나오미가 먼저 다시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야 할 것입니다. 그게 이 늙은 나오미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나오미가 아들을 낳으면 그것을 룻이 키워야 할 터인데 키워서 남편 삼겠다고 애를 키운다는 것도 말이 됩니까? 기저귀 갈아주면서, '이것이 언제 커서 내 남편이 되나?' 한숨만 나오겠지요. 코흘리개 유치원 가방 챙겨주면서, '저것이 미래의 내 남편인데...' 하면서 혀만 끌끌 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키워서 대학까지 졸업시켜 놓으면, 룻은 벌써 내일 모레면 경로우대증이 나오게 될 할머니가 되고, 이 속없는 녀석은 할머니한테 장가가기 싫다고 떼를 쓰겠지요. 어쨌든 말도 안되는 이런 가상적인 시나리오가 룻이 다시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1장에서 나오미가 모압에서 굳이 자기를 따라오겠다는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나오미를 따라왔다는 것은 다시 시집갈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나오미로서도 이 고맙고 사랑스러운 며느리를 다시 결혼시킬 방도가 없어서 늘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만약 이 며느리를 시집보낼 수 있는 길만 있다면 나오미로서는 무엇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체면도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설령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룻을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자기 한 몸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오미는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혀 불가능할 것 같던 룻의 결혼이 성사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오미가 그것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요. 비록 남아 있는 아들은 없지만 룻을 시집보내기 위해서 꼭 아들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까운 친족이 그 의무를 이행하면 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나오미는 보아스가 친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 의무를 이행하라고 요구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룻은 모압에서 데려온 이방여인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서 이렇게 몰락해 버린 자신의 처지에서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는데, 룻이 나가서 만난 사람이 바로 그 보아스였고, 보아스 역시 룻에게 호의를 가지고 많은 은혜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내친 김에 나오미는 아예 결혼까지 해 달라고 할 참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스가 보여준 태도를 보아서는 거절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치밀한 작전을 세웁니다.

거사 날짜는 보아스가 보리 추수를 마치고 타작하는 날 밤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룻에게 목욕을 하고 얼굴에는 화장을 하고 옷도 가장 예쁜 것을 골라 입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스가 본 룻은 뙤약볕 아래서 땀흘리며 일하는 모습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지요. 예쁘게 화장을 하고 곱게 차려입은 룻은 분명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누더기를 입은 신데렐라나 드레스를 입고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나 똑같은 신데렐라지만, 하나는 하녀였고, 또 하나는 궁중무도회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요? 이처럼 여자는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꾸미기 나름인 것 같아요. 룻이 여자로서의 그 막강한 무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농경사회에서 일년 중 가장 기쁜 날이 언제입니까? 추수하는 날이지요. 그래서 모든 농경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추수감사제가 있습니다. 최고의 축제가 열리는 날이지요. 타작하는 날은 그런 날에 해당됩니다. 나오미의 아이디어는 보아스가 추수감사 파티를 끝내고 기분이 좋아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몰래 보아스의 침대로 기어 들어가서 구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지요? 낮에 공식적으로 떳떳하게 이루어지는 청혼이 아니라, 밤에 그것도 다분히 교활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청혼입니다. 좋지 않게 얘기한다면 우선 사고부터 치고 보자는 셈이지요.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스라엘의 청혼관습에 이런 것이 있었다는 힌트를 찾기 어렵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지요. 아무리 시집가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꺾고 애걸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발 밑에 가서 눕는다는 것은 복종과 섬김을 상징하는 표시겠지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했다가 만약 거절이나 당한다면 나오미와 룻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 가서 낯을 들고 살 수 있겠어요? 나오미로서는 자신과 룻의 인생을 건 대모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최대 관심사는 이 며느리를 보아스같은 유력한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일입니다. 어떻게든지 성사시켜놓고 볼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부당한 요구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거래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이 없는 과부로서 기업을 무를 근족에게 결혼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만약 보아스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자기 의무를 이행했더라면 나오미가 이렇게 구차한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딸 시집보낼 수 있는 묘책을 찾았다면 그것도 큰 수확이겠지요. 우리가 포커스를 맞추어야 할 부분은 나오미의 행위가 갖는 의미와 상징성입니다. 룻이라는 모압 여인은 보아스라는 이스라엘의 유력한 사람과 도저히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서 나오미가 그들을 맺어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면에서 보아스와 룻의 관계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성도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같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중간에서 다리를 놓으신 분이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중매를 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피조물의 모습, 종의 형체를 입는 자기비하와 십자가의 모욕까지 감수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중매를 하셨습니다. 위대한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제 그 중매자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나오미와 같은 집념과 자세를 가지고 감당해야 할 중매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참으며 모욕 당하는 것도 감수하면서 우리 형제,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던 경험이 있다면, 우리 역시 나오미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한 영혼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결과를 위해 수모와 고난이라도 담대히 지불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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