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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애물 제거하기 (룻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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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된 보아스는 날이 밝자 곧장 법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보아스는 지금 굉장히 바쁜 사람입니다. 추수를 마치고 곡식을 타작마당에 쌓아놓은 상태입니다. 그 곡식을 창고에 들이든지 볕에 말리든지, 하여튼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습니다. 농번기의 농부처럼 바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모든 일은 추수가 끝난 뒤로 밀쳐지게 됩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 바쁜 추수 일을 제쳐놓아야 할 만큼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지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도 될 일이 있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나중에 해도 될 일을 먼저 하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일의 우선순위는 객관적인 가치기준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타작마당에 곡식을 쌓아둔 보아스가 여자 문제로 법원에 간다는 것은 우선순위를 착각한 것처럼 보이지요? 법원으로부터 그날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은 것도 아니고, 형사들이 체포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바쁜 추수 일을 마쳐놓고 차분하고 여유 있게 이 복잡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나오미의 예상대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먼저 이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해 재판을 청구합니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며느리로부터 밤새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나오미가 이렇게 말했지요?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보아스가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이 일을 추수 끝날 때까지 미룰 한가한 일이 아니라 추수보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나오미는 보아스의 인간됨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아스가 이 일을 이렇게 서두르고 있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보아스의 마음 속은 온통 룻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었습니다. 룻이라는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젊은 여자가 자기 밭에 와서 이삭을 주울 때 호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편의를 베풀고 도와주려고 했었지만, 그때만 해도 룻은 불행에게 사로잡힌 착한 여자, 그래서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젯밤을 지낸 후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은 셈입니다. 이제 룻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중년이 넘었으리라고 짐작되는 보아스의 가슴에 사랑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하루만 지나도 보아스는 사랑의 열병으로 앓아 눕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농사일이야 늘 해왔던 것이고 추수도 매년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게 되는 일은 일생의 대사입니다. 지금 타작마당의 곡식단이 보아스의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보아스가 이 일을 빨리 결판내야 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관계가 삼각관계에 빠질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삼각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재판을 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빨리 결정되지 않으면 스캔들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사자 모두가 큰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전혀 다른 결과가 초래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추수하는 일이 바쁘더라도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나오미와 룻을 위해서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당장 생활보호대상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성사시켜야 그들이 어려운 형편을 면하게 되지 않겠어요?

우리가 흔히 다른 사람들 결혼하는 것을 보면서 신부가 너무 아깝다느니, 그 여자 남편 잘 만나서 팔자 고쳤다느니 하는 얘기들을 하곤 합니다. 어차피 결혼이라는 것이 남남끼리 만나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아스와 룻의 결혼은 두 당사자가 동등한 조건에서 만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밀고 당기는 긴장 속에서 성사되는 결혼이 전혀 아닙니다. 한 지파의 수장격인 유력한 보아스가 의지할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이 완전히 몰락해 버린 이방출신의 과부 룻과 결혼을 해 주는 형편이지요. 그런 점에서 보아스와 룻의 결혼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철저하게 실패하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 결혼에서 보아스는 완전히 시혜자이고, 룻은 완전히 수혜자입니다. 그런데 장애물을 제거하고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것은 보아스입니다. 즉 여기서 우리는 죄인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것입니다. 농부인 보아스가 농번기에 농사일을 제쳐두고 룻과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면서, 모든 일에 우선해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애쓰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보아스는 뭔가 아쉬운 것이 있어서 룻과의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100% 아쉬운 쪽은 룻일 뿐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없어도 잘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룻은 보아스의 보호와 도움이 없이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비천하게 사는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보아스 편에서 이렇게 열심을 내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룻을 위한 것이고 룻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열심을 가지신 것은 하나님이 아쉬워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열심을 가지고 구원을 이루시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면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앉았습니다. 고대의 성문은 재판정이었습니다. 성문 위에 재판정이 마련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아래서 방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문은 그 성의 권위의 상징이요 그 성의 자존심입니다. 한번은 삼손이 블레셋의 성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는데, 삼손이 온 것을 알고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매복하고 있다가 새벽이 되면 삼손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삼손이 그것을 알고 밤중에 일어나서 그 성의 성문짝을 뜯어가지고 어깨에 메고 가버렸습니다. 성문을 뜯어갔다는 것은 그 성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며, 그 성의 권위를 짓밟았다는 표시가 될 수 있겠지요? 전쟁에서 성을 점령하려면 먼저 성문을 열고 들어가야지요. 성문이 적에 의해 열린 것은 점령을 의미하고, 스스로 열었다면 항복을 의미하겠지요. 그런데 삼손이 성문을 아예 뜯어가 버렸으니 더 말을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고대 사회에서는 성문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보아스 자신이 베들레헴 성의 장로의 한 사람으로서, 혹은 지파의 수장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서 성문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할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판을 관할하고 판결을 내리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청구인으로서 재판정에 나왔습니다. 보아스가 재판까지 열어서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자신과 룻의 결혼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원하는 사람은 여기 나오는 아무개라는 사람이 아니라 보아스입니다. 나오미는 사랑하는 며느리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키기 위해 그 밤중에 룻더러 보아스를 찾아가도록 했던 것이지, 이 아무개라는 사람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습니다. 나오미가 이 아무개라는 사람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깜빡 했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나오미의 중대한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보아스와 룻이 결혼을 했더라면, 나중에 혼인무효소송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이 실수를 알아차리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보아스 역시 평소부터 룻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차에, 나오미로부터 룻과 결혼해 달라는 도움 요청을 받고 흔쾌히 허락을 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양 당사자 모두가 이 결혼에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합의했다고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결혼식에서는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경우가 없는 것 같은데, 외국 사람들 결혼식 때는 주례자가 성혼을 선포하기 전에 그 결혼에 이의가 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어쩌면 신랑 신부가 가장 초조해할 순간일지도 모르지요. 만약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게 된다면, 이 아무개라는 사람이 결혼식장에 나타나서 큰 소리로 이의가 있다고 주장을 하겠지요?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 그저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만나서 하는 일반적인 결혼이 아니라 기업을 무르는 법률의 조항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아스보다 먼저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결혼에 있어서 결정적인 결격사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 이유 때문에 보아스와 룻이 결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룻기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고, 한 모압 여인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편입되는 기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이 아무개라는 사람이 자신의 우선권을 포기하고 빠져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이 아무개에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우선순위에서 뒤지기 때문에 아무개가 하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은 없지만, 보아스의 소원은 이 아무개로 하여금 포기하게 하고 자신이 룻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관객인 우리들 역시 룻을 사랑하고 그동안 많은 은혜를 베풀어 왔던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가 우선권이 있다고 덜컥 룻과 결혼해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있어온 일들을 살펴보면, 룻이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 일을 위해서 고생과 희생을 자초했다는 것, 하나님이 룻의 발걸음을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하셔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는 것, 보아스가 룻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온 사람으로 보고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것, 나오미가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추진했다는 것, 이런 일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방해할 권리를 가진 이 아무개라는 사람의 존재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그 수행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 감에 있어서 이처럼 강력한 도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도전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보아스를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개라는 사람이 자신보다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보십시오. 때로는 여러 가지 도전과 반대 앞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어떠한 도전에 의해서도 결코 차질이 빚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실패하고 큰 시련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한,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는 한,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열심을 가지셨던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열심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야 합니다. 만약 보아스가 이 장애물을 회피했거나 그냥 모르는 채 내버려두었다면, 보아스는 평생 그 장애물에 목을 매어 끌려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또 그 장애물이 결국에는 보아스를 파멸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위협하는 장애물은 지금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데 자꾸만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면서 게으름이나 소극적인 태도를 용납하고 그 장애물을 키워오지는 않았습니까?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랫동안의 습관을 포기하지 못해서 늘 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구에게나 장애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인식하고 또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닥뜨려 제거하려고 할 때, 결국 보아스가 룻을 신부로 맞아들이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 기쁨과 감격의 순간을 바라보면서 인내하고 결국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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