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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된 결혼 (룻 0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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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된 결혼 (룻 4:11-12)

백설공주의 계모인 왕비가 거울에게 물었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이 왕비는 거울로부터 '왕비님이 가장 예쁘십니다.'라는 대답을 듣는 낙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욕망을 희화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최고라는 자기만족과 내가 남보다 낫다는 우월감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지배하는 욕망이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왕비님도 아름답지만, 굽이굽이 일곱 고개를 넘어 일곱 난쟁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백설공주는 더 예쁩니다.'라는 대답에 분노한 못된 왕비가 거울을 깨뜨린 지 글쎄, 몇 년이 지났을까요? 천년이 지났다고 합시다. 그리고 이 컴퓨터 시대에 누가 가장 예쁜지를 말해주는 디지털 거울이 개발되었습니다. 이 거울에는 인공지능이 추가되었고 인간처럼 따뜻한 마음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거울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이 거울은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잘못 대답했다가는 옛날의 조상처럼 박살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잘못 대답했다가 가정이 파괴되거나 이웃간에 싸움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지요. 과거의 조상이 대답 잘못하는 바람에 가엾은 백설공주가 살해를 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지 않습니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거울은 낙심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대답을 해 줄줄도 알고, 얼굴 예쁜 것만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따끔한 충고도 할 줄 압니다.

만약 홍집사님이 이 거울에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이렇게 물었다면, 거울은 '지민이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요.'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왕년에는 나도 얼굴에 자신이 있었는데 나이는 속일 수 없어, 이 주름살 좀 봐, 하면서 속상해하시는 박집사님이 이 거울에게 물었습니다. '거울아, 이제 나는 한물 갔어. 요즘에는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집사님, 세월을 이겨낸 주름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랍니다. 포근하고 다정한 집사님의 모습이 김혜수보다 훨씬 더 예뻐요.' 그렇지만 이 거울은 얻어맞아 깨질 것이 두려워 아무에게나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학생들에게 늘 인기가 최고인 보라가 화장을 예쁘게 하고 이 거울에게 물었습니다. '거울아, 네가 보기에도 내가 제일 예쁘지?' 거울이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 '언니, 그만 좀 웃겨. 공부하랴, 아르바이트하랴, 그 바쁜 와중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초록이를 좀 봐. 초록이의 웃는 얼굴이 언니보다 더 예뻐.'

참 똑똑한 거울이지요? 그럼 다시 한번 이 거울에게 물어봅시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저는 거울이 이렇게 대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얀 면사포를 쓰고 결혼식장으로 걸어들어가는 신부가 가장 예뻐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자의 일생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결혼식의 신부가 되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럼 한번 더 물어볼까요? '거울아, 거울아, 성경 이야기 중에서는 누가 가장 예쁘니?' 거울은 분명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오미를 따라 타국에까지 와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늙으신 시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이제 보아스의 신부가 된 모압 여인 룻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는 사건은 결혼식입니다. 결혼식에 가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축하와 축복을 하게 됩니다.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어요. 최초의 신랑 아담 앞에 하나님은 최초의 신부 하와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주례를 서신 이 에덴 동산의 결혼식에는 노루와 산토끼, 비둘기 같은 동물들이 하객으로 와서 축하를 했겠지요. 다른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주례사는 축복으로 가득찼습니다.

우리 인간이 누리고 있는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결혼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이 결혼을 교회의 성례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례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특별은총에 속한 것이고, 결혼은 특별은총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허락된 일반은총이지요. 그래서 성례에 포함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쨌든 결혼이 그만큼 큰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이 결혼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결혼을 금지한다거나 결혼의 신성함과 그 가치를 파괴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사명을 위하여 이 결혼의 축복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또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주를 위하여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결혼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더 나아가 혼인을 금하는 것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의 가르침을 좇은 결과라고 말합니다(딤전 4:1-3). 초기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바울의 본을 받아 독신으로 지내는 일이 많았는데, 이것이 천주교에서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한 것으로 발전한 것은 명백한 오류인 것이죠. 최소한 결혼에 관해서만 천주교에서는 두 가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속받기를 싫어해서 결혼하지 않고 편하게 만났다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이 축복된 결혼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심지어는 남자끼리 결혼을 하고 여자끼리 결혼하기도 하는데, 이런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행위입니다. 최근에 뉴질랜드 감리교가 동성연애 문제로 교단이 분열되었더군요.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이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왜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결혼을 축복하시지, 동성연애를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그 하나님으로 하여금 억지로 동성연애를 축복하시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 결과라고 말합니다(롬 1:25).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이해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인 주장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핑계를 뒤집어쓰고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와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피조물인 인간의 부적절한 성향을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질서와 법칙보다 더 중요시하고 경배하고 있는 현장을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축복해야 할 일과 도려내야 할 죄악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베들레헴 성문에 모인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얼마나 축복하는지 보세요. 먼저 룻에 대한 축복을 보면,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라헬과 레아는 민족의 어머니입니다. 반면에 룻은 모압에서 온 이방 여인입니다. 이방 출신의 여인에게 자기 민족의 어머니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이 베들레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을 아낌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민족의 어머니와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이방 여인을 같은 반열에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이것은 자기 스스로를 모욕하고 우습게 만들 수도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들레헴 사람들이 룻을 더 이상 이방 여인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룻에게 최고의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철저하게 폐쇄적인 민족공동체였던 이스라엘에게서 이러한 개방성이 발견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아이덴티티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거든요. 지금 베들레헴 사람들은 자기들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자기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 목적을 최종적으로 완수하신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라헬과 레아는 야곱에게 시집와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형성하게 될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물론 열두 아들을 낳은 것에는 두 여종들의 공헌도 큰 것이었지요. 하여튼 라헬과 레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형성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룻이 보아스의 집에 시집와서 바로 이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집안이 앞으로 어떤 집안이 될 것인지 새로 시집오는 룻에게 달렸다는 말이지요. 야곱의 집안에 들어온 라헬과 레아로 말미암아 야곱이 큰 민족을 이룬 것처럼, 보아스의 집안에 들어오는 이 룻으로 말미암아 보아스가 큰 가문을 형성하게 되기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집안에 어떤 여자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그 집안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 14:1)고 합니다.

12절에서도 동일한 축복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룻을 통한 자손을 언급합니다. 만약에 이렇게까지 해서도 룻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보아스가 여러 난관을 헤치고 고엘의 의무를 수행하여 룻과 결혼한 것, 룻이 여호와의 백성이 되기를 선택하고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와서 결국 보아스를 만난 것,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열매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면 보아스에게 후사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룻이 보아스에게 아들을 낳아준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최고의 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라는 아들을 낳아 준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다말은 아들을 낳기 위한 집념의 여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 특별히 다말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다말의 형편과 룻의 형편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다말 역시 남편을 두 번이나 잃고 그 다음 가까운 친척에게 고엘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요구했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트릭을 써서 시아버지로 하여금 결국 그 의무를 수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인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용납될 수 없는 행위지만, 고엘 제도의 관점에서 보면 다말의 행위는 충분히 용납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를 불에 태워 죽이려고 했던 유다 자신이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며 다말의 행위를 용납했었지요. 그리고 다말 역시 이방 여인이라는 점에서 룻과 같습니다. 가나안 족속이었지요. 그러나 다말이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 베레스는 유다 지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보아스와 베들레헴 사람들도 그 베레스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룻 역시 정상적인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남편을 대신해서 고엘의 의무를 수행하는 보아스와 결혼하는 것이고, 모압에서 온 이방 여인입니다. 그러나 다말을 통해서 유다 지파의 장자혈통이 계승되고 큰 가문을 이룬 것처럼, 룻을 통해서 보아스의 적법한 혈통이 계승될 뿐만 아니라 큰 집안이 형성되기를 베들레헴 사람들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들레헴 사람들이 룻과 보아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축복 역시 그대로 성취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보아스를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하지요? 그렇지 않아도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집에 들어가는 여인 룻으로 말미암아 보아스는 더 유력한 사람이 되리라는 축복입니다. 잠언 31장은 현숙한 여인, 지혜로운 여인이 어떻게 집을 세우는지 자세히 설명한 다음에, 그런 여자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된다고 하지요. 속된 말로 하면 남편의 출세는 아내 하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축복받은 결혼이 또 어디 있을까요? 사실 이 결혼은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신부는 재혼입니다. 신랑 역시 신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영감님입니다. 신랑은 이스라엘 한 지파의 어른이고 신부는 이방 여인입니다. 신랑은 베들레헴 최고의 갑부이고 신부는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다 연명하는 극빈자입니다. 이처럼 나이의 차이와 신분의 차이, 빈부의 차이, 민족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비정상적인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 온 동네 사람들의 최고의 축복을 받는 결혼이 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왕위를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했던 영국 왕 에드워드 8세와 미국 출신의 이혼녀 월리스 심슨의 세기의 로맨스 같은 기막힌 사연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보아스와 룻에게는 오로지 하나님의 법과 그 정신에 순종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가치를 발견한 기쁨이 있었을 뿐입니다. 남들은 자기 재산에 손해가 된다고 당연히 해야 할 의무도 거부하는 세상이었지만, 보아스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 돌보기를 그치지 않았고, 자신의 첫 번째 책임도 아니었던 고엘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이행했던 것입니다. 가난을 친구삼고 평생을 외롭고 쓸쓸하게 살 각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선택했던 룻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야말로 환상적인 커플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가장 비정상적인 결혼인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적당한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가정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최고를 추구하고 능력을 인정받고, 그래서 사람들의 축하와 축복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가장 예쁜 신부를 맞아야 축복받는 결혼이 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 축하를 받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축복받는 생애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실 때, 진정으로 축복받는 결혼도 될 수 있고 축복된 결혼생활이나 축복된 직장생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생애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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