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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룻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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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룻 4:13)

과거에 남아선호사상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에는 여자가 시집와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이 없었습니다. 그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첩을 얻는 것과 같은 일이 매우 당연하게 용인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들 못낳은 죄로 시댁에서 쫓겨나거나 강제로 이혼을 당하는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기 위한 몸부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모릅니다.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고,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신령님께 빌고 하는 것들이 옛날 이야기의 소재로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해서도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들은 규방 깊은 곳에 묻혀 그보다 더 깊은 한숨과 시름 속에서 한을 삭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요즘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지요. 우리 가운데도 옛날에 살았더라면 한스러운 인생을 살 뻔했던 분들이 있지요?

부족공동체가 형성되고 민족으로 확대되어 그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당장 시급한 과제였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게서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아들 낳지 못한 여인들의 질투 이야기와 눈물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늙도록 아들 하나 낳지 못했던 사라는 결국 자기 몸종을 통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했다가 오히려 그 몸종 하갈에게 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는 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 것 때문에 늘 패배의식의 포로가 되었던 라헬이 아들을 많이 낳은 언니 레아에 대하여 품었던 시기와 질투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남편에게 왜 자기한테는 아들을 낳게 하지 않느냐면서,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대들었겠어요? 역시 아들을 낳지 못한 죄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한나의 이야기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에게 아들이 하나 생기기만 하면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사람들의 대하는 눈빛부터 달라지겠지요. 아들도 못낳는 원수에서 아들을 낳아주신 귀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늘 죽어지내고 행여 어디서 큰 소리라도 나면 자기 때문이 아닌가 주눅이 들어 살던 생활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할 말도 하고, 자기 주장과 권리도 펼 수 있게 됩니다. 늙은 할머니가 되어서나마 아들을 낳은 사라는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게 아들을 원했던 라헬도 마침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고 보니 이렇게 좋은 것을... 그래서 하나 더 낳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또 아들을 낳게 되기는 했지만 그 아들과 자기 목숨을 바꾸어야 했지요. 어쨌든 아들은 자기 목숨과도 바꿀 만큼 소중했습니다. 한나 역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룻을 보세요. 도대체 불행과 무슨 원수진 일이 있었는지, 시집와서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남편을 잃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데다가, 늙으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봉양해야 할 짐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낯선 땅, 낯선 사람들 틈에서 말입니다. 그러던 룻의 신분과 지위가 혁명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가장 지위도 높고 재산도 많은 집안의 안방 마님이 된 것입니다. 낯선 타국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감옥살이를 거쳐 결국 그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던 요셉의 경험만큼이나 파격적인 변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의 대를 이어나갈 아들을 낳았으니, 룻의 주가가 얼마나 높아졌겠어요? 그만큼 그의 행복지수가 높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룻의 행복을 가능하게 해 준 근원에 관한 것입니다. 룻이 아들을 낳을 수 있었던 이유를 룻기의 저자가 뭐라고 말하는지 보세요.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이렇게만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룻이 누리게 된 행복은 룻의 성실함과 노력의 대가가 아닙니다. 룻이 아들을 낳았던 것은 하나님이 그로 잉태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의 내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룻기의 이야기는 착하고 성실한 룻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룻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자기 일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한다'(빌 1:20)고 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뜻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이 얼마나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것인지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된 삶을 사느냐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이것은 아들을 낳지 못했던 모든 여인들, 또 아들을 낳았던 모든 여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인류 최초로 아들을 낳았던 여자는 하와인데, 아들을 낳고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고 했어요.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뺏어다가 자기 아내로 삼은 것 때문에 여호와께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들을 낳고 낳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요 주장입니다. 자기에게도 아들을 낳게 하지 않으면 차라리 가서 목을 매달든지 물에 빠지든지 해서 죽어버리겠다고 하는 라헬에게 야곱이 하는 말도 그것입니다.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여기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있다고 합시다. 현대의학에서는 임신이 안되는 이유를 밝히려고 할 것입니다. 가령 해당되는 신체기관에 선천적으로 결함이 있다거나 또는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거나, 어쨌든 의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진단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3천년 내지 4천년 전의 구약시대에는 의학이 거기까지 발전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태를 닫으셨다거나, 아기를 낳은 것은 하나님이 잉태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고 오늘날 우리가 비과학적인 맹목적 신앙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야말로 진짜로 비과학적인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들은 의학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역사와 삶의 현장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어오셨으며 그 과정에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여 년 전에 처음으로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을 때 매우 심각한 논란이 일어났었습니다. 아기를 원해도 갖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복음이었습니다. 반면에 생명은 하나님의 소관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침범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야곱 시대에 시험관 수정 기술이 개발되어 있었더라면 야곱이 라헬에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라고 하는 대신에 유명한 산부인과에 가보라고 했을까요? 만약에 성경을 기록했던 저자들이 오늘날 살아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면 시험관 시술을 통해 낳은 아기를 뭐라고 기록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닫으신 태를 과학자들이 여는 데 성공하여 잉태하였더라.' 이렇게 기록할까요?

시험관 아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역 침범이라고 극렬하게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시험관 수정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의 지식과 경험, 또는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을 보고 하나님이 태를 닫으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기 못낳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시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임신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어떤 경우는 체내에서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수정만 시험관에서 대신 해서 임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면 크나큰 축복인 것이지요. 임신이 불가능한 사람들 중에서 시험관 수정으로 임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닫으신 태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시험관수정을 통해서 태를 열어주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 당시에 시험관 아기가 가능했다면, 성경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산부인과 의사들의 손을 빌어 라헬의 태를 열게 하시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그 성경 저자들이 오늘날의 상황을 기록한다면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와께 간구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기술 좋은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게 하셔서 시험관 수정으로 잉태케 된지라. 이에 그가 자기의 부끄러움을 제하셨다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물론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이성이 용납할 수 있는 현상으로 꿰맞춰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잉태하지 못했던 사라나 라헬이 잉태하게 된 것은 우리가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할 일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그들로 잉태하게 하셨다 이렇게 믿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룻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아들을 낳았다. 그냥 믿으면 되는 거예요. 다른 설명이나 이유가 필요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요즘에는 시험관 수정이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닙니다. 최근 들어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시험관 아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논란거리입니다. 교황청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인간의 복제는 허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과 필요성, 욕망 등이 결합되어 머잖아 복제된 인간을 보게 될 날이 오게 될지 모릅니다. 실제로 캐나다의 한 연구소에서는 어린 아이가 죽었을 때 20만 달러를 내면 그 죽은 아이의 체세포를 채취해서 죽은 아이와 똑같은 아이를 만들어 주기로 했답니다. 벌써부터 신청을 받고 있는데, 앞으로 법적으로 허락되기만 하면 즉시 시행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법으로 금지하고 허락을 하지 않아도 비밀리에, 또는 특별한 분야에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현상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까요? 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합니까?

이것도 어떻게 보면 시험관 아기처럼 큰 축복이 아니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간에 암이 생겨서 죽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암이 생긴 간을 잘라 내버리고 새 간을 이식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새 간을 어디서 납니까? 그리고 장기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잘 맞는 것이 아닙니다. 이식된 장기와 내 몸이 서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면 제대로 작동을 할 수 없지요. 그럴 때를 대비해서 복제인간을 만들어 놓았다가 그 간을 갖다 이식하면 아무 문제없이 100% 제 성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제되어 간을 제공하는 개체는 인간입니까? 물건입니까? 죽은 아이를 복제해서 똑같이 만들어냈다고 합시다. 그 아이는 죽은 아이와 동일한 아이입니까? 아니면 다른 아이입니까? 이처럼 인간복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인간의 행위를 어디까지 용납하시는가?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셨기 때문인가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을 복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는 행위하면, 오늘날의 인류는 지금 하늘에 닿겠다며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용납하실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벨탑은 높아져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조금만 더 있으면 그 탑이 정말 하늘에 닿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과학의 발달과 기술의 진보로 생명의 신비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올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요. 인간의 DNA가 모두 해독되어 수명연장이 이루어지고, 복제기술로 죽은 사람도 똑같이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거대한 바벨탑이 지금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바벨탑이 아니라 우리로 잉태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태를 닫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태를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오미를 빈손으로 만드시고 룻을 비천한 지경에 처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룻을 존귀케 하셔서 아들을 낳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는 그렇게 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도 풍성하게 하시거나 비천하게 하실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 하나님께 믿고 의존하고 순종할 뿐이지요. 우리 모든 삶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만 바라보는 믿음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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