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 하나님은 어디 갔을까? (삿 06:11-18)

첨부 1


니체가 그랬던가요? 하나님은 죽었다고. 니체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도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많이 접하고 살아갑니다. 답답하고 어두운 현실이 우리의 생을 짓누르고, 어디로부터도 구원이 임할 것 같지 않은 암담함이 엄습해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의 이 일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으신 것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하신다면 왜 이런 일을 내버려두시는가? 우리는 이와 같은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많은 질문에 파묻혀 사는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죽어버린 것 같은 현실을 살아가던 한 사람을 만납니다. 기드온이라는 젊은이입니다. 우리가 기드온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삼백 명의 용사지요. 그 삼백 명의 군대로 미디안의 대군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겨우 남은 열두 척의 배로 왜군의 함대를 무찌른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기드온은 많은 사사들 가운데서 메이저 사사에 포함되고, 그의 이야기는 다른 사사들의 이야기들보다 더 많은 지면을 할당받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하다고 여겨지는 사사인 삼손의 이야기보다 기드온의 이야기가 더 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명하고 중요한 인물인 기드온이 처음부터 그렇게 주목받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죽어버린 것 같은 현실을 고통스럽게 살고 있던 무력한 젊은이였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6장 첫 부분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파종할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쳐들어와서 온 땅의 토지 소산을 완전히 멸해버렸습니다. 도대체 농사짓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일제의 수탈을 경험했습니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이 군산항을 통해서 모두 일본으로 실려갔습니다. 뼈빠지게 일해서 수확을 해 봤자 먹을 수가 없이 다 빼앗기고,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미디안 사람들은 아예 농사 자체를 못 짓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악독해지는 데는 한계가 없는 것 같아요.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 상태는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인공적인 기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예 밭에 농작물이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다 파헤쳐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그 꼴을 당하며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애와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요?

무대에 처음 나타나는 기드온의 모습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기묘한 형색이지요?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미디안 군대가 쳐들어와서 파종한 밭을 짓밟아 농작물을 다 죽이곤 했어도, 어떻게 살아남은 곡식이 좀 있었을 것이고, 또 재주 있는 사람은 비밀스러운 곳에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디안 사람들은 추수할 때도 찾아와 조금이라도 곡식이 발견되면 모두 빼앗아갔습니다. 몰래 농사를 지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것을 몰래 타작하는 것도 큰 일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타작은 타작마당에서 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언덕 위의 넓은 땅이 타작마당으로 적합합니다. 그래야 바람에 겨를 날려보내고 알곡만 모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타작을 했다가는 당장 미디안 사람들의 눈에 발각되어 모든 곡식을 빼앗기고 말겠지요. 그래서 기드온이 포도주 틀 속에 들어가 타작을 합니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포도주 틀은 포도주를 만드는 좁은 밀폐된 공간입니다. 그 속에서 타작이 제대로 되겠어요? 겨가 밖으로 날리기라도 한다면 타작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날 것입니다. 좁은 통 속에서 겨를 뒤집어쓰며 숨을 죽이고 타작을 하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겠어요? 이놈의 세상, 왜 이렇게 살아야 해? 우리 조상들을 구원했다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왜 조상들은 구원했으면서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지?

그런데 바로 그러한 기묘한 형색의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물론 우리는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의 기드온의 모습은 몇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포도주 틀에 들어가 밀을 타작하는 기드온에게서 우리는 두 가지 모습을 봅니다. 하나는 피정복민으로서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드온을 부르셔서 나라를 구하도록 하실 작정입니다. 그렇다면 전투의 경험이 있거나 군대를 모집하고 조직해 본 사람이 유리할 것입니다. 이미 자기 휘하에 작은 군대나 또는 비밀결사대라도 가지고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미디안 사람의 눈을 피해 포도주 틀에 들어가 몰래 밀 타작을 하는 힘없는 농부 기드온을 부르셔서 미디안의 군대를 쳐부수고 나라를 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삼만 명이나 되는 많은 지원병들을 다 돌려보내도록 하신 일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구원은 능력있는 지도자에 의한 것도 아니고, 큰 군대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어쩌면 우리도 기드온처럼 포도주 틀 속에 들어가 남의 눈을 속이며 타작하는 빈약하고 초라한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아직 우리는 조금도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의 주체가 하나님이실 때, 우리의 연약함은 오히려 부르심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연약하기 때문에 일부러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나는 안됩니다. 재능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나는 못해요.' 이런 식으로 자꾸 거부하는 것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단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포도주 틀에 들어가 밀 타작을 하는 힘없는 기드온을 부르셔서 미디안의 대군을 무찌르게 하실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기드온 자신도 꿈에서나 그것을 생각했겠어요? 그것은 기드온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를 들어 높이고 우리의 능력을 과시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통로로 사용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주제파악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포도주 틀 속에서 밀 타작을 하는 기드온의 모습에서 또 하나 끄집어낼 수 있는 사실은 기드온이 꼭 겁쟁이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에게는 미디안에 대항해서 싸울 힘이 없습니다. 감히 나서 싸울 수도 없습니다. 상대도 안 되는 싸움에 괜히 나섰다가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의미없는 개죽음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싸울 의지마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록 나가서 싸울 힘은 없고 그래서 공개적으로 반대운동을 하지는 못하지만, 은밀하게 자신이 싸울 수 있는 부분에서 그는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싸움이란 모든 곡식을 빼앗아가는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자신의 곡식을 지키는 일입니다. 싸움이라고까지도 할 수 없는 소극적인 일이지만, 미디안에 대항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만약 숨어서 타작하는 것이 발각이라도 된다면 곡식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매우 위험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반 미디안 운동이고, 어떤 의미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좀 더 큰 힘이 주어진다면 그 힘만큼의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비록 그에게 큰 힘은 없었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괜찮은 재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쓰임 받기 위해서는 당장 우리에게 얼마만한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라도 충성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고 그를 따르는 군사도 한 명도 없지만,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는 것 때문에 그는 이미 큰 용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불만을 쏟아놓습니다. '뭐라구요?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구요? 내 꼴을 좀 보세요.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 파종 때가 되면 저 미디안 놈들이 와서 밭을 파헤쳐도 우리는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지 않습니까? 우리 백성들의 피눈물 섞인 탄식 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나마 어렵사리 추수한 것, 이것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맞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을 애굽에서 건지셨다면서요? 많은 능력과 기적으로 구원하셨다면서요? 그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는 그 능력을 모두 잃어버리셨나요?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건가요?'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마음 속에 맺힌 한을 쏟아내자면 끝이 있겠어요?

여러분은 그런 경험 없으세요?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군요. 아무리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고 그저 버림받았다는 비통함이 가슴을 찢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런 경험이 없는 분들은 참 다행이군요. 그러나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나님이 죽었습니까?' 이렇게 울부짖다가, '그렇다면 죽은 하나님께 매달릴 필요가 없지.' 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입니다. 자칫하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영원히 죽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순간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교회에 나오는 마을 처녀가 한 명 있었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참 친절하고 교회 일에도 열심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밤마다 이 처녀가 예배당에 나와서 통곡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옆에 살던 저로서는 그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어요. 낮에는 늘 생글거리며 상냥하던 누나가 밤만 되면 슬픈 여인이 되는 이중생활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도시에 나가서 교사를 하는 그 교회의 청년이 있었는데, 그 청년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 그렇게 밤마다 울면서 기도했던 이유였습니다. 그 처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왜 이렇게 잔인하실까? 왜 나를 이런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실까? 왜 하나님은 나에게 조금도 도움이 안 되시는 걸까? 그 청년이 나를 버린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은 이러한 캄캄한 현실 속에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시 44:23). 형제 자매 여러분, 아침해가 떠오르기 직전이 가장 어둡습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고통을 느끼는 순간, 마치 하나님이 죽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와 있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한 기드온에게 찾아온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십시오. 그가 찾아온 것은 여호와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나님이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될 만큼 캄캄하고 절망적인 순간에, 여호와의 구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만일 한편에서 구원을 예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이제 죽어버린 하나님은 필요 없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면 나도 하나님을 버릴 수밖에 없지.' 하고 삿대질을 하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무슨 결과를 초래하게 되겠습니까?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어요?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입니다. 우리의 좌절과 고통이 클수록 우리가 경험하게 될 승리와 영광은 더 클 것입니다. 초라하고 무기력한 기드온에게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것도 아니고 멀리 떠나신 것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구원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닥친 현실의 폭풍이 차갑고 거칠수록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과거에 조상들을 능력과 이적으로 구원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