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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여주세요 (삿 06: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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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장 외로운 자리가 어디인지 아세요? 외롭다는 것은 혼자 남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가 얼마나 외롭습니까? 버림을 받은 사람도 그래서 외롭습니다.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도 외로움의 문제이지요. 또 하나 아주 외로운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의 자리입니다.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말 한 마디로 대중을 움직일 수도 있는 자리,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지도자, 그래서 조금도 외로울 것 같지 않은 지도자의 자리가 사실은 가장 외로운 자리입니다. 아무도 그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없고, 아무와도 그 자리의 책임과 기대를 나누어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외로움을 알지 못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가장 성공한 지도자가 아니라 가장 실패하고 있는 지도자입니다. 그저 대중의 환호 속에 인기만을 누리고 있는 지도자는 참으로 지도자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에게서는 건강한 지도력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인기만을 추구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지도자는 결코 종말이 아름답지 못해요. 이런 사람은 외로움을 아주 싫어합니다. 외로움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늘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고 스폿라이트를 한 몸에 받아야만 자기 존재의미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증후군을 요즘에는 YS 신드롬이라고 하더군요. 끊임없이 깜짝쇼를 해서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 쏠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깊은 고독 속에서 영글어진 성숙하고 무게있는 처방이 나오지 못하고 늘 천박한 인기위주의 깜짝쇼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지도자는 대중의 요구 앞에 No!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 대중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도자는 대중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대중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비전을 가진 것이 지도자입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대중에게 분명히 No!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때로는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대중과 싸워야 할 때도 있겠지요. 그 수많은 대중과 혼자서 맞서야 하는 지도자, 이보다 더 외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지도자는 환호하며 따르는 대중의 인기 속에서 더 큰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드온을 보세요. 그는 하루아침에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감히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었다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의 용기와 대범함에 모든 사람들이 감탄했을 것입니다. 한번 큰 일을 저지르고 나면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요? 군대에 가면 어디에나 고문관이 하나쯤 있습니다. 본인의 성격이나 적응능력에 문제가 있어서 고문관이 되는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고참들의 농간 때문에 고문관이 되는 수도 있어요. 아주 못된 고참은 졸병 중 한 사람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아주 바보를 만드는 것이지요. 군대에서는 계급이 법입니다. 계급의 횡포 앞에서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고문관이 되면 군대생활이 정말 괴롭지요. 그러다가 사고도 내고 탈영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경우 이 고문관이 못된 고참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일을 저지르는 거예요.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한번 난동을 부리는 것입니다. 또라이 짓을 하는 거예요. 술을 먹고 들어와서 칼을 빼들고 그 고참 찔러죽인다고 쇼를 하거나 아예 고참과 한바탕 치고 박고 싸우거나, 즉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결과는 안 죽을 만큼 얻어터지는 것입니다. 재수가 없으면 영창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아무도 그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웅이 되기도 하지요.

사실은 기드온이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기드온이 언제 지도자 노릇이나 해 보았습니까? 지도자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지도자가 되리라는 꿈을 가졌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남들이 못하는 일을 한번 저질렀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졸지에 영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침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들이 연합군을 조직해서 이스라엘에 쳐들어왔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드온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군대 모집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랬더니 아비에셀 족속이 모두 일어났습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이나 할 일입니까? 제까짓 게 뭔데 나팔을 불고 난리야. 누가 너를 지도자 삼았니? 꿈 깨라, 꿈 깨.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기드온이 사관학교 졸업하고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산에 들어가서 무술을 연마하고 나온 것도 아니에요. 단지 아세라 상을 찍어버렸을 뿐입니다. 물론 그것도 용감하게 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두려워서 아무도 몰래 밤중에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이 군대를 모집한대. 아, 그 아세라 찍은 젊은이? 그 사람이라면 뭔가 해 낼 수 있을거야. 어 그래? 그럼 나도 군대 갈래. 아비에셀 족속뿐 아니에요. 므낫세 온 지파가 호응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까지 다 기드온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드온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것이지요. 그때는 왕이 없었잖아요? 통일된 정치권력이 없었어요.

얼떨결에 대군의 총사령관이 된 기드온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초고속 출세를 한 것이 황홀했을까요? 지금 기드온의 어깨 위에는 저 원수들을 쳐부수고 민족을 도탄에서 구해내는 사명이 지워져 있습니다. 누구와도 나누어 질 수 없는 무한책임을 기드온 혼자서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만일 기드온이 부사령관쯤 된다면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면 됩니다. 그 명령대로 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의 책임만 지면 됩니다. 그러나 총사령관은 모든 책임을 혼자서 다 져야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이 기드온에게 닥친 엄연한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언제 전투를 지휘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자신을 준비시켜 온 것도 아니잖아요?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몰려든 백성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기드온이야말로 민족을 구원할 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만을 믿고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온 백성이 나온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기드온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기드온은 지금 할 수만 있다면 백성들에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도무지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없어서 밤중에 보따리를 싸서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말 자신이 없노라고, 그저 얼떨결에 여기까지 온 것일 뿐, 애초부터 이런 계획은 없었노라고, 누구에게 고백을 할 수 있겠어요? 누가 그의 고민과 두려움을 알아주겠습니까? 수많은 백성들이 나아와 기드온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기드온은 그 앞에 나가서 태연한 척 웃음을 지으며, 혹은 위엄스러운 모습을 하고서 손을 흔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환호 속에서 기드온은 얼마나 외로운 사람입니까? 누구를 의지할 수 있습니까? 누구한테 가서 물어볼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낮에는 대군 앞에서 당당하고 위엄을 나타냈던 기드온이 밤이 되니까 어떻게 변하는지 보세요. 가서 하소연할 데는 하나님 밖에 더 있나요? 하나님... 어쩌자고 나를 이렇게까지 내모시는 겁니까? 누구 망신시키려고 작정을 하셨습니까? 좋습니다. 하나님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 다 압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떨고 있는 것 안 보이세요? 이렇게 떨고 있는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구요? 내일 전투에 나갈 총사령관이 이렇게 떨고 있다면 그 전투 하나마나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거든,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확실한 증거를 말입니다.

믿음이 없는 모습이지요. 뭐라구? 주님이 살아나셨다구? 웃기지 마. 나는 내 눈으로 그 손의 못자국을 보기 전에는, 그리고 그 구멍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도마와 비슷한 모습 아닙니까? 사실 도마처럼 억울한 사람도 없어요. 어디를 갔었는지 모르지만 하필 없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바람에 '의심많은 도마'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지 않아요? 다른 제자들은 뭐 안보고 믿었나요? 다 보고서야 믿었지 않아요? 만약 베드로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똑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도마만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지요.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그에게 이미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아세라 상을 찍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셨지 않아요?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강림하셔서 그가 군대를 모집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또 증거를 보여달라구요?

여러분,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그렇습니다. 연약한 인간입니다. 목사는 만능재주꾼도 아니고, 완벽하지도 않아요. 하나님,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 주세요. 그러면 믿겠습니다. 그래도 미덥지 않아서, 한번만 더 보여주세요... 혹시 밤중에 누가 양털에다 물을 부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이번에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고 다른 곳에는 이슬이 내리게 해 주세요. 아무리 조심스럽게 물을 뿌려도 양털에 물을 조금도 묻히지 않기는 어려울 테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이게, 그냥... 한번 말하면 믿을 것이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또 한번 보여 줬으면 됐지 두 번씩이나 보여 달래? 그렇지만 기드온으로서는 얼마나 두렵고 답답했으면 그렇게까지 했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기드온의 믿음이 적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저는 백번 이해가 돼요. 저도 그러고 사니까요.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내 손으로 이 주사랑교회를 일으켜 세우시겠습니까? 저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데요. 보세요. 자격이 없다구요. 내가 다른 목사들처럼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해가지고 크게 부흥시킨 그런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실력을 많이 갖춘 것도 아니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목사 시키셔서 이 교회를 일으키시겠다면 증거를 보여 주세요. 자, 여기 양털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와서 볼 거예요.

하나님은 기드온의 무리한 요구에 짜증을 내지 않으십니다. 기드온의 요구가 무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믿음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기드온은 지금 확신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확신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의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확신을 갖게 되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까지 허용하시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양털만 젖게 해 달라는 우리의 요구를 얼마나 여러 번 들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확신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양털만 젖지 않게 해 주세요, 할 때도 하나님은 짜증내지 않으시고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조금씩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답답할 때도 있고, 불안 속에 또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주신 증거들을 통해서 저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고 크게 들어 쓰시리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확신을 갖기 위해 하나님께 증거를 구하는 것과, 정말로 믿음이 없어서 쓸데없는 것을 하나님께 자꾸 요구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짜증나게 하는 믿음없는 요구는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세요.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교회 사이에도 예의가 있고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목회에도 윤리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예의가 어디 있고 윤리가 어디 있느냐고 그러지요? 그래요, 사실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어요. 남들이 그렇게 한다고 나도 예의를 어기고 윤리를 무시하면서 목회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 따위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지도 않아요.

여러분, 최근에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마음이 많이 쓰였지요? 섭섭하게 생각된 부분도 있었지요? 이거야말로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었는데, 양털도 땅도 하나도 안 젖었네. 뭐가 잘못된 거야?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내일의 전투에 대한 확신을 위해 하나님께 구한 증거였습니까? 아니면 믿음이 없이 그저 우리 욕심을 채우기 위해 윤리도 예의도 무시한 무리한 요구였습니까? 우리는 지금 땅따먹기 시합을 하는 게 아니에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거예요.

이런 일에 우리가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한 뜻을 가져야 합니다. 목사 생각은 이렇고 교인들 생각은 저렇고 하면 뭐가 됩니까? 여러분, 저 외롭게 만들지 마세요. 오히려 저는 이번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의 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뻔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전혀 몰랐어요.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는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보호하셨다고 믿습니다. 눈앞의 달콤한 유혹에 너무 약해지지 마세요. 누가 뭐래도 우리는 정직한 길을 당당하게 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확신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정 답답하면 오늘밤에 다시 양털을 하나님 앞에 두고 정직한 마음으로 기다리세요. 하나님이 분명한 증거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 증거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이 위로와 확신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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