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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적은 내부에 있다 (삿 07: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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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기드온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기드온에 대해서가 아니라 기드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무슨 일을 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또 기드온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하나님이시며, 또한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디안 연합군에 대항해서 전쟁을 하려고, 즉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선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되고 있었습니까? 솔직히 기드온으로서는 많지도 않은 33,000명의 군대를 300명으로 줄여버리신 하나님의 처사가 황당했을 것입니다. '일어나서 미디안을 쳐라. 그리고 나라를 구해라.' 이렇게 부르신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다면 그 부르심에 걸맞는 후원(support)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후원이란 당장 적군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군대를 조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군대를 조달해 주시기는커녕 기드온이 애써서 모집한 군대를 다 돌려보내셨습니다. 겨우 300명밖에 남지 않은 군대를 가지고 기드온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도움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길을 가로막고 계시지는 않나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짧은 생애 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무슨 일을 시키셨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나는 할 수 없다고, 나는 능력이 없어서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을 해도 하나님은 기어이 그 일로 부르시는 수가 많습니다. 그렇게 부르셨으면, 이제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멍석을 깔아주시고 이것저것 챙겨주셔야 할텐데, 그러시기는커녕 마치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히려 그렇게 후원을 해 주시지는 못할망정 가지고 있는 자원마저 빼앗아 가시지나 않았으면 하는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일을 맡은 분들이 종종 느끼게 되는 형편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 여선교회에 이어서 남선교회도 어제 새로 임원을 뽑았는데, 국회의원 선거처럼 내가 바로 적임자라고 주장하며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싸우는 상황에서 임원을 뽑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부담을 안고 또 자신의 능력 없음으로 인한 걱정과 불안 속에서 일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이 일로 부르셨다고 믿고 순종하며 출발합니다. 어차피 나는 능력이 없으니까 하나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내가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도 쏟아져 나오고 계획했던 모든 일들은 착착 이루어져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오히려 내가 일을 맡은 후로 모임도 시들해지고, 전에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은 떠나가고...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어쨌든 기드온으로서는 착잡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다음 지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모든 군대를 돌려보내야 했던 충격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기드온에게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을 시간도 없습니다. 135,000명이나 되는 적군 앞에 겨우 300명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슨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날 밤의 날씨처럼 차가운 현실이었습니다. 만일 이 사실이 적군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적군이 공격을 개시해 오기라도 한다면 기드온의 소명과 꿈은 가엾은 그의 목숨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기드온의 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군의 공격을 늦추도록 해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것인지, 그래서 살아날 궁리를 할 것인지, 이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당장 오늘밤에 적진을 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보고 호랑이 앞에서 웃통을 벗는다고 합니다. 기드온으로서는 기가 막히지 않겠어요? 아니, 호랑이 앞에서 웃통을 벗으라니, 도대체 하나님, 어쩌시겠다는 것입니까? 글쎄,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로 1,000명을 죽였고, 장비는 장판교에서 홀몸으로 백만 대군을 막았다고 하지만, 기드온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아무나 호랑이 앞에서 웃통을 벗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무작정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보증(guarantee)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한번도 기드온을 속이지 않으셨습니다. 기드온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벌써 여러 차례 분명히 말씀하셨고, 그때마다 그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바위에서 불이 나오기도 했고, 젖은 양털, 마른 양털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오늘밤에 내려가서 적진을 치면 그것을 네 손에 이미 붙였기 때문에 아무 염려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습니다. 자신의 일꾼으로 쓸 기드온도 부르셨고, 거추장스러운 22,000명의 군대도 모두 돌려보내셨고, 이제 남은 것은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를 가지고 내려가서 미디안 연합군을 공격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도록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기드온에게는 아직 두려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데 있어서 지금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기드온의 두려움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미디안을 공격하기에 앞서 기드온의 두려움을 없애는 일부터 처리하셔야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미디안을 기드온의 손에 붙이셨다면, 미디안의 연합군이 아무리 수가 많아도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서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는 말씀은 완료형 시제입니다. 그것을 기드온의 손에 붙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붙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이 해야 할 일은 자기 손안에 들어 있는 그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135,000명 군대는 이미 기드온의 적수가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기드온으로 하여금 전쟁에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드온 안에 있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이야말로 기드온의 적인 것입니다. 기드온의 적은 밖에 있는 미디안 연합군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기드온의 모습이야말로 오늘 우리 성도들의 모습을 너무나 잘 묘사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는 풍랑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거친 물결 위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평생 갈릴리 호수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오던 베드로였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 갈릴리 호수를 마스터하다시피 꿰뚫고 있는 베드로였지만, 그동안 한번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이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그 물 위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 속으로 말입니다. 이런 위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놀라운 승리의 현장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깐, 베드로는 곧 물 속에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나요? 무엇이 베드로를 그 위대한 승리의 현장에서 죽음 같은 물 속으로 처참하게 처박았습니까? 커다란 파도가 그를 덮쳤습니까? 거센 바람에 그만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졌습니까? 아니면 물귀신이라도 나타나서 그를 잡아당겼나요? 아니에요. 베드로를 넘어뜨린 적은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안에 있는 의심이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더 열심히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밖에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우리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원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 밖에 있는 적입니까? 아니면 교회 안에 있는 적입니까?

물론 우리 밖에 있는 적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적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135,000명의 미디안 연합군은 얼마나 무서운 적입니까?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다고 했어요. 만만히 볼 적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갈릴리 호수 공포의 파도는 수많은 목숨을 삼켜왔을 것입니다. 무서운 적인 것이 분명해요. 내부의 적이나 외부의 적이나 모두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은 외부의 적은 진정한 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세요. 이스라엘이 한번이라도 외부의 적 때문에 망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실패했던 것은 모두 내부의 적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막강한 권세로 철권통치를 하던 애굽의 바로도 이스라엘을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홍해, 도무지 극복될 수 없을 것 같던 바다도 갈라졌지 않습니까? 광야에서의 굶주림과 갈증도 모두 극복되었습니다. 철통같던 여리고 성도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에서 생겨난 적은 이스라엘을 패망으로 몰고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반역으로 민족공동체의 붕괴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간의 사소한 범죄로 작은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 뼈저린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면서 이스라엘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얼마나 컸습니까? 기드온이 포도주틀 속에 들어가 밀타작을 해야 했던 기가 막힌 상황도 외부의 적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던 내부의 적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밖에서 싸워야 했던 블레셋은 위험한 적이 아니었지만, 그가 자신의 내부에서 싸워야 했던 간음이라는 적은 그의 인생과 나라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위협이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우상숭배로 온 나라가 기근에 시달려야 했고, 히스기야의 교만은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초래했습니다.

성경에서 내부의 적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크고 위험한 외부의 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극복되지 못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믿음의 근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외부의 적은 아무리 큰 것이라 할지라도, 가령 바울이 말한 것처럼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이 우리를 위협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은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그런 위험들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차질이 생겼을 때입니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적이지요. 하나님은 이미 미디안을 기드온의 손에 붙여놓으셨습니다. 외부적인 상황은 이미 끝났습니다.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으로 하여금 나가서 그 승리를 가져오지 못하도록 그를 꽁꽁 묶고 있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기드온에게 두려움이 있든지 없든지, 외부의 상황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상황을 지배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기드온의 승리를 결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나가서 그 승리를 가져오기 전까지는 그 승리가 기드온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드온 안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적이 그 승리를 가져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두려움을 없애 주시기 위해 먼저 미디안 적진을 염탐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부의 적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서 얼마나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기드온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적을 극복하게 되었을 때, 외부의 적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때 우리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말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환란이 닥쳐왔을 때, 정작 우리가 싸워야 하는 적은 그 환란이라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그 환란을 두려워하고 그것에 낙심하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 내부의 적을 극복했을 때 외부의 환란은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극복해야 할 우리 내부의 적들은 무엇인가요? 불신앙 아닙니까? 의심이지 않아요?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교만이라는 적이 우리를 넘어뜨리고 있습니다. 게으름과 책임회피 역시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우리 내부의 강적입니다. 다시 한번 참으시면서 기드온의 두려움을 없애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내부의 적들을 소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외부의 적들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이미 이루어놓으신 하나님의 승리를 내 것으로 가져오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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