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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딴죽걸기 (삿 07:2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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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렵게 어떤 문제를 극복했는데, 그래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우입니다. 어떤 면에서 더 큰 위기는 하나의 위기를 극복했을 때입니다. 위기를 극복했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 성취감과 만족감에 젖어 있는 순간에 긴장이 풀어진 그 틈을 비집고 다른 위기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겨우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의 연합군을 무찌른 기드온은 그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끝나기도 전에 전혀 다른, 그리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 에브라임의 도전과 비난이었습니다. 기드온의 희한한 침공에 혼비백산해서 자멸하고 만 미디안 연합군 중에서 살아남은 패잔병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망을 칩니다. 이 패잔병들을 추격하기 위해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기드온의 부름에 응답하여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나와서 미디안의 두 방백을 사로잡아 죽이는 대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가지고 기드온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전투에서의 전리품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투에서 얼마나 큰 공훈을 세웠는지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적장 두 사람의 머리를 당당하게 들고 나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오만한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사실은 도망가는 패잔병들을 추격하는 것은 서로 맞붙어서 싸우는 것과 다릅니다. 전투라고 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도 당당하게 그 전리품을 가지고 온 것은 군대의 총사령관인 기드온에게 전투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고 그에 합당한 자기들의 위치를 확인받겠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하는 말을 보세요.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그러면서 크게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왜 너 혼자 공을 다 차지하려고 했느냐? 우리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인데 왜 우리의 의무를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느냐? 이렇게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상황이 불리할 때는 숨을 죽이고 숨어 있다가 상황이 변하면 어느 샌가 나와서 맨 앞에 나가 맹활약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2차 대전 때 소련이 그랬습니다. 전투가 한창일 때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다가 전세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분명하니까 얼른 연합군에 가담해서 전쟁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승전국으로서 전리품은 누구보다도 많이 챙기지요. 그래서 독일도 나눠먹고, 일본을 나눠먹는 대신 애꿎은 한반도를 반으로 잘라서 한 토막을 삼켰던 것입니다. 지금 에브라임 사람들의 주장이 꼭 그 꼴 아닙니까? 도망가는 패잔병 쫓아갔다가 적장 머리 두 개 들고 와서 하는 말이, '이것 봐, 우리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우리 빼놓고 뭐 할 수 있을 것 같애?' 그래서 기드온이 군대를 모집할 때 에브라임 사람들을 부르지 않은 것이 기드온의 모든 승리와 공훈을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그를 오히려 죄인으로 만드는 큰 잘못인 것처럼 몰아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 다음으로 큰 그룹입니다. 원래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아들로 삼겠다고 하면서 요셉에게 두 몫을 주었던 데서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형인 므낫세보다 동생 에브라임을 먼저 꼽아 큰 아들의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나올 때는 늘 유다 지파가 앞장을 섰습니다. 그 후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여호수아는 바로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브라임이 주도권을 잡았겠지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두 지파, 즉 유다와 에브라임의 경쟁과 갈등의 역사였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왕국이 둘로 쪼개졌는데, 이것은 유다 지파인 다윗의 왕통에 반기를 들고 나머지 열 지파가 새로운 왕국을 형성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심세력은 당연히 에브라임이었지요.

기드온이 군사를 모집할 때 왜 에브라임으로부터는 모병을 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기드온 자신이 유다나 에브라임 같은 주요 지파 출신이 아니고 특히 에브라임으로부터는 형이면서도 동생취급을 당해야 했던 므낫세 지파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셀, 스불론, 납달리 같은 다른 소수 지파들로부터 모병을 하는 것이 쉬웠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기드온이 에브라임으로부터 모병을 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군대가 나왔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나온 대부분의 군사들을 돌려보내야 했고, 그렇게 되면 자존심 강한 에브라임 지파가 크게 반발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 기드온이 에브라임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을 따르라고 했더라면 에브라임이 거기에 호응을 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작은 지파에서, 그것도 아무런 배경이나 능력의 탁월함도 검증되지 않은 일개 농사꾼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모병을 하면 그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에브라임 지파에서 호응을 하고 기드온의 휘하에 들어왔겠느냐는 말이지요. 그들은 결코 별볼일없는 농사꾼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기드온이 대승리를 거두고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무슨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영광은 자기들이 차지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상고를 졸업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니까 서울에서 명문대를 나오고 판검사를 하던 사람들의 심기가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메인 스트림이 나라를 주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또 지방에서 상고를 나온 사람이 바른 말이라고 큰소리를 치며 인기를 얻으니까 전에 한자리하던 사람들은 그게 못마땅해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인신공격형 시비성 발언을 하게 됩니다.

사실 에브라임의 본심은 자기들을 불러주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진짜 이유는 기드온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므낫세 지파의 지도력에 머리를 숙이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나마 아무것도 아닌 시골뜨기 농사꾼 기드온이 그런 대승리를 거둔 것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표면적으로 내세울 수가 없으니까 엉뚱한 이유를 들어서 시비를 거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 뒤에 감추어 놓은 다른 개인적인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다루기 힘든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은 마음이 맞고 통하는 사람보다 이렇게 까탈스러운 사람을 만나는 수가 더 많아요. 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에요. 교회에서도 목사가 하는 일을 꼬치꼬치 반대하며 물고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목사가 잘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목사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거나 못마땅한 것이 아니라 목사가 밉고 못마땅하기 때문에 목사가 하는 일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에브라임이 보여주어야 할 태도는 기드온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기드온의 휘하에 들어와 협력해야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으니까요. 사실 그들로서는 기드온의 지도력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명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싫은 거예요. 소수 지파 출신의 농사꾼을 지도자로 모시고 그 휘하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비 걸 이유를 찾아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왜 애초부터 자기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비를 위한 시비요, 반대를 위한 반대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원래 그런 족속입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이 똑같은 짓을 한 적이 있어요. 입다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암몬 족속의 손에서 구원했을 때입니다. 원래 입다는 출신이 비천했어요. 용사이기는 했지만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입니다. 그래서 적자 형제들의 멸시와 핍박을 피해 집을 나가서 시정잡배들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신세가 비슷한 사람들이 입다를 두목으로 뭉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니까 입다에게 도움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결국 입다는 암몬 족속을 무찌를 대가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에브라임 사람들이 못마땅해서 입다에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 보세요.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삿 12:1). 참 지독한 인간들이지요? 발목잡기에 있어서는 경쟁상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입다는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삼국지의 장비에 비교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경솔한 짓도 저지르게 되는데,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신중하지 못한 자신의 말 때문에 결국 자기 딸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남독녀인 딸을 제물로 바쳐서 괴로워 죽겠는데 에브라임 놈들이 이렇게 와서 시비를 거니 참을 수가 있겠어요? '뭣이 어째? 이놈들아! 내가 전쟁 나갈 때 너희에게 도와달라고 했더니 들은 척도 안 하길래 내가 나가서 죽기살기로 싸웠는데, 이제 와서 뭐라고? 너희들 오늘 임자 잘못 만났다. 이놈들, 맛 좀 봐라.' 그래서 에브라임 사람 42,000명이 죽었습니다.

지금 기드온에게 와서 시비를 거는 것도 입다에게 시비 걸었던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성질 같아서는 기드온도 입다처럼, '뭣이 어째? 이놈들아!' 하면서 이 못된 에브라임 사람들의 버릇을 고쳐주었으면 속이 좀 시원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입다와 같지 않았어요. 에브라임 사람들로서는 정말 다행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기드온으로서는 이렇게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미디안의 수탈과 압제 속에서 신음하다가 이제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미디안을 막 물리치고 승리와 해방의 기쁨을 맛보려고 하는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를 맞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미디안이 도망가고 다른 외적이 침입해 왔다면 또 모르지요. 그러나 이 새로운 위기는 바로 자신의 형제인 에브라임에 의한 것이었단 말입니다. 만약 기드온이 입다처럼 '뭣이 어째? 이놈들아!' 하면서 한바탕 싸웠다면, 미디안 원수를 몰아낸 그 위대한 승리의 전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자기 민족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이상한 꼴을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싸우시던 그날 밤에 미디안 군사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며 전멸한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어요? 지금 에브라임 사람들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따로 있는데, 교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거나 또는 교회끼리 싸우거나 하는 꼴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자멸행위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오만하고 거친 에브라임 사람들을 잘 달래고 있습니다. '내가 한 일이 어떻게 여러분의 한 일과 비교나 할 수 있겠소?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 즉 추수하고 남겨진 부스러기라도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 가장 좋은 수확보다 낫지 않소? 당신들이 미디안 적장을 둘이나 처치했으니 이 전쟁은 당신들이 다 이긴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소'

기드온이라고 밸이 없겠어요? 기드온이 그렇게 자존심도 없고 무기력한 사람입니까?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한참 이루어가고 있는 시점이지 않아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서 백성을 구원하고 다스리도록 지도자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민족을 적으로 삼고 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입니다. 그래서 이 기드온의 부드러운 대답이 거칠고 오만한 에브라임 사람들을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승리이고, 이런 사람이 정말 강한 사람입니다.

또 기드온에게는 에브라임 사람들과 당장 싸울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라고는 300명뿐인데, 에브라임과 싸우기 위해 다시 군대를 모집하겠어요? 기드온에게 원래 있던 32,000명의 군대가 있었다면 에브라임 사람들과 맞장을 한번 떠 볼 생각도 했을지 모르지요. 하나님이 31,700명을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기신 것이 이런 일을 준비하시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기드온으로서는 에브라임과 싸워서는 안 되었고 유순한 말 한 마디로 그들의 분노를 달래고 협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잠언에서는 말하기를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고 했지요. 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는 전쟁에서 이겨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스려야 할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민족의 통일과 화합을 도출해낼 수 있어야지요.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지도자로 성숙한 기드온을 봅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포도주틀에 들어가 밀타작을 하던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을 격파하고 도전해 오는 민족 내부의 반발도 무마시키며 민족을 훌륭하게 다스릴 지도자로 변한 것입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번 참으시며 그의 믿음이 성숙하게 연단하셨고, 기드온으로서는 애써 모집한 군대를 돌려보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워야 했고, 미디안의 거대한 대군 앞에서 두려움과 싸우는 훈련도 거쳤고, 내부의 반발과 형제의 도전에 대처하는 법도 배워야 했고, 골치아픈 인간들을 상대하는 법도 배워야 했습니다. 지도자는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는 믿음과 아래로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변화는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믿음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믿음이 좋은 하나님의 사람은 인격도 성숙해야 되고, 세상을 대하고 까다로운 사람을 대하는 지혜도 있어야 하고, 자신보다 남을 생각할 수 있는 아량도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우리 사회에, 우리 공동체, 우리 교회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에브라임 사람들처럼 될 수도 있고 기드온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기드온과 같은 지혜와 인격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었던 것처럼,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아름답게 빚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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