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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숙곳 사람들의 선택 (삿 08: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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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에서는 늘 정치보복이라는 말이 이슈가 됩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조사를 받거나 잡혀가게 되면 정치보복이라고 둘러대지요. 높으신 양반들 하는 얘기가 세 살 먹은 아이도 웃을 일이 많아요. 또 실제로 우리는 정치보복이 야비하게 시행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보복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옛날에는 삼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었지 않아요? 삼족을 멸하는 것은 죄가 그 정도로 큰 것이어서라기보다 행여 있을지도 모를 보복의 씨앗을 아예 남겨놓지 않으려는 안전장치인 것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동탁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도망가던 조조가 며칠 못가서 붙잡히고 맙니다. 그러나 조조를 체포한 그 고을 현령 진궁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조조의 기개와 의지에 반해서 조조를 몰래 풀어주고 함께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조조는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여백사의 집을 찾아가지요. 여백사는 조조를 반갑게 맞더니 마침 집에 손님 대접할 술이 없다며 술을 사오겠다고 나갑니다. 쫓기는 몸으로 잔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부엌에서 칼 가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들을 어떻게 죽일까 하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순간 조조는 여백사가 하인들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시켜놓고 관청에 신고하러 간 줄로 생각을 하고 나가서 여덟 식구를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보니 한구석에 돼지를 묶어 놓은 것이 보입니다.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돼지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넋이 나간 진궁을 재촉해서 조조는 다시 도망길에 오르다가 길에서 마침 술을 사들고 돌아오는 여백사를 만납니다. 웬일로 그냥 떠나느냐는 여백사의 질문에 조조는 칼을 빼서 그마저 죽여버립니다. 기겁을 하고 놀라는 진궁에게 조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천하 모든 사람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참 나쁜 놈이지요? 철저한 이중인격자입니다. 자기가 남을 배신하고 버리는 것은 괜찮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배신하거나 버리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겠다니 그런 심보가 어디 있어요? 조조가 두려워한 것은 복수였던 것입니다. 여백사가 집으로 돌아가 온 가족이 죽임당한 것을 알면 조조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칼을 품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대는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흔히 쫓기는 편은 기진맥진하고 쫓아가는 편은 기력이 왕성하기 마련인데, 지금 쫓고 있는 기드온의 군대도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겨우 300명으로 해변의 바다처럼 많은 군대를 밤새 죽여야 했다면 아무리 노련한 군사들일지라도 녹초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날카로운 칼이라도 벌써 무디어졌을 것이고, 창도 진즉 굽어졌을지 모르지요. 생각 같아서는 몇 남지 않은 적의 잔당 쫓는 일은 그만두고 좀 쉬었으면 좋았겠지요. 대승리를 축하하며 잔치를 벌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미디안의 잔당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군사를 잃었어도 왕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세력이 다시 재기하고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복수할 수 있는 씨앗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녹초가 된 군사들을 이끌고 미디안의 두 왕을 추격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침 기드온은 숙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군사들이 배가 고파서 힘이 없으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숙곳 사람들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네가 세바와 살문나를 다 잡은 것처럼 얘기하는데, 웃기지 마라.' 이런 식입니다. 도와주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도와주기는커녕 우리는 세바와 살문나 편이다 이거지요.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 중 에브라임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숙곳 사람들에게 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너무나 다른 것들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은 기드온의 요청에 따라 모두 나와서 도망가던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붙잡아 죽였습니다. 반면에 이 숙곳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세바와 살문나 편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숙곳 사람들이 왜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는 기드온에게 등을 돌리고 패주하고 있는 세바와 살문나의 편에 섰을까요? 확실한 것은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은 매우 중대한 판단착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세바와 살문나에게 충성을 해야 할 이유도 없고 목숨을 걸고 미디안을 도와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미디안과 동맹을 맺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의리를 지켜야 할 상황도 아닙니다. 아마도 이들은 전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재앙이 될 결정을 내린 것 같지요?

숙곳 사람들은 기드온이 미디안을 이길 수 있다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미디안은 수십년 동안 막강한 힘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이라는 젊은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파죽지세로 미디안을 쳐부수고 있다는 정보에도 어두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드온을 도와 주었다가 혹시나 나중에 미디안으로부터 받게 될 보복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숙곳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들이지요. 기드온을 도왔다가는 미디안의 보복을 받아야 할 것이고, 미디안을 도왔다가는 기드온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기드온이 강해 보일 때는 기드온 편에 서고, 미디안이 강해 보일 때는 미디안 편에 서야 합니까? 지금 숙곳 사람들은 미디안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기드온 돕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미디안이 더 강할 것이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드온 돕기를 거부하는 것입니까?

태백산맥이라는 영화를 보니까, 어떤 마을에 빨치산들이 들어왔어요. 인민해방에 동참하라고 하면서 젊은이들을 차출해서 데려갔습니다. 그 다음날 낮에는 경찰이 옵니다.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조사를 벌이고 빨치산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적발되어 처형을 당합니다. 그러면 또 밤에 빨치산들이 내려와요. 그리고 경찰에게 밀고를 하거나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이 다 끌려나와 처형을 당합니다. 또 다음날 낮에는 경찰들이 들이닥치지요.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이쪽 편에 설 수도 없고 저쪽 편에 설 수도 없고. 이 6월은 우리 민족이 형제끼리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고 죽고 죽였던 비극을 담고 있는 달입니다. 평화롭게 잘 살던 마을이 사상과 체제라는 유령에 씌어서 밤에 칼춤 추는 사람들과 낮에 도끼 휘두르는 사람들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는 놀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화성의 한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사건인데, 그게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그 주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뿌리박힌 원한과 감정의 산물이라는 분석이 있더군요. 6.25때 서로의 밀고에 의해 인민군과 국방군에게 죽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어도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원한이 쉽게 가시겠어요?

저는 이 숙곳 사람들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디안이 없었더라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을 사람들입니다. 또 기드온과 미디안 사이의 전쟁이 없었더라면 그나마 미디안의 압제 속에서나마 생존은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세력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강요를 받게 되었고, 그들은 미디안을 선택하는 매우 큰 실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 숙곳 사람들의 거부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은 매우 뜻밖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매우 유순하고 사려깊은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뭣이 어째? 이놈들아!' 하면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던 입다와는 전혀 달랐었지요? 그럼으로써 필요없는 다툼과 희생을 방지할 수 있었고, 한 민족으로서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인내와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보는 기드온은 인내나 관용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뭣이 어째? 이놈들아!' 하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내가 세바와 살문나를 잡은 후에 돌아와서 너희들 단단히 맛을 보여주마.' 이런 식입니다.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들가시와 찔레로 살을 찢겠다고 했고, 브누엘 사람들에게는 망대를 헐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들가시로 사람들의 살을 찢는 징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 브누엘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어요. 에브라임에게는 인내하고 관용했던 기드온이 왜 숙곳 사람들에게는 잔인할 정도로 과격하고 흥분했을까요?

어차피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중간첩처럼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거나 아니면 죽기살기로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적에게 협조했다고 해서 그렇게 잔인하게 보복을 한 것이 잘한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나 사상에 눈이 멀고 피에 가슴이 얼어붙은 빨치산이나 똑같단 말입니까? 숙곳 사람들이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았다고 잔인하게 죽인다면, 내가 천하 모든 사람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던 조조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또 왜 에브라임에게는 관용하고 숙곳 사람들에게는 잔인합니까? 에브라임은 강하고 숙곳 사람들은 약하기 때문인가요?

휴머니스트의 눈으로 보면 기드온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나아가 비난받아야 할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숙곳 사람들이 누구인가 보세요. 이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을 정복하던 시절, 요단강 동쪽에 정착한 갓 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려다 보니까 이 땅이 너무나 좋은 거예요. 굳이 강을 건너가 전쟁까지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였는가 하면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였어요.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 애굽의 가혹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탈출했고, 또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여호와의 연약백성으로서 민족의 통합을 이루었고, 이제 마지막 남은 관문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인데,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강을 건너지 않고 정착하겠다고 하니 나머지 지파에서 가만있겠어요? 다른 지파들이 남겠다는 지파와 전쟁을 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지파 반이 하는 말이 '우리만 잘 살겠다고 형제들의 고생하는 것을 외면할 생각은 없다. 여자와 아이들은 여기 남고 남자들은 강을 건너 다른 지파들의 정복전쟁에 참여하겠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 강 이편에 정착한다 할지라도 여호와 섬기는 것을 그만둔다거나 민족의 동질성을 파괴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다짐을 하고 언약을 맺지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세월이 지나면서 강 이편에 정착한 사람들은 점점 이질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저의 마음이 얼마나 설&47132;는지 모릅니다. 마치 한반도의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으니까요. 아프리카에서 만난 독일 선교사와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뿌리도 같고 생긴 것도 같고 말도 같고 모든 것이 같은 한 민족인데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 독일 사람 하는 말이, '너희는 이미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50년 넘게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것을 보고 듣고 살아온 사람들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 이후의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던 독일 사람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단강이라는 자연적인 경계에 의해 다수로부터 나뉘어진 이 사람들은 그대로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부터 매우 이탈되어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함께 수탈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야 했던 같은 민족의 편에 서지 않고 오히려 침략자인 이방민족의 편에 섰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생존의 차원에서 볼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배반자이며, 여호와의 언약백성이라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심각한 도전행위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기드온은 그 언약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방민족인 미디안과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기진맥진해 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돕는 것을 거부하고 세바와 살문나의 보복을 두려워하거나 그 편에 가담함으로써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했다면, 이것은 추악하고 비겁한 반역인 것이지요. 그들은 당연히 기드온에게 협조하거나 심지어는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세바와 살문나를 잡으러 쫓아갔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기드온이 이 숙곳 사람들에게도 에브라임에게 했던 것처럼 양보하고 관용했다면 그것은 한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추구해야 할 지도자로서 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에브라임에 대한 인내와 관용은 지도자로서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고, 이 숙곳 사람들에 대한 강경한 대응 역시 지도자로서 필수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에브라임에게 강경대응했다면 우리의 6.25처럼 동족상전을 겪어야 했을 것이고, 숙곳 사람들에게 관용했더라면 민족을 구원하고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는 지도자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옳고 그른 것 사이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절대선과 그 반대편이 있고, 우리는 그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의 메시지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아니면 다른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숙곳 사람들이 기드온을 선택하지 않고 세바와 살문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올바른 선택을 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들가시에 살이 찢기고 처참하게 죽었다는 것은 중요한 테마가 아니에요. 괜히 여기에 시선을 집중해서 휴머니스트가 되다 보면 이 말씀의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숙곳 사람들의 선택은 오늘 하나님 선택하기를 거부하고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은 세바와 살문나가 와서 구해주기를 기대했거나 혹은 미디안의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는 또한 기드온의 선택도 보았습니다. 온유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온유할 수는 없습니다. 온유해야 될 상황이 있고 강경해야 할 상황이 있어요.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적용을 해버리면 그야말로 재앙이겠지요.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또는 학교나 직장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될 때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학생이 되고, 건강한 가정과 든든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말도 많고 일도 많은 요즘 지혜로운 행동으로 우리 교회를 잘 세워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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