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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No라고 말한 왕비 (에 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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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한 왕비 (에 1:9-12)

집에 손님이 온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손님도 손님 나름이겠지요. 빚쟁이도 손님일 수 있고, 밤손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빚쟁이나 도둑을 손님이라고 하기는 곤란합니다. 원래 손님이라고 말할 때는 그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반가운 사람이라는 의미지요. 더욱이 손님은 잔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반가운 손님이 와서 잔치를 벌일 수도 있을 것이고, 잔치를 위한 손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손님과 잔치는 기쁨과 흥분이 고조되어 있는 분위기를 대변하는 단어들입니다.

손님이 오시면 집안을 잘 정돈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손님 오는 것을 좋아하지요. 평소 때 같으면 한 대 얻어맞을 일도 손님이 계시면 맞지 않을 수 있거든요. 손님 앞에서 애들을 때리거나 큰소리가 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모든 일을 조심해야지요. 그런데 큰 잔치를 벌이고 많은 손님들을 초청해서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는 마당에 주인 부부가 그 많은 손님들 앞에서 대판 부부싸움을 한다면 그 잔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잔치를 연 주인 입장에서도 손님들에게 망신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손님들 역시 민망해서 그 자리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슬슬 눈치를 보며 모두들 자리를 뜨겠지요? 즐겁게 시작되었던 잔치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와 똑같은 일이 아하수에로의 페르시아 왕궁에서 벌어졌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6개월에 걸친 대대적인 왕궁잔치를 열었습니다. 제국의 영광과 황제의 권위를 최대한 과시했습니다. 자기가 웬만큼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 힘을 믿고 날뛰다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만나면 그에게 굴복하고 충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것이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6개월간의 잔치를 통해서 아하수에로는 제국 내의 내로라 하는 실력자들에게 왕 자신이 얼마나 더 큰 실력자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귀족과 방백, 장수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페르시아 제국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6개월의 잔치가 끝나자 왕은 잔치를 그대로 끝내기가 섭섭했는지, 성내의 모든 백성들을 초청해서 1주일의 특별잔치를 또 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마저 왕궁에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금잔에 왕이 따라주는 술을 마셨습니다. 아하수에로는 힘으로만 나라를 다스리는 폭군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세심하게 은택을 베푸는 성군(聖君)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다가 왕비도 따로 부녀자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서 국론을 통일하고 민심을 얻기 위한 일에 크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잔치의 마지막날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잔치들은 아하수에로가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내보이는 잔치였던 셈인데, 마지막날이 되자 아하수에로는 그동안 감추어놓았던 또 한가지를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최후까지 남겨놓은 히든카드, 그것은 바로 왕비의 미모였습니다.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이 힘이지만, 미모 역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웬만한 미모는 감상의 대상이지만, 빼어난 미모는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고대의 종교들이 많은 여신들을 숭배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중세의 기사들이 전쟁에 나갈 때는 아름다운 귀부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귀부인으로부터 손수건 같은 기념품을 받아 떠납니다. 그래서 싸움에서의 승리도 그 귀부인을 위해서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그 손수건을 꺼내들고 귀부인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얻습니다. 왕비 와스디는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다가 옷이 날개라고 했는데, 아름다운 왕비의 복장에다가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쓰고 눈부신 모습으로 문무백관들과 백성들 앞에 나타나면, 그야말로 페르시아 제국의 영화와 위엄이 최고조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왕궁의 대잔치가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내시들을 일곱 명이나 보내 왕비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왕비에게서 온 대답은 못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왕이 오라는데 왕비가 못가겠다니, 어명을 거역한 것이지요. 왕이 곧 국가요 법인 고대사회에서 이것은 반역행위입니다. 지금까지의 즐겁고 신나는 잔치 분위기가 한순간에 마치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긴장으로 변했습니다. 말 한마디로 대제국을 호령하는 황제의 위엄이 땅에 떨어져 버렸지요? 아하수에로는 지금까지 잘 해 오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격을 맞고 그만 휘청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천하 제일의 실력자임을 보여주려고 하던 이 페르시아의 황제는 신하들과 백성들 앞에서 완전히 자존심을 구겨버렸습니다. 더 나아가 제국의 위엄까지 큰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왕과 왕비, 즉 남편과 아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 가정 안의 위기가 나라 전체의 위기로 즉각 연결되고 있습니다.

자신있게 내린 명령이 빈 말이 되어 돌아오자 왕은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명령이 거부당한 왕, 말발이 서지 않는 왕이 무슨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존심이 상한 왕은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기는커녕 실없는 사람을 만들어버린, 더 나아가 나라의 중대사를 그르쳐버린 왕비에 대해서 불붙는 듯한 분노와 증오를 갖게 되었습니다. 가정은 파국을 맞게 되었고, 큰 일을 앞두고 있는 나라의 운명마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여러분은 이런 위기를 초래한 것이 누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에 'No라고 말할 수 중국인'이라는 책이 중국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저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가기보다 적극적으로 환경을 바꾸어가며 살아야 한다, 이제 중국도 국제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No'라고 말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비판없이 수용되던 체제에 대한 도전을 의미합니다. 또 자기주장과 주체의식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No'라고 말한다는 것은 기존의 체제와 피할 수 없는 갈등을 가져오게 되지요. 그래서 'No'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선교사들이 처음 선교지에 가서 발견하는 것은 현지인들이 매우 무책임하고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길을 물어보았을 때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가르쳐준 대로 아무리 가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알아보면 전혀 엉뚱하게 가르쳐준 거예요. '내일 몇시에 어디서 만납시다.' 이렇게 철석같이 약속을 했는데도 약속장소에 가보면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꼭 교회에 나오기로 다짐을 해 놓고도 안나옵니다. 그러면 선교사는 현지인들이 거짓말을 했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No'라고 말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상대방이 마음 상할까 봐서 차마 'No'라고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알지도 못하면서 길을 가르쳐 주는 시늉을 했고, 다른 일이 있어서 약속시간에 올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올 수 없다고 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에 나올 마음이 없으면서도 '미안하지만 못나가겠소'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해서 그냥 빈 말이나마 나가겠다고 하는 것이지요.

당장 눈앞의 작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No'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 나중에 훨씬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면, 'No'라고 말하는 것은 용기와 정직함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서도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 불의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면서 'No'라고 말해야 할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선 자신의 교만과 욕망에 대해서 'No'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악한 관습에 대해서도 우리는 'No'라고 말해야 하지요. 교회 내에 가만히 생겨나는 비리나 의혹에 대해서 단호하게 'No'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No'라고 말했던 왕후 와스디는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에게 heroine입니다. 남성 위주로 편성된 권력구조에 앞에서 그저 까닭없이 복종하고 그들의 눈요기가 되는 것을 과감히 거부하고 여자로서의 존엄과 품위를 지켰다는 것이지요.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와스디가 왕명을 거역하고 왕 앞에 나가기를 거부한 것은 술에 취한 군중 앞에서 자신의 품위가 손상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점잖은 신사에게 예비군복만 입혀 놓으면 건달이 된다고 하지요? 유니폼 속의 익명성과 군중심리가 평소에 억제되어 있던 좋지 않은 본성들을 풀어놓기 때문입니다. 왕비를 일대일로 만나면 존중과 경외심을 가지고 대할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한걸음 물러선 군중 속에서 그나마 술에 취한 상태에서라면 왕비에 대한 불경한 언사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욱이 왕비는 자신이 그러한 군중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동원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지요? 그래서 'No'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왕비의 'No'라는 말은 국가적인 재난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이 재난의 발단은 바로 아하수에로 자신입니다. 그가 이 일을 생각해 낸 것은 맑은 정신에서가 아니라 주흥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평소에 하지 못하는 일을 술기운을 빌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술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술기운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아하수에로의 아이디어는 술기운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자기 가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졸장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대군을 호령해야 할 총사령관의 명령이 자기 아내에게조차 먹히지 않는 꼴이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분노가 폭발해서 자기 자신도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잠언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고 했는데, 이래저래 아하수에로는 잘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왕비 와스디의 반응은 얼마나 현명한 것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역시 잠언에 보면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 14:1)고 했지요. 지금 와스디는 왕비로서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여인입니까? 아니면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는 미련한 여인입니까? 자기 자존심을 세우고 남편과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데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와스디는 페르시아 제국을 허무는 미련한 여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비록 남편이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아내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남편의 실수가 만회되고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혹은 그야말로 이판사판 재앙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아하수에로의 요구가 다소 무리한 것이기는 해도 왕은 어전 내시를 일곱 명이나 보내 왕비를 청했습니다. 왕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와 예의를 갖춘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아하수에로 왕은 수 차례에 걸쳐 왕비에게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라면 왕비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왕의 요청을 거부할 명분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비록 취한 기분에 저지른 일시적인 실수였을망정, 제국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서 다가오는 그리스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큰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잔치입니다. 왕비 자신도 그 일을 위해 부녀자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잔치의 분위기에 좀 맞춰 주어도 크게 흠될 것도 아니지요. 왕의 말처럼 의관을 갖추고 백성 앞에 나타나 대잔치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것이 제국의 왕비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무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아하수에로의 최대 관심사는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왕과 제국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비로서 해야 할 일은 그 왕을 더 높이고 세워서 온 나라와 백성 위에 우뚝 서도록 협력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왕비가 한 일은 그 왕을 끌어내려서 땅에 처박아버린 것입니다. 'No'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꼭 그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왕비의 'No'라는 대답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부부간의 위기가 온 집안의 위기가 되지 않던가요? 나아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위기로까지 확대됩니다. 아하수에로와 와스디 사이의 위기가 온 나라의 위기가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 부부의 위기가 교회의 위기로 치닫게 되는 것 많이 보셨지요? 그러한 위기를 초래하는 부부간의 갈등이 어떤 식으로 시작됩니까? 대부분 남편의 실수로 시작돼요. 남편들의 생각없는 한 마디가 가정의 불화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의 사소한 실수가 폭탄처럼 터지는 것은 누구 책임입니까? 바로 아내의 책임이에요. 아내가 그것을 잘 받아넘기면 없던 일처럼 지나갈텐데, 그것을 맞받아 치면서 핵폭발이 일어납니다. 영국의 찰스 왕자가 바람을 피웠어요. 그러자 다이애나가 '네가 그래? 그럼 나도 한다.'는 식으로 맞바람을 피웁니다. 결국 둘 사이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스캔들에 연루되었고, 결국 탄핵의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가정과 나라의 위기지요? 그런데 그 클린턴을 탄핵의 위기에서 구한 것은 힐러리라고 하는 데 이의가 없다고 합니다. 만약 힐러리가 남편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비난했더라면 클린턴은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는 망신과 함께 이혼도 당하고 가정도 깨졌을 것입니다. 힐러리가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게 다른 것이 아니었어요.

남편 여러분, 잔잔한 호수에 쓸데없이 돌을 던져 가정 안에 풍파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내 여러분,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에 화산 폭발하듯 끓지 마세요. 얕은 물은 작은 돌멩이에도 크게 반응합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 안에 바람 잘 날이 없지요. 그러나 깊은 물은 그런 돌멩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깁니다. 가정이 얼마나 평화롭고 안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아내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설령 남편이 실수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 발생할 수 있는 부부의 위기,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슬기로운 아내입니다.

사려깊지 못한 행동으로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과 나라에 위기를 가져온 아하수에로 왕의 실수가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편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해서 가정을 박살내고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이 왕비의 어리석음이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조심하고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가정을 잘 가꾸고 다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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