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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자들의 반란 (에 01: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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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흥으로 말미암은 아하수에로 왕의 신중하지 못한 처사는 왕비의 왕명거부 사태를 초래했고, 이 위기는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점점 증폭되고 있었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지요? 선행을 하거나 은혜를 베풀었을 때 있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때는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준다'고 해야겠군요. 이것이 인간의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엊그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물리적 충돌을 보아도 그렇지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붙잡혀 감금되어 있던 이스라엘 병사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한 시간도 못되어 중무장한 이스라엘의 헬리콥터들이 팔레스타인에 미사일 폭격을 가했습니다. 바라크 총리는 관련된 사람들을 붙잡아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처음에 작게 시작된 사건이 양쪽을 오고가면서 점점 증폭되어 걷잡을 수 없는 사건으로 커지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규범이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하라'는 법입니다. 과거에는 이 법을 잘못 이해해서 보복법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이빨을 하나 뺀 놈은 어디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이빨 하나를 부러뜨리라는 법으로 생각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법은 사랑이라는 대주제로 엮어질 수 있는 성경 전체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하나님의 공의라는 범주에 포함시켜 이해할 성질도 아니지요. 사실 이 법은 수준이 낮은 보복법이 아니라 과잉보복 금지법이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이빨을 하나 부러뜨리면, 나는 그 놈 이빨을 하나 부러뜨리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습니다. 가서 팔이라도 부러뜨려야 속이 시원하지요. 그러면 상대편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빨 하나 부러뜨린 것 때문에 팔이 부러졌으니 억울하지요. 그래서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달려듭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이었단 말이지요.

그러나 이 법의 진정한 의도는 비록 이빨 하나가 부러졌다고 해도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누가 너에게 억지로 5리를 가게 하면 10리를 가 주어라.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편까지 때리도록 대 주어라. 누가 네 이빨 하나를 부러뜨리면 그놈 이빨 하나를 부러뜨리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네 이빨 하나 더 부러뜨리도록 대 주어라는 것입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었고, 사람들이 과거에 보복법이라고 오해했던 이 율법의 참된 의미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처음 듣는 말도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까지 돌려대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바보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이 세상에서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보세요. 예수라는 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라는 분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이라면 죽는 일이라도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씀하신 이 원리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는 적용이 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와 와스디 사이에 오고 갔던 그 보복의 원리가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훨씬 타당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권위있게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단 말이죠.

왕비로부터 거부당한 왕은 왕비에 대한 복수를 계획합니다. 그래서 대신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박사들은 점성술사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사례를 아는 박사들이라고 번역되었는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때를 아는 박사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천기를 분간하는 사람들이지요.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점성술이 매우 발달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왕의 측근으로서 보좌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 역시 페르시아에서 온 점성술사들로 보입니다.

여기 왕의 측근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에스더의 기자는 이 사람들을 아주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들'이라고 말이죠. 즉 에스더 기자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이었고, 왕에게 아첨해서 권력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것이 특징입니다. 왕이 이 사람들과 왕비에 대한 복수를 의논했으니 그 결과가 선한 것이 나올 리가 만무하지요.

여러 방백들과 신하들 앞에서 수모를 당한 왕으로서는 당장 어떤 응분의 조치를 내림으로써 땅에 떨어진 위신을 세우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왕비를 체포해 오라든지, 감옥에 가두라든지,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수에로는 자신의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신하들에게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일곱 방백 가운데 므무간이 나와서 해결책을 건의하는데, 그의 말을 잘 살펴보면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므무간이 말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왕비가 왕의 명령을 거역한 것은 왕의 가정사가 아니라 이미 국가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잔치에 참석한 모든 방백들과 백성들이 왕궁에서 일어난 이 일을 다 보았는데, 이것이 전국에 소문이 나면 모든 부녀자들이 왕비의 행위를 본받아서 남편이 말을 해도 들은 척도 안할 것이라는 거지요. 오늘이라도 당장 우리 집에서 내 아내가 내 말을 거역하고 나올 것이 걱정되는데, 이게 다 왕 때문이오... 은근히 왕을 비난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왕 당신 때문에 우리 집에서 내 위신이 서지 않게 되었소. 나는 그렇게 여자에게 쥐어 살 사람이 아니오. 당신 똑바로 하시오... 그렇지 않아도 상한 왕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한창 높아만 가던 왕의 위엄 앞에 기세가 꺾였던 신하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격을 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왕에게 빼앗긴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왕비를 폐위하라고 합니다. 왕비를 폐위하라는 것은 왕 자신에 대한 도전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이 방백들은 왕 길들이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궁궐 내의 치열한 권력다툼의 한 단면인지도 모릅니다. 방백들 중 누구 하나도 왕비의 편에서 왕비를 두둔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와스디는 왕비로서 나름대로 권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므무간을 비롯한 방백들과 암투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번 사건은 정적을 단숨에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아하수에로는 신하들에게 철저하게 농락을 당하며 왕비를 폐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므무간은 와스디가 다시 왕비로 복직될 가능성까지 완전히 제거해 버렸습니다. 정적이 재기해서 일어날 수 있는 후환을 없애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왕비가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고 해서 전국의 모든 부녀자들이 남편을 멸시할 것이라는 주장은 완전히 억지입니다. 논쟁을 하거나 상대를 고발할 때 주로 사용되는 방법이 상대의 작은 실수를 크게 과장하는 침소봉대 전략이지요. 가령 90%를 성공하고 10%만 실패했다 할지라도, 반대자들의 눈에는 오로지 10%의 실패만 보이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토양에서 공정한 게임이나 페어 플레이를 기대할 수 없지요.

엊그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으로서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수상자 발표 시간이 되자마자 노벨상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여태 공란으로 되어 있던 평화상 수상자 이름에 김대중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어요. 그리고 나서 한국 신문 싸이트들에 들어가 보았더니 벌써 톱기사로 떠 있더군요.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 올해 노벨 평화상을 받으리라는 것은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동안의 햇볕정책이 남북정상회담으로 열매를 맺고, 50년 분단의 역사에서 한 국가임을 상징하듯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이 동시에 입장하는 데 이르렀고, 거기다가 국제적으로 깡패국가로 낙인찍힌 북한과 국제경찰임을 자부하는 미국의 화해 분위기로 이어졌으니까요. 세계 평화에 이만큼 공헌을 했으면 노벨상을 받을 만하지요. 그나마 올해는 별다른 경쟁상대가 없어서 거의 확정적이었습니다. 노벨상 100년만에 우리 한국도 드디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그나마 대통령이 받았기 때문에 한 개인이 받았다기보다 온 나라가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어떤 한국 사람 한분은 김대중이 노벨상 탔다는 보도에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며 통탄을 했다고 합니다. 인터넷 싸이트들의 게시판마다 김대중이 노벨상을 타서는 안되는 이유, 김대중은 노벨상을 반납하라, 김대중은 노벨상을 이용하여 장기집권을 획책하지 마라... 는 등등, 편협하고 근거없는 비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잘못한 것도 많지요. 그렇다고 해서 세계평화에 공헌한 업적이 인정받은 노벨상이 원인무효가 될 수는 없잖아요? 왕비 와스디가 잘못한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지만 왕비가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고 해서 거기 모인 방백들이나 백성들의 아내가, 더 나아가 전국의 모든 부녀자들이 모두 남편을 멸시하고 거역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모든 남편들이 분노할 것이고, 결국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무슨 근거에 의한 것입니까? 김대중은 장기집권을 획책할 것이기 때문에 노벨상을 받으면 안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요. 우리가 남을 비판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고, 싸우더라도 페어 플레이를 해야 해요.

므무간이 세우고 있는 또 하나의 음모는 여자 길들이기입니다. 왕비를 폐위시켜서라도 전국의 여자들을 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 여자들이 감히 남편 말에 콧방귀나 뀌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인간사회에서는 남자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근대적 사회에서 여자는 철저하게 종속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강하지도 못하고, 또 남자처럼 권력지향적이지도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목적도 남편을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이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의 점성술사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는 어떤 것입니까? 혹시라도 여자들이 권력에 도전하거나 권력맛을 보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아예 싹을 잘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비를 일벌백계로 엄하게 다스려서라도 모든 여자들이 남편을 존경하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 므무간의 여자 길들이기 음모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과 존경이라는 부부간의 예절이나 원리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입니까? 또 므무간의 음모가 얼마나 비열한 짓입니까?

폐위를 당한 후 와스디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에서는 그 뒷이야기들을 알 수 없지만, 와스디는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 왕이었던 아닥사스다 왕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스세스)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왕이지요. 그런데 아닥사스다가 태어난 것은 그 궁중의 대잔치가 있던 해였습니다. 그래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거역했던 것이 아마 임신중인 몸으로 남자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아하수에로 왕의 분노와 므무간의 음모가 얼마나 비겁하고 간악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요?

주인이 자기 개를 발로 차면, 다른 사람들도 와서 아무런 부담없이 그 개를 발로 찹니다. 그러나 주인이 개를 애지중지하고 안아주고 뽀뽀하고 하면, 누가 와서 감히 그 개를 발로 찰 수 있겠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고 안중에도 없으면, 남편 친구나 이웃들도 그 아내를 무시하게 마련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고 무능력한 인간으로 취급하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 남편을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내가 내 아내나 남편을 끔찍이 사랑하고 존중하면 다른 사람들도 내 남편이나 아내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아하수에로가 와스디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했더라면 어디 감히 므무간이 그런 음모를 꾸밀 수 있었겠습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수천년 전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만일 이 이야기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것이라면 그저 흥미로 읽거나 또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로 우리에게 주신 책에 포함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훈계와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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