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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에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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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에 2:1-4)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폐위시킨 사건은 한 순간의 취흥으로 시작된 비극이었습니다. 그렇게 왕비를 쫓아내고 나서 상당한 기간이 지났는데, 여기 본문에서는 그 후에 왕의 노가 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시간이 지난 후에 왕의 분노가 풀렸다는 것이 아니에요. 왕비를 폐위시키고 나서 벌써 3-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아하수에로 왕은 그리스 정벌에 나섰다가 돌아왔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아버지 다리우스 1세가 이루지 못했던 그리스 정복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온 나라의 귀족들과 방백들을 불러 모아 큰 잔치를 하며 준비를 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16만의 병력과 12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그리스로 진격했습니다. 아하수에로의 페르시아의 대군은 질풍노도처럼 그리스 북부와 중부를 휩쓸고 남부까지 진격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던 아테네의 함대와 해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해전이 바로 살라미스 해전인데, 여기서 페르시아 해군은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보급로까지 끊길 위험에 처하자 아하수에로는 서둘러 회군을 해야 했고, 그 후로 페르시아는 그리스 정복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에스더 2장이 시작됩니다.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도를 아우르는 대제국 페르시아가 조그만 도시국가 아테네에게 참패를 당하고 돌아왔으니 아하수에로 왕의 기분이 어떠했겠어요? 얼마나 분하고 또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이럴 때 누가 필요합니까? 아내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래도 옆에서 위로하고 사랑해 주는 아내가 있다면 그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동반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동반자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길을 가다 보면 평탄하고 행복한 길도 있을 것이고, 고통스럽고 슬픈 길도 있을 것입니다. 기쁠 때는 함께 가다가 괴로울 때는 같이 못 가겠다고 하는 것은 동반자가 아니지요.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고, 행복과 괴로움도 함께 나누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 18:22)고 했어요. 또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고 했습니다. 원래 아내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잖아요. 아담이 혼자 살면서 외로워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에게 강아지도 주시고 고양이도 주시고 말도 주셨어요. 그렇지만 그것들은 아담의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여자를 지으시고 아내로 주셨을 때 아담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결국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도 동반자인 하와와 함께 나가서 동고동락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현실은 무척 냉정하기도 해요. 행복하게 잘 살 때는 동반자 노릇을 하다가도 집안에 우환이 닥치고 불행이 찾아오면 동반자 못하겠다고 집을 나가버리는 아내들이 많거든요.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은 외국 땅에서 근로자로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라는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게 되었는데, 그런 남편과 일곱 살짜리 어린 딸을 남겨두고 아내가 떠나버렸어요. 그렇게 10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번에 그 딸이 대학에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만약 남편이 그렇게 사고를 당해서 장애인이 되었을 때 아내가 곁에서 남편을 돌보고 딸을 키워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사실 그렇게 하라고 아내를 주신 것 아닙니까? 모두가 떠나고 저버릴 때 최후까지 남아서 위로하고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내거든요. 불행하게도 현실세계에서는 장애인 남편과 어린 딸을 남겨두고 떠나버리는 아내가 있지만, 아내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자기의 행복과 살 길을 찾아 불행한 남편을 떠나버리는 아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고 남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진짜로 하나님이 주신 아내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욥의 아내는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잃고 남편이 다 죽은 송장처럼 되었어도 혼자 살겠다고 떠나지는 않았잖아요? 비록 남편이 너무 불쌍하고 속이 상해서 못할 소리, 믿음 없는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통 중에 있는 남편 곁에서 그를 위로하고 도왔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고 욥도 회개해야 했지만, 욥의 아내를 책망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뭐 욥의 아내가 주인공도 아니고 또 책망하셨는데 기록이 안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아내를 통해서 욥은 다시 자녀들을 얻고 새롭게 가정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온 몸이 독한 부스럼과 종기로 덮인 욥을 눕히고 일으키고 물이라도 떠 마시우고 했던 것이 누구였겠어요? 아내가 있다는 것이 그나마 욥에게 큰 위로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아하수에로 왕에게는 아내가 없습니다. 왕 근처에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후궁이야 얼마든지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나누고 인생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동반자가 아니거든요. 지금 아하수에로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켜주는 여자가 아니라 마음 속 고통을 함께 나누며 위로해 줄 아내인 거예요. 아하수에로에게 원래 아내가 없었던 아니지요. 가장 아름답고 똑똑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자기가 쫓아냈지 않습니까? 그것도 술김에 시작된 일로 말이지요. 그때는 아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어요. 오로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 정벌과 그것을 준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정벌에 실패하고 돌아와 실의에 빠져 있다 보니 왜 자꾸만 옛날 아내 생각이 나는 걸까요? 그렇게 아내를 쫓아냈던 것이 얼마나 후회가 되겠어요? 어차피 이렇게 실패로 끝날 그리스 정벌에만 정신이 팔려 더 소중한 아내를 자기 손으로 쫓아냈단 말입니다. 대군을 호령하며 정벌에 나섰던 황제가 이제는 밤마다 옛날 아내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 정벌에 실패한 것보다 더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남편들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아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밥 해다 바치고 빨래 착착 해 주니까 아내를 말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는 종처럼 생각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아내를 무시하고 또 조금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하면 화를 내잖아요. 자기 도우라고 아내를 주셨으면 그 아내에게 감사하고 아내를 존중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거지요. 만약 그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 겁니까? 저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못마땅하게 생각될 때나 아내에게 화가 날 때가 있거든요. 그러다가도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 눈앞에 캄캄해져요. 그러면서 이런 설교를 하려니 양심이 많이 찔리네요.

전쟁에서 실패하고 돌아와서야 아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아하수에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바로 그 때가 바로 가장 아내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남편들이 승승장구 성공하고 잘 나갈 때는 아내가 중요한 줄 몰라요. 옛날 이야기들에 보면 조강지처를 버리는 때가 언제이던가요? 크게 성공했을 때잖아요? 어려운 상황에서 고시공부한다고 고생할 때 옆에서 정성껏 수발들고 도와주는 여자에게 꼭 합격해서 호강시켜 주겠다고 골백번도 넘게 약속을 해 놓고, 막상 합격하고 나면 고관대작집에서 들어온 혼사 놓칠세라 전에 사귀던 여자 차버리는 이야기 많잖아요? 실제로 그런 일들이 얼마나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 포맷이란 말이지요.

남편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아내가 어디 있겠어요? 다 성공하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남편이 성공하면 아내 중요한 줄도 모르니 이걸 어찌합니까? 남편이 실패하면 아내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래야 아내 중요한 줄을 아니 참 괴로운 일 아닙니까? 그렇다고 남편이 실패하기를 바랄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남편이 성공도 하고 아내 중요한 줄도 알 수는 없을까요? 왜 없겠어요? 그렇게 하면 되지요. 아내는 남편을 돕기 위해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남편의 성공은 아내의 도움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내가 중요한 것을 더 알아야지요. 꼭 실패하고 나서 아내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자, 그렇게 철저하게 실패를 한 후에 아하수에로는 쫓아낸 아내가 그리워서 다시 불러오기를 원했습니다. 와스디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했다는 것은 그 조서를 취소하고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러고 있는데 신하들이 와서 하는 말이 전국에서 아름다운 처녀들을 다 불러 모아 후궁으로 삼은 다음 가장 왕의 마음에 드는 처녀를 뽑아 왕비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참 기특한 신하들입니까? 외로움에 지친 왕을 위해 신하들이 나서서 왕의 혼사를 챙기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의 첫 자리에 앉은 사람들입니다. 왕에게 아첨하며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란 말이지요. 그리고 왕비를 쫓아내도록 왕을 부추기고 일을 꾸몄던 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만약 쫓겨난 와스디가 다시 왕비로 복귀하게 되면 이번에는 이들이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와스디의 복위를 반대하지 않겠어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하수에로는 신하들의 말을 따라 그렇게 하기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하수에로는 왕비를 쫓아낼 때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거기에는 법률적인 난제도 있었을 거예요. 당시 페르시아의 법은 한 번 내린 조서는 절대로 취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왕비를 폐위시키면서 취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시했었지요. 그러나 이 에스더 이야기의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그 정도의 조서는 편법으로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대에 들어와 가정이 붕괴되는 사회적 현상은 인류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의 가장 기본단위가 가족인데 가족이 파괴되면 그 사회가 붕괴하는 것 아니겠어요? 가족이 파괴되는 것은 어디에서입니까? 바로 부부관계지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깨져서 가족이 파괴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 중요한 줄을 알고 사랑할 때 가정은 파괴될 일이 없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가정이 파괴되는 주요 이유가 남편이 아내를 올바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주신 것은 남편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 중요한 줄을 모르면 그 가정은 유지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얼마나 건강하고 튼튼합니까? 그것은 바로 남편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옛날 안성기 나오는 무슨 커피 광고카피가 그랬지요?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고. 광고가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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