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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스더가 예뻤던 까닭은? (에 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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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가 예뻤던 까닭은? (에 2:5-11)

고대 왕정시대에는 왕국에 속한 모든 것이 왕의 사유재산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이야기에 공주를 구해오는 사람에게는 나라의 절반을 준다는 말이 종종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은 힘을 가진 자가 약한 자를 정복하여 그 소유물을 빼앗음으로써 자기 영역을 넓혀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규모가 커진 것이 나라가 되고 왕이 된 것이지요. 왕권이 강력하다는 것은 왕이 그 왕국 내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소유권 주장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면 인간 개체와 그 목숨에까지 소유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즉 왕정사회에서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가 왕의 소유권 주장에 눌려서 전혀 보장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단 말이지요.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와서야 왕권을 제도적으로 제약하고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시민사회가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 들어와서는 왕 같은 특정인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개인 각자가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이 실현되었지요.

따라서 현대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고대 절대군주의 권한과 행위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야기도 그렇지요.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방법은 전국의 관리들로 하여금 예쁜 처녀들을 모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회에서 얼굴이 예쁘다는 것은 아주 큰 가치입니다. 여자들에게는 예뻐진다는 것만큼 큰 소원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강도얼짱이라는 이상한 말도 생기고, 근래에 와서 한국은 성형왕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세계는 예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예쁜 여자를 얻기 위해서 힘도 세야 하고 재주도 좋아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하고 성공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럴 필요가 없지요. 왕은 이미 힘이 있고 성공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쁜 여자가 있으면 그저 소유권을 주장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는 지금 전국의 모든 예쁜 여자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마다 얼굴이 예쁜 처녀는 모두 왕의 후궁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부모의 동의도 필요 없습니다.

얼굴이 예쁘다는 가치에 의해서 왕의 여자로 선택된다는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한 명의 왕비를 뽑기 위해 수많은 처녀들이 무더기로 모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택되지 못한 처녀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곳으로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후궁에서 생과부로 살아야 합니다. 예쁘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가 버림받은 인생이로군요. 차라리 예쁘지 않았으면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인데, 왕 한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의미 없는 희생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죄악 아닙니까?

그래서 예쁜 처녀들을 징발하는 관리들이 마을에 들어올 때 딸 가진 부모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물론 왕비가 될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기뻐했을 부모도 있었겠지만, 딸을 감추느라 가슴을 졸인 부모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 처녀들이 왕명으로 징발당해 떠나게 됨으로써 파괴된 관계들은 얼마나 많았을까요? 내일 모레 결혼날짜를 잡아놓고도 예쁘다는 이유로 관리에게 끌려가다시피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처녀들도 많았을 거란 말이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가슴에 멍이 들게 하는 일이었지만, 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아주 당연한 왕의 권리쯤으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것은 반인륜적인 폭거입니다. 이처럼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보는 눈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이런 사건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아주 불합리하고 비인도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하나님은 지금의 우리처럼 왕의 폭거와 비인격적으로 징발당하는 처녀들의 운명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시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화는 하나님의 뜻과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방인의 땅 페르시아 제국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문화를 뒤엎으시면서 자기 뜻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못마땅하지만 그것을 참으시면서 그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문화적 요소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 산다면 하나님이 묵과하고 넘어가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충분히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른 체했다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몰랐다면 책임을 면할 수가 없겠지요.

오래 전에 미국의 노예해방을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백인 목사가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설교를 하는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을 내리셔서 많은 노예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예제도는 폐지해야 할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맞는 얘기입니까? 물론 사도 바울도 노예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노예해방을 쟁취하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시대나 사도 바울 시대는 하나님이 묵과하실 만큼 사람들의 의식과 계시의 수준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시대에는 노예제도가 매우 악한 제도라는 명확한 인식이 발달되었습니다. 노예제도로 얻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그것을 부인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첩을 거느렸고 하나님이 그것을 막지 않으셨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 우리 윤리의 표준으로 채택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비록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문화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아내를 넷이나 둔 것을 막지 않으셨어요.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용납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에게 하와라는 한 명의 아내를 주신 하나님의 가정설계에 위반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의 네 아내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일부일처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네 명의 아내를 얻으며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야곱의 예를 들면서 아내를 넷 갖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뜻에 분명히 어긋나는 문화와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대로 일하십니다. 에스더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문화를 이루고 있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실 이야기 가운데 한 유다인이 등장합니다. 이 모르드개에게는 친딸처럼 기르는 조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에스더입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왕이 찾고 있는 예쁜 처녀의 범주에 들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폭거와 수많은 처녀들의 슬픈 운명이라는 좋지 않은 문화적 상황을 사용해서 그 속에서 자기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유다인 처녀 에스더를 누구보다도 아리따운 처녀로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상황을 묵과하시고 또 그 상황을 이용하셔서 자기 뜻을 이루셨다고 해서 우리가 아하수에로의 폭거를 용납하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아하수에로가 왕비 와스디를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에스더가 새 왕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국의 예쁜 처녀들을 모조리 불러오는 방법으로 해서 새로운 왕비를 뽑지 않았다면 보잘것없는 유다인 고아 처녀 에스더가 무슨 수로 왕비가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에스더가 왕비가 되지 않았더라면 유다인의 몰살을 막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하수에로가 와스디를 억지로 폐위시킨 것이 잘한 것입니까? 그 방법에 의해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으니까 수많은 처녀들을 잡아오다시피 데려온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단 말이지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너무 이기적인 또는 팔이 안으로 굽는 판단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주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예를 들면 어떤 정치인이 뇌물을 많이 받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교회의 장로예요. 이런 경우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 장로를 옹호하고 비리를 감싸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니까요. 아하수에로가 와스디를 쫓아냄으로써 에스더가 새 왕비가 되도록 했으니까 에스더의 편에서 보면 와스디를 쫓아낸 행위가 아주 자연스럽게 미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치인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장로이고 나도 하나님 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비리를 우리가 나서서 덮어주고 감싸야 한다는 잘못된 공감대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형성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일을 종종 보지 않습니까? 교계의 이름 있는 지도자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형벌까지 받게 되었을 때, 교계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구명운동을 한다거나 교인들이 떼로 몰려가 데모를 하는 일들 많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까?

모르드개가 딸 같이 기른 에스더가 수많은 후궁의 무리에 섞여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의 수하에 들어갔는데, 그 많은 처녀들 중에서 에스더가 헤개의 총애를 얻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쩌면 그 많은 처녀들 중에서도 에스더가 가장 예뻤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너그럽고 온순한 성품으로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사촌오빠의 손에서 자란 이 소수민족의 처녀가 온 나라에서 뽑혀온 예쁜 처녀들 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이것은 확률 게임이 아니에요. 우연도 아닙니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일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온 요셉이 그 집주인 보디발의 총애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갔지만 거기서도 교도소장의 총애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러 다른 이유를 찾으려고 하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확률이나 우연으로 설명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총애를 받은 이유는 간단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큰 무리로 만드시려고 애굽으로 보내시려고 요셉을 먼저 보내셔서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이 어디를 가나 총애를 얻고 형통할 수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페르시아 제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다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에스더를 왕비로 뽑히게 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그 준비과정에서부터 에스더가 총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에 우리의 삶을 의탁할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슨 숙명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문화적 시대적 상황에서든지 당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가 그렇게 염려하고 불안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이 악하고 문화가 사탄적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일 못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떤 상황이라 할지라도 에스더를 왕비가 되게 하실 수도 있고, 그것이 필요 없으면 이름 없는 소수민족의 처녀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는 믿음으로 담대하고 힘있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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