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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욕망의 덫 (에 02: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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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덫 (에 2:19-23)

세상에 끝이 없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인간의 욕망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세상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욕심이 있으니까 힘들어도 악착같이 살아가는 것인지 모릅니다. 만약에 욕심이란 게 없다면 인간의 행동은 그 추진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나태하고 나이브한 삶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삶의 추진력으로서의 욕심의 도를 넘어 결코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솟아나는 욕망에 도달하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파괴시키는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더 행복해지겠다는 것인데, 과도한 욕심은 우리를 결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욕심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다가 목표했던 것을 성취한 순간에는 행복을 맛보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것,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성취했던 행복은 사라지고 새로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행복의 추구는 지속적인 불행이라는 아주 상반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19절에 보니까 처녀들을 다시 모았다고 했어요. 이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왕비 콘테스트에서 탈락해서 후궁에 들어가 있는 처녀들을 다시 모았다고 하는 해석도 있는데, 문맥상 또는 사용된 단어의 용례에 의해 별로 지지받지 못하는 해석입니다. 와스디를 왕비로 뽑을 당시에 처녀들을 모았던 것이 첫 번째이고, 이번에 에스더를 왕비로 뽑았던 것이 두 번째 사건을 가리킨다고 하는 해석도 있는데,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설득적이지는 않습니다. 보다 타당한 해석은 아하수에로 왕이 새로운 후궁들을 뽑기 위해서 또 예쁜 처녀들을 불러 모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도대체 인간의 욕망은 그 정체가 무엇일까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온 나라를 이 잡듯 뒤져서 예쁜 처녀는 모조리 데려온 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처녀들을 불러 모으는 걸까요?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그렇게 잡아오다시피 데려온 처녀들을 왕이 거들떠보기나 해요? 겨우 하룻밤 데려다가 즐기고는 평생 생과부로 늙어죽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한 인간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위해서 수많은 영혼이 의미 없이 희생된다는 것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군요. 이처럼 욕망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까지 파멸시키는 악입니다.

우리는 아하수에로 왕의 욕망을 비난하고 그에게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이 아하수에로의 욕망보다 크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하수에로가 했던 일들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에게 허용되지도 않고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런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하수에로에 대하여 도덕적인 우위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아하수에로의 끝없는 욕망을 보면서 우리의 욕망의 정도는 어떤 것이고, 그 욕망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올바로 파악해서 통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델로가 있지요? 오델로는 매우 유능하고 성공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녀의 부추김을 받고서 그는 욕망에 사로잡힌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았다가 결국 자신도 파멸에 이르고 맙니다. 오델로의 욕망은 모든 사람의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그가 성공한 장군으로 만족하고 왕에게 충성스러운 신하로 남았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모든 파멸의 근저를 보면 거기에 욕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새벽별처럼 빛나고 영광스러웠던 천사 루시퍼가 사탄으로 타락한 이유는 바로 욕망을 따랐기 때문이었지요.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만 금지된 열매를 먹었던 아담과 하와의 행위 역시 욕망을 이기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욕망은 불평과 불만을 낳고, 분노와 시기를 거쳐 공격적인 성품을 만들어냅니다.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감사입니다. 만족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마음도 늘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은 모든 일에 자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했다고 했어요. 즉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인데, 그 비결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욕망이라는 치명적인 사슬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고 넉넉하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결심한다고 욕망을 이길 수 있던가요? 욕망은 달콤하거든요. 행복과 기쁨을 약속하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해서 파멸시켰다는 바다의 요정 사이렌과도 같습니다.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욕망이 고개를 쳐들고 올라올 때 그것이 사탄의 목소리라는 것을 재빨리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을 거부하고 이겨냈을 때 우리가 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아닙니까?

자, 여기 보니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다고 했군요. 이 때는 에스더가 왕비가 된 후 약 4년이 지난 다음이었는데, 대궐 문에 앉았다는 것은 고위 관직에 올랐다는 뜻입니다. 고대에 성문은 그 성의 오피스입니다. 거기서 재판이 이루어지고 행정이 집행됩니다. 모르드개가 이처럼 고위 관직에 오른 것은 물론 왕비 에스더의 영향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니까 새로운 왕비를 축으로 해서 신흥 권력집단이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왕조를 보더라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닙니까?

궁중은 살벌한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새로운 왕비의 간택과 함께 신흥 권력집단이 등장했다면, 몰락하는 권력집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몰락하는 권력집단은 그 열세를 회복하기 위해 극약처방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빅단과 데레스의 왕 암살 음모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명확한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학자들은 이들의 왕 암살 음모가 와스디의 폐위와 에스더의 왕비 간택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에스더의 왕비 간택이 모르드개라는 신흥 세력의 등장을 가져왔다면, 와스디의 폐위는 어떤 권력집단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이들은 와스디가 복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터인데, 에스더가 새로 왕비가 됨으로써 그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지요. 거기다가 에스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력집단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쫓겨난 왕비의 세력이 새로 들어온 왕비의 세력과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아예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을 살해하고 새로운 권력질서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음모가 모르드개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우연히 암살자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문을 지키는 왕의 내시는 문지기가 아니에요. 왕의 신임을 얻고 가장 지근거리에서 왕을 보필하는 신하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가 튀기는 궁중 내의 권력싸움에서, 그리고 고도의 정보전에서 모르드개의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아하수에로가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많은 적을 만듦으로써 신분이 그리 안전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일이 있고 나서 14년 후에 아하수에로는 환관이었던 아라타부누스 일당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힘이 있다고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적을 만들지 않아야 안전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테러리즘입니다. 과거에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세계가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싸웠었지요. 비슷한 두 세력이 싸웠기 때문에 어느 한 편에게 전쟁과 평화의 책임을 묻기가 곤란했고 서로가 스스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양극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이라는 단일체제로 세계질서가 재편성되면서 이제는 테러리즘이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과거 양극체제에서는 서로가 맞짱을 뜨는 관계였는데, 이제는 절대강자가 군림하게 되어 정면승부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테러거든요. 아무리 힘이 있다 해도 숨어서 달려드는 테러범이나 자살특공대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아하수에로가 늘 암살 위험에 처해 있었고, 결국에는 암살을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지요.

물론 에스더는 페르시아 궁중의 권력투쟁을 소개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그 권력투쟁의 한 축으로 보는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백성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모르드개를 보세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적발해서 왕의 목숨을 구했단 말이지요.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에서는 권력투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반대파의 숙청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르드개의 성품과 처신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고, 그래서 성도의 대표선수 격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모르드개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언급이 됩니다만, 이 사건으로 모르드개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권력투쟁의 관점에서 본다면 반대파의 숙청 자체가 가장 큰 보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에서는 그런 관점이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왕의 목숨을 구한 것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크게 상을 받아야 할 일인데 그냥 지나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모르드개 개인의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불공평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헌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할 때 분노합니다.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만큼 참기 어려운 일도 없을 거예요.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를 진척시켰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자기는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헌신했는데 안수집사 투표에서 떨어지면 열 받아서 교회 옮겨버리지요?

모르드개가 이 일로 속이 상하고 억울하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세요. 아하수에로 왕이 암살범들을 적발한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고 지나간 것이 나중에 보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극적인 역전의 전환점을 이루어졌거든요. 만약에 모르드개가 큰 상을 받았더라면 정말 큰 일이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보기에는 불합리하고 정당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스케줄 속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보기에 합리적이고 공평한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 방식을 따른다면 모르드개는 소송을 걸고 상소문을 올려서라도 포상을 받도록 해야겠지요. 그러나 모르드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가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그대로 지나가지 않았겠지요.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로는 억울한 일도 있고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늘 바보처럼 당하고 살라는 말은 아니지만, 당하지 않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더 큰 유익이 된다는 것, 바로 하나님의 계산 방법입니다.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한 것이 더 큰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저축해 두신 일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일인데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 공평하신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지 않겠어요?

혹시라도 억울함이나 부당함으로 고통을 받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히려 더 완벽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욕망을 이겨낼 수 있게 되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자기 몫을 챙기고 자기주장을 앞세우기보다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하나님의 보상을 더 사모하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넘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비록 우리 생각과 계획대로는 일이 진행되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선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도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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