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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나지 않은 전쟁 (에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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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에 3:1-6)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참 좋겠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 좋은 일이라는 것도 아주 상대적입니다. 사실은 안 좋은 일인데 좋은 일로 착각할 수도 있고, 좋은 일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나에게 아주 좋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좋지 않은 일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인생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 섞여 있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언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이 흐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있다고 아주 기뻐할 것도 못되고, 괴로운 일이 있다는 것도 낙심하고 인생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일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며 자만하지 않고, 괴로운 일은 괴로운 대로 인내하고 견디면서 내일을 소망하는 것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페르시아의 궁궐에서 에스더는 왕비가 되고 모르드개는 고위 관직에 올랐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라야 했던 설움을 다 씻어주고도 남음직한 일입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삼촌의 딸을 데려다가 자기 딸처럼 길렀던 정성이 보상을 받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우리 인생이란 말이지요. 그렇게 좋은 일을 만나 이제 살 만하게 되었다 하고 있던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일이 닥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은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하만을 중용해서 높은 자리에 앉힌 사건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왕의 모든 신복들은 하만에게 꿇어 절하도록 왕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하만의 지위는 총리의 자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일이 어찌되려고 그랬는지 모르드개는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왕의 명령을 불복종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상관이 된 하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본 동료들이 그러지 말라고 자꾸 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까 자기는 유다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커지지요. 지금까지는 모르드개에게 호의적이었던 동료들이 등을 돌리고 그 사실을 하만에게 일러바쳤습니다.

하만이 처음에는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나 봅니다. 그런데 그 보고를 받고 유심히 보니까 자기가 지나갈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엎드려 절을 하는데 모르드개만 꼿꼿이 서서 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하만의 분노가 끓어올랐는데, 당장 모르드개를 잡아다 처형을 해야겠지만 그것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아서 모르드개의 민족인 유다인 전체를 몰살시키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만도 무척 악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아주 무자비하고 거만함으로 눈이 먼 사람입니다. 거만함이 극에 달하면 눈이 멀어서 이것이 해야 될 일인지 하지 말아야 될 일인지 판단을 못하게 됩니다. 자기만 다 옳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고 했어요.

어떤 사람에게 권세와 힘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 &44456;세를 가지고 남을 돕고 선한 일을 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하든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력형 비리라는 말 우리가 질리도록 들어왔지 않습니까?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나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책임과 선택이란 말이지요. 그리고 그 선택은 그 사람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를 매우 악하게 사용하는 하만은 그래서 악한 사람이라는 평가에 합당하지요. 아무리 고대사회라지만 자신에 대한 쓴소리나 비판, 또는 반대를 전혀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분노와 보복의 범위를 한 민족의 몰살로까지 확대시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악함과 잔인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권세가 합당하지 못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강도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아서 많은 희생자를 낼 뿐입니다. 돈도 올바로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그 돈이 가치를 다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쩌자고 모르드개는 그렇게 죽을 짓을 했을까요? 그렇게 악한 하만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자기 동족 모두를 죽이게 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모르드개는 왜 하만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했을까요? 그것이 자기 목숨을 걸고 온 민족의 운명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을까요?

이 사건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면 모르드개는 매우 어리석은 짓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하만이 자기보다 아래 사람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상관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존심이 상해서 절하지 않았거나, 또는 자기는 왕의 목숨을 구했는데도 아무런 상도 못 받은 반면에 아무 잘한 것도 없는 하만이 높은 자리에 등용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민족 전체의 몰살을 초래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명백한 모르드개의 잘못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의 상상력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동료들이 모르드개를 설득해서 하만에게 절하도록 하려고 했을 때, 모르드개가 자신이 절할 수 없는 이유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유다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지금까지 유다인이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는데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신분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그것이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인이라는 것이 하만에게 절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꿇어 절하는 것은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한다는 계명을 어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과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절하는 것은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사람들 역시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절함으로써 합당한 존경의 표시를 했잖아요.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 매장지를 내준 헷 사람들에게 몸을 굽혔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인 줄도 모르고 요셉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권력자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신적인 경배를 요구한다면 곤란하겠지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지면서까지 왕의 명령을 거부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게 경배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박해를 받고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은 로마의 황제들이 자기들을 신으로 떠받들라고 하는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만에게 꿇어 절하는 것은 그런 성격의 신적 경배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은 권세에 대한 불복이 아니라 유다인으로서 하만이라는 특정인에게 절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거란 말이지요.

자, 그럼 하만이 어떤 사람인지 봅시다. 1절에서 그는 아각 사람이라고 했지요? 아각의 후손이라는 뜻인데, 아각이 누구인지 보기 위해서 사무엘상 15장으로 가 봅시다. 8절을 보면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만은 아말렉 족속의 왕이었던 아각의 후손이었단 말이지요.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매우 성공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사사시대 동안에 늘 이스라엘을 짓밟고 괴롭히던 블레셋과 전쟁을 해서 큰 승리들을 거두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아말렉 족속을 멸망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2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행한 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번에는 출애굽기 17장으로 가서 봅시다. 8절에서 16절까지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한 후 처음으로 전쟁을 치렀던 이야기입니다.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전쟁을 걸어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해 가시는데, 그것을 가로막고 전쟁을 걸어왔다는 것이 하나님께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도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16절 보세요.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말렉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떠나서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범죄하고 신실하지 못한 것 때문에 나라가 망해서 이 먼 타국까지 끌려왔던 포로의 후손으로 살면서 뼈저리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신실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살고 있던 모르드개로서는 죽었으면 죽었지 아말렉 족속인 하만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만 역시 아말렉 족속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원한의 감정이 사무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모르드개 한 사람만 죽이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유다인 전체를 죽이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모르드개와 하만 사이의 개인적인 감정 다툼이 아니라 출애굽 때부터 시작된 두 민족 간의 싸움인 것이고, 하나님과 그 앞을 가로막는 사탄 사이의 충돌이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여기 페르시아 궁중에서까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싸움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최후의 승리를 선포하시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내리신 임무는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를 이 땅에서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왕을 생포해 왔어요. 전쟁에서 왕을 생포한 것만큼 큰 전리품이 어디 있겠어요? 사울은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려고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들을 노획물로 가져왔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수를 멸망시키려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신데, 사울은 그것보다 자신의 왕위를 든든히 하는 것과 재물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보시고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사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사울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 아닙니까? 여기 나오는 모르드개 역시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 후손인 모르드개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만일 사울이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했더라면 후대에 모르드개가 이런 수모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원수인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이번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인 모두가 진멸을 당하게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혹은 일을 그르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사울과 모르드개는 55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넘어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불순종함으로 인해서 수천 년이 지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했습니다. 십자가는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우리는 언제 어떻게 누구와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당장 우리 자녀들이 나의 못된 성품과 나쁜 버릇을 닮게 될 수도 있고, 부모의 욕심이나 잘못된 교육방법이 자녀들의 미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 자신의 욕심에 끌려 행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잘못을 책망하는 사무엘에게 사울은 변명하고 핑계를 대기에 바빴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반성하기보다는 백성들 앞에서 왕의 위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어요. 결국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에게 무릎을 꿇느니 차라리 목숨을 잃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전략적으로 유다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지만, 하만에게 절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모처럼 오른 고위관직을 잃는다 해도 미련이 없습니다. 이처럼 모르드개의 행동은 사울의 행동과 달랐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숨도 구하고 원수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신실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은 결코 넘지 않고 타협하지 않아야 할 것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그것은 커다란 불이익과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희생을 치른다 해도 하나님의 원수인 아말렉 자손의 후손에게 절하지 않고 버텼던 모르드개의 꿋꿋한 기개와 믿음이 우리에게 귀한 귀감과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아야겠다는 믿음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고후 4:8-9)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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