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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새싹 (에 0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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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개업을 하거나 이사를 하면 고사를 지냅니다. 정보화시대를 이끌어간다는 최첨단 기업들이 중요한 행사를 치르면서 돈을 입에 물고 있는 돼지머리 앞에 두고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면 참 묘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동차를 새로 사면 고사를 지내더군요. 그렇게 고사를 지내는 이유는 물론 사고가 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겠지요. 그들은 과연 누구에게 사고가 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비는 걸까요? 저는 우리나라 무속신앙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왜 돼지머리가 절을 받는지도 모르겠고, 그 돼지머리로 상징되는 숭배대상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그 숭배대상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던 사람들이 고사를 지낼 때만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불연속적인 신앙의 행태와 시스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고사에서 절을 받는 그 초월적 존재를 믿지도 않고 염두에 두지도 않고 삽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일이 있거나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는 믿지도 않는 어떤 허구적인 존재에게 고사를 지낸다면 그 요행심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입니까?

어쨌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 밖에 있는 영역에 관해서 어떤 초월자의 힘에 의지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스트레스가 큰 일입니다. 자칫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가는 낭패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결정을 신에게 위임하곤 합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신에게 위임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던 방법이 바로 제비뽑기였습니다. 날짜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한 결정이지요. 우리 사회에서도 이사는 손 없는 날을 택해서 하지 않습니까? 하만으로서는 페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유다인을 학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고, 그 일을 위해서 특별한 날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이 거사일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교적 세계관과 신앙체계를 반영하는 행동인 것이지요.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신이 선택해 준 날짜를 하사받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때가 정월이었는데 제비를 뽑아보니 십이월이 나왔습니다. 확률이야 12분의 1이지만, 대단히 의미 있는 결과가 아닙니까? 학살을 당하게 된 유다인들이 최대한의 말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만약 유다인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루라도 늦춰진다는 것은 자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이 11개월 동안 유다인들은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대비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고 했습니다.

하만이 유다인을 전멸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다인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제삼자가 보더라도 유다인들은 버림을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거나 혹은 그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가서 낮잠이나 주무시는 걸까요? 하나님은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에 흩어져 사는 자기 백성을 이제 잊으신 걸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만이 자기 백성을 멸하려는 날짜를 택하는 일에도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그 백성을 향한 자비와 연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는 싸인입니다. 절망 가운데서 어찌할 줄 모르는 유다인들에게 그것은 희망의 시작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이 다가온다는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겨울 동안에 나뭇가지는 모두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 나무에서 다시 잎이 나고 열매가 열릴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었을 때 그 나뭇가지 끝에 매우 작은 싹 하나가 났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무성한 나뭇잎들과 탐스러운 열매들을 약속하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온 민족이 멸절하게 된 참담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그 학살의 날이 최대한 미루어졌다는 사실은 바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약속하는 새싹이었던 것입니다.

헝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 소망의 새싹을 많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까짓 작은 싹 하나를 보고 어떻게 울창한 녹음을 기대할 수 있겠어? 하면서 믿지 못할 때가 많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씨앗에서 커다란 나무가 나옵니다. 그 작은 씨앗을 커다란 나무와 동일시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에요. 꼭 손에 쥐어줘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우리의 삶이 고달프고 세상이 원망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위기가 닥쳤을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면 우리가 사는 모습이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저도 요 며칠 이런 저런 일들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나의 믿음이 얼마나 적은 것인지 한숨이 나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데,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적을 때는 세상이 우리를 갖고 놉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날 때 세상이 우리를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비의 결과에 어쩌면 하만은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모르드개와 그 민족을 몰살시켜버리고 싶은데 1년 가까이 그 꼴을 보고 참으려면 그것도 작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쩝니까?

이제 하만은 왕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일을 꾸밉니다. 주님은 사탄을 가리켜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8:44)라고 하셨습니다. 하만 역시 살인을 꾸미며 거짓말을 합니다. 하만은 유다인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한 민족이 왕의 나라에 흩어져 거한다고 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유대인에게 매우 가혹했지만,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을 돌려보내 나라를 재건하게 하고, 느부갓네살이 약탈해 왔던 성전의 기물도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만은 유다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자기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었습니다. 그것도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적인 침묵이고 하만의 경우는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악한 침묵이라는 점에서 동일시될 수가 없지요.

유다인들의 법이 만민과 다르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만민과 달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고소를 당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만은 이 팩트에다 자신의 편견과 거짓을 덧씌워서 고소를 합니다. 만민과 다른 법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뭔가 하면 모르드개라는 한 사람이 하만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 한 가지를 어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만의 고소는 모든 유다인이 왕의 모든 법률을 어긴다는 것이지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가 되어 끌려갈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 4:7). 포로로 잡혀가서 반란 일으키지 말고 평화롭게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만은 이처럼 거짓말로 살인을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서 뇌물을 씁니다. 왕에게 은 10,000달란트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페르시아 제국의 연간 세수가 15,0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0,000달란트라면 어마어마한 액수 아닙니까? 그러니 왕이 거절하겠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민족이 어떤 민족인지 묻지도 않고 당장 자신의 반지를 빼 주면서 허락을 합니다.

왕이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한다고 말한 것을 보고 그 은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동양에서는 준다고 덥석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한두 번 사양하는 것이 에티켓이지요.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로 쓰기 위해 헷 족속에게 땅을 사면서 땅값을 주겠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몇 번이나 안 받겠다고 사양을 하지 않습니까?(창 23장) 그런데 진짜로 안 받는 줄 알고 안 주면 곤란하지요. 옛날에 우리 풍습도 그랬습니다. 손님이 오시면 식사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그럼 손님은 먹고 왔다고 대답하지요. 그 말을 듣고 주인은 곧 밥상을 내옵니다. 지금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오해가 쌓여서 인간관계가 이상하게 되겠습니다만, 그것이 옛날의 의사소통 방법이었어요. 왕과 하만의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하만에게 그 은 안 받겠다고 했으니까 하만이 은을 안 냈을까요? 4장에 보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 기가 막힌 일을 전하면서 하만이 왕에게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언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그 은을 너에게 준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단 말이지요. 하만이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다인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면 그것으로 왕에게 바치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다인을 학살하라는 조서가 왕의 이름으로 발행되고 전국에 반포됩니다.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페르시아는 효과적이고 빠른 통신을 위해서 약 8km마다 역관이 있어서 말을 타고 릴레이식으로 소식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악하고 끔찍한 계획이 온 나라에 아주 빠르게 퍼지고 백성들은 근심하며 성은 어지러운데 왕과 하만은 앉아서 술을 마십니다. 정말 악한 상황 아닙니까? 백성들만 불행하고 불쌍하지 않습니까? 춘향전에서도 탐관오리를 꾸짖는 시가 있지요?

金樽美酒 千人血 금준미주 천인혈
玉盤佳肴 萬姓膏 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 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 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담긴 맛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대에 촛물 흐를 때 백성의 눈물 흐르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 높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해 수고하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엊그제 국회에서 대통령의 탄핵을 결의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 지금까지 누려오던 특권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국민이 탄식하든 말든 나라가 어지럽든 말든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는 소위 국민의 대표자들을 보면서 우리 국민도 참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페르시아 제국의 백성들 불쌍한 거야 옛날 이야기라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 우리 국민들의 불행을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불행을 막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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