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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이 무너질 때의 행동수칙 (에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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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질 때의 행동수칙 (에 4:1-3)

저는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아주 극단적인 위기를 겪은 적이 없습니다만, 세상을 오래 살고 적게 살고와는 상관없이 그런 기가 막힌 일을 겪은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말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너무 기가 막히고 압도되어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감정의 마비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정신이 돌아오고 상황이 파악되면 분노나 슬픔이 이어집니다.

모든 유다인을 학살하라는 왕의 조서가 반포되었을 때 유다인들이 느꼈을 정신적인 공황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포용정책에 의해 상당한 특혜를 누리던 유다인들로서는 하만이 만들어 반포한 조서를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슬피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특히 모르드개는 고위 공직자로서 유다인들의 일종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사건이 자신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잘 알았기 때문에 더욱 분통하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한 것은 다른 유다인들과 함께 그 충격과 슬픔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각 도마다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유다인이 무수했다고 했거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저 슬피 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은 많은 분량에 있어서 감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이라는 것은 정확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습니다. 잘못된 판단과 거짓된 정보에 의해 감정이 폭발하기도 합니다. 또 감정은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방해합니다. 물론 우리가 늘 감정을 콘트롤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감정에 끌려 사는 사람은 아주 인생이 고달픕니다. 그래서 감정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 하는 것은 얼마나 건강한 삶을 사느냐 하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다른 차가 위험하게 옆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고 칩시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그 다음에는 화가 많이 나겠지요. 그런데 이 분노의 감정이 과도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차를 쫓아간다든지 아니면 욕을 한다든지 하겠지요. 그리고 그 분노와 흥분의 감정이 지속된다면 운전하는 데 큰 위험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초보 운전자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분노보다도 불안에 사로잡혀서 계속 운전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아주 부정적인 방향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억누르고 표출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 감정을 없애버릴 수도 없습니다. 지금 온 민족이 몰살을 당하게 된 형편에서 감정을 억누르거나 그것을 없앤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감정이 폭발하고 솟구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감정은 또 다른 극단적인 행동이나 사고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참을인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치유심리학에서도 분노를 다루는 방법으로 열까지 세는 것이 있습니다. 참을인 자 세 개와 비슷한 방법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방법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과 함께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입니다. 가령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아났다고 합시다. 바로 그 순간에, 그러니까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또는 분노가 다른 행동으로 연결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그 분노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분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노가 합당한 것인지, 그 분노가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분노가 나 자신의 영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또 그 분노의 대상에게는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하나님의 대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이 분노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우리 에스더가 갑자기 피아노 반주를 못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달래도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은 다가오는데 빨리 한 번이라도 더 연습을 해야 할 텐데, 못 하겠다고 버티니 얼마나 조바심이 나고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겠습니까? 이거 생각 같아서는 한 방 쥐어박든지 해서 저의 분노를 해소시키고도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노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망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분노를 다스려 주시라고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가만 따져보면 물론 제가 분노할 이유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에스더가 반주를 못 하겠다고 하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애가 좀 철이 들었다면 물론 그런 일도 없겠지요. 충분한 판단능력이 없는 아이를 향해서 분노를 갖게 되고 그것이 예배를 망치게 된다면 매우 잘못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반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끌고 갑니다.

요나의 경우를 보세요. 니느웨 성이 어떻게 망하는지를 보려고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는데 날이 너무 더워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박넝쿨 하나가 자라더니 금방 요나의 머리 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대단히 기뻐했는데, 그 다음날 벌레 한 마리가 박넝쿨을 갉아먹으니까 금방 시들어버렸습니다. 거기다가 뜨거운 바람까지 불어오니 요나는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분노가 솟아올랐던지 차라리 날 죽여주시오 하면서 하나님께 대들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너의 분노가 합당하냐?” 요나는 화가 나서 죽더라도 그 분노가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십이만 니느웨 백성의 생명이 다 멸망당하기를 기다리면서 박넝쿨 하나 죽은 것 가지고 분노하는 것이 어떻게 합당할 수 있느냐고 하나님이 되물으십니다. 요나의 분노는 전혀 합당하지도 않고 정당성도 없지만, 요나는 죽어도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차분히 그 분노를 분석하고 원인과 결과를 살펴본다면 전혀 합당하지 않은 분노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주 슬픈 일을 당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슬픈 감정을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세요.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억울합니다. 또는 슬픕니다.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내가 슬퍼할 때 하나님은 날 보고 뭐라고 하실까 생각해 보세요. 그 슬픔을 내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슬픈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감정을 다루게 된다면 자기연민에 빠져 사고를 저지른다거나 우울증에 걸린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지 않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이런 방법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과 나누고 하나님과 함께 처리하는 것,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슬픔을 토해내면서 유다인들은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했다는 것은 기도를 동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슬퍼서 식음을 전폐했다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부르짖었다는 것이지요.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장 낮추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의 자세로 요구되는 것은 겸비함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 에스더가 반주를 못 하겠다고 한 것은 어제 하루 종일 굶었기 때문입니다. 40시간 기아체험 한다고 금요일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굶었는데, 그렇게 굶는 것 보니까 참 불쌍하더군요. 금식도 일종의 고행이지요. 스스로 고통을 당함으로써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비함을 멸시치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악한 아합 왕이 말년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겸비한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내리기로 작정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아합이 얼마나 악한 왕이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기로 하셨는데, 그 아합이 하나님께 겸비한 모습으로 엎드리니까 그 재앙을 그 아들의 때로 연기하셨던 것입니다(왕상 21:29).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처럼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유다인이 무수했다는 것은 그 심각한 위기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의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하게 되었을 때, 만약 거기에 다섯 사람만 이처럼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웠더라면 그 재앙을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온 백성이 진멸하게 된 이 위기에서 유다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만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이 위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위기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만이 꾸민 악한 흉계로 온 민족이 전멸하게 된 이 위기를 사용하셔서 그의 백성의 영적 부흥을 가져오셨습니다. 이방인 가운데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이 민족의 정체성과 종교적 신앙을 유지하며 사는 데는 많은 도전과 유혹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를 통해서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합니다. 위기에 눌려서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은 위기를 통해서 더 큰 신앙의 성숙과 아름다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손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위기는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우리를 지치게 하고 파괴하는 악한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사용하셔서 우리의 유익을 만들어내신다면 손해가 아니라 큰 유익이 아닙니까?

무수한 유다인들이 옷을 찢고 굵을 베를 입고 재에 앉아 부르짖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울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모르드개는 뭔가 수습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시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기도만 하고 앉아 있는 것도 옳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애만 쓰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밤새 기도를 하지요. 그 기도는 날이 밝을 때까지 천사와 씨름한 것으로 묘사될 만큼 간절한 것이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렇게 기도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재산을 두 편으로 나누어서 한 편이 공격을 당하면 한 편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 그의 마음을 조금씩 누그러뜨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울고만 있을 수 없어 다시 궁궐로 돌아왔지만 궁궐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은 자는 대궐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권력자들은 굉장히 이기적이고 포용적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을 보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참담한 형편을 전해 듣고 며칠 동안이나 슬피 울며 금식하다가 왕 앞에 나갔더니 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 말에 느헤미야가 크게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느 2:1-2). 왕 앞에서 근심스러운 얼굴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큰 벌을 당할 수 있는 잘못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왕에게는 늘 즐거움과 기쁨만을 갖다드려야 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왕 앞에 우리의 근심이나 슬픔을 가지고 나갈 수 있다는 것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가 슬퍼 흘리는 눈물을 씻어주시는 분을 우리 왕으로 모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우리의 눈물과 고통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우리가 분노하고 짜증을 낼 때는 하나님이 잠시 나가 계시도록 해야 합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 없이 슬픔을 이겨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도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몰래 분노해야 한다면 그것은 악한 분노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어떤 감정이든지 크든지 작든지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과 함께 그것을 극복함으로 정말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 않으세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어렵고 고통스러운 위기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그것에 짓눌려 실패하는 인생이 아니라 오히려 정금같이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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