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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으면 죽을까요? 살까요? (에 04: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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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한국에서 총선이 있었지요? 총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발버둥을 치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과감히 포기하고 스스로를 희생한 곳에서는 극적인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졌습니다. 이것은 선거라는 특정한 사건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법칙이고 진리입니다. 민족을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서 구했던 이순신 장군도 같은 얘기를 했거든요.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다가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사즉생 생즉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면 제 정신으로 살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죽기를 각오하고 나가 싸우면 이길 것이고, 죽기가 두려워 도망치다가는 다 죽는다는 것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급박한 전투를 앞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각오와 결단이 그 순간에 갑자기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성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은 사람은 큰 일에도 충성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일에서 희생하고 실패와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큰 일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담대할 수 있을 것이고, 작은 일에 혹시 손해를 입을까 벌벌 떠는 사람은 큰 일 앞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별 짓이라도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와 희생 없이 더 큰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한 공헌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희생이 없이는 사회의 정의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내 것을 포기하고 내놓는다는 것, 우리의 본성에 거스르는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잘 안 돼요. 하기 싫단 말예요. 그런데 그 포기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욕심 때문일 수도 있고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어요. 그것 때문에 자신이 파멸되고 자신이 속한 사회까지 붕괴되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원숭이 잡는 방법 잘 아시죠? 주둥이가 아주 작은 항아리에 쌀을 넣어 놓습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와서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항아리에 손을 집어넣어 쌀을 움켜쥔단 말이지요. 그런데 좁은 주둥이 속으로 빈손은 들어갈 수 있지만, 쌀을 움켜쥔 손은 빠져나오지 못해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원숭이를 잡으러 다가옵니다. 지금이라도 쌀 움켜쥔 손을 펴면 도망갈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맛있는 쌀, 아까운 쌀을 어떻게 포기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결국 잡히게 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늘그막에 낳은 아들 요셉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몹시 시기하고 질투할 정도로 편애를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랑하는 아들이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슬펐겠습니까? 그 후에 야곱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또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베냐민 역시 라헬이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에 매우 심한 흉년이 들었는데,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들을 보내어 양식을 좀 사오도록 했습니다. 물론 아끼는 베냐민은 보낼 수 없었지요. 한 시라도 베냐민이 곁에 없으면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아들들이 양식을 사가지고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다음 번에 올 때는 반드시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사람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표시로 아들 중 하나가 지금 애굽의 감옥에 붙잡혀 있습니다. 요셉을 잃고 베냐민 바라보는 낙으로 늙은 인생을 사는데, 그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다니 간 떨어지는 소리 아닙니까? 차라리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어떻게 베냐민을 보냅니까? 그런데 사 온 양식이 떨어지고 다시 굶주리게 되자 아들들이 양식을 사러 가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절대 못 가게 하지요.

그렇지만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온 식구가 굶어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아들들이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동생을 잘 보살펴서 꼭 다시 데려올 테니까 제발 보내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결국 야곱은 고집을 꺾고 포기합니다. 그래서 그 애굽의 총리에게 드릴 선물도 준비하고 돈도 두 배나 가져가도록 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그렇지만 사실은 야곱이 베냐민을 보낸다고 해서 그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베냐민이라는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보내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마지막 위로가 되는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두세 살 쯤 되었을 때 베개 같은 것에 무척 집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잠 잘 때 그 베개가 있어야 잠이 들어요. 그것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은 두 살짜리 꼬마의 베개일 뿐이지요. 야곱의 아들 중 하나인 유다는 애굽의 총리 앞에서 말하기를 베냐민의 생명과 아버지의 목숨이 결탁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 베개가 없으면 잠 못 자는 것처럼, 베냐민이 죽으면 야곱도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여기서 야곱이 포기하겠다고 한 것은 베냐민의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장치, 자신의 낙을 포기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야곱이 자신의 안전장치를 포기했을 때, 놀라운 결과를 얻지 않습니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동생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그리웠겠어요? 그래서 그 아버지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들을 잃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며 끝까지 베냐민을 내놓지 않는다면 자기 살기 위해서 모두가 죽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되겠지요.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에스더에게 닥친 것입니다. 지금 거리마다 유다인들이 재에 앉아 옷을 찢으며 통곡하고 있습니다. 이제 몇 개월이 지나면 유다인 사냥이 시작될 것이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다인의 씨는 멸종될 것입니다. 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가 발행되었기 때문에 제국 내의 그 누구도 이것을 해결하거나 이 재난에서 살아날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슬피 울며 고통스러워할 뿐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왕비인 에스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왕에게 나가서 제발 살려달라고 부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뭐 밖에서 보기에는 왕비니까 그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에스더의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말이 왕비이지, 왕을 만나겠다고 왕 앞에 나갔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하수에로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전에도 왕비 와스디를 쫓아냈거든요. 왕이 불렀는데 오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왕이 불렀는데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떤 벌을 내린다는 규정이 없어요. 그렇지만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 앞에 나오는 것은 사형이라는 명백한 규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더는 와스디보다 훨씬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결국 에스더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가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목숨보다도 더 큰 것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아주 쉬운 일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내 목숨 하나가 다른 사람 목숨 백이나 천보다 더 크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철광이 부족해서 고철 수집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도로의 맨홀 뚜껑이 많이 없어진 거예요. 그거 고철 수집하는 데 갖다 주면 3천원을 받을 수 있거든요. 3천원 공짜로 생기니 밤중에 맨홀 뚜껑 벗겨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없어진 맨홀 뚜껑 새로 만드는 데 2만원이 넘게 든다는 것입니다. 국가 돈 2만원보다 내 돈 3천원이 더 크고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도 그것을 위해서 내 재산과 내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다 망하게 될 것입니다. 손해 보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자기 희생하는 사람이 없어서 모두 망하는 거예요.

사즉생 생즉사의 원리는 예수 믿는 데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0:38-39).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욕심 채우는 것, 자기 잇속 챙기는 것,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도 포함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만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보좌를 내놓으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갖기까지, 또한 죽기까지 그렇게 포기하고 희생하셨거든요.

그래서 자기 목숨을 걸고 동족을 구하겠다고 나선 에스더의 결단은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꼭 목숨을 내놓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대로 죽는 것입니까? 뭐 죽을 수도 있겠지요. 이순신 장군도 전쟁터에서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구했습니다. 나라가 살았단 말이에요. 이처럼 죽는 것은 바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잖아요?

형제 자매 여러분, 물론 저 자신도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서 그 이기적인 욕망과 싸우는 것입니다. 나도 내 목숨 아까운 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 목숨이 경제적인 목숨이든 정치적인 죽음이든, 아니면 물리적인 목숨이든, 구차하게 그 목숨 부지하겠다고 비겁하게 도망가다가 나도 죽고 다른 사람까지 죽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지요.

우리가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수도 많아요.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숨을 찾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이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이 믿음과 용기로 참 생명을 얻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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