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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자는 무엇으로 아름다운가? (에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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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무엇으로 아름다운가? (에 5:1-8)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런 말이 있었지요? 무슨 영화 제목인지 연극 제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흥미있는 질문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어떤 역할이나 지위가 주어주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와 반발이 하나의 주요한 사회풍조가 되어 있긴 합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불이익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이기 때문에 더 봐준다거나 여자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해야 된다거나, 이런 얘기를 했다가는 상당히 곤욕을 치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이기 때문에 갖는 특별한 속성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여자가 갖고 있는 것들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꼽는다면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이 말에 대해서도 매우 강하게 반발하겠지만,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든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있든, 많은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를 불문하고 여자와 아름다움을 연계시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여자의 재산이기도 하고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아름다움 때문에 생존할 수도 있고, 아름다움이 파멸의 원인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름다움은 여자들의 세계에서 매우 중요하게 추구되는 가치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고 또한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러한 강력한 흡인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에스더 역시 아름다움으로 생존하게 된 경우입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에 나아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왕의 눈에 심히 사랑스럽게 보인 덕분에 에스더는 목숨을 잃지 않게 되었고 또 왕의 마음까지 얻는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기 위해 왕후의 의관을 정제하고 화장도 최고급으로 했겠지만, 지금 에스더는 사흘을 굶고 나온 여자입니다.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 또 미모의 95%는 화장발이라지만, 어떻게 사흘 굶은 여자가 왕의 눈에 심히 사랑스럽게 보였을까요? 사흘을 굶었으면 얼굴이 핼쑥하고 눈도 퀭하니 들어가 심난하고 불쌍해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다른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가령 에스더가 왕비가 된 후에 살이 쪄서 왕이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는데, 사흘 굶고 나니까 살이 빠져서 왕이 보기에 심히 사랑스러웠다고 억지로 추측할 수도 있겠지요? 또 아하수에로는 우수에 잠긴 여인의 모습을 사랑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백성이 몰살하게 된 사실을 깊이 슬퍼하고 괴로워하던 에스더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였겠지요.

우리가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감상하는 중이라면 그렇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는 그것과는 다른 상상력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말해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시녀들과 함께 사흘을 금식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할 때, 또 모르드개가 온 유다인들과 함께 재에 앉아 금식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그 자리에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에스더와 시녀들이, 그리고 모르드개와 온 유다인들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리에 하나님이 안 계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에스더가 사흘이 아니라 30일을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왕의 눈에는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모든 일을 주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 위에 뛰어나신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은 우리 모임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만약 우리의 모임 가운데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우리의 모임은 가장 허망하고 의미 없고 거짓된 모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모인 자리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사흘 굶은 여자라도 심히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는 은혜와 기적이 임하지만, 하나님 안 계시는 곳에는 거짓과 미움과 갈등만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셔서 진리 안의 자유와 평안이 넘칠 것이지만,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우리의 혼란과 갈등으로 긴장만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 조건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뭘 합니까? 가식적인 미소를 얼굴에 띠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우리 육신의 정욕을 따른 일들을 도모할 수 있습니까? 서로 경계심을 가지고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 우리 가운데 회개가 있고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실 때 사흘 굶은 여자라도 심히 사랑스러워 보이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대두됩니다. 우리의 진짜 아름다움은 날개옷과 화장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의 아름다움의 근원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었고 죽음이라도 무릅쓰고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희생이었습니다. 만일 에스더가 사흘 동안 피부미용에 좋은 음식만 골라 먹고, 명동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얼굴에 그림을 그리듯 화장을 하고, 또 최고급 브랜드 의류와 온갖 명품으로 치장을 한 다음에 왕 앞에 나아갔더라면, 왕의 보기에 심히 사랑스러웠을까요? 궁극적으로 그것은 왕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의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여자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뭐라고 했을까요? 사도는 디모데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 2:9-10).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은 여자들이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하지 말고 선행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선한 행실은 진주목걸이나 명품 의류를 능가하는 아름다움의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에스더가 그렇게 사흘 굶은 몸으로 왕 앞에 섰을 때 아하수에로는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규례를 어긴 것을 용서하는 의미로 금홀을 내어밀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이렇게 되면 게임이 끝난 것 아닙니까? 그렇게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유다인들에게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었겠습니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는데, 유다인 죽이지 말고 살려달라는 부탁 정도야 충분히 허락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에스더는 당장 그 앞에서 자기 민족 살려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왕이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지난 번에도 한번 살펴본 적이 있지요? 왕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만약 에스더가 정말로 나라의 절반을 쪼개서 달라고 하면 아하수에로가 줄까요? 안 줄까요?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아하수에로 왕이 아르타인테(Artaynte)라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이 여자가 진짜로 나라의 절반을 달라고 해서 왕이 아주 난처해했던 일이 있다고 합니다.

무슨 요구든지 들어주겠다는 왕에게 자기 민족 얘기를 꺼내는 대신에 에스더가 하는 말은 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으니 참석해 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즉흥적인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에스더는 이미 오기 전에 잔치를 준비해 두었을 것입니다. 파티를 준비도 안 했으면서 왕을 초대했다가는 낭패를 당하게 될 테니까요. 그런데 보세요, 자기 민족을 몰살시키려고 하는 하만을 왕과 함께 초대합니다. 사흘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웠다는 것입니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준비를 잘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왕과 하만은 각기 서로 다른 기대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왕비의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왕비가 왕궁의 규례를 어기면서까지 자신에게 나아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단순히 잔치에 오라는 얘기를 하려고 목숨을 걸고 나오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지요. 자기가 그동안 좀 무심하게 지내는 동안 왕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슨 고민거리가 있을까? 아니면 무슨 기쁜 소식이 있을까?

대체로 남편들이 그렇게 살잖아요? 바깥일에 바쁘다 보니 집안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이들이 아빠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자라는지도 모르는 수가 종종 있단 말이지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아내가 나타나서 ‘나 도저히 당신하고 같이 못살겠소. 이혼합시다.’ 이런 폭탄선언을 한다거나, 또는 학교에서 연락이 오기를 ‘당신 아들 문제로 상의할 게 있으니 좀 나오십시오.’ 한다거나, 또는 경찰서에서 아들 데려가라는 전화가 온다거나 하는 일을 당하게 되면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지 않겠어요? 아,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나? 내가 얼마나 남처럼 살았는가? 어떤 여자분은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하는 얘기가 남편을 남의 편이라고 부르더군요. 가정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주로 남편들이 가정노릇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 편이 아니고 남의 편이 된 거예요. 그러다가 사건이 터지면 이렇게 말하지요. “갑자기 왜 이래? 지금까지 잘 살았잖아? 왜 갑자기 이혼하자는 거야?” 그런 일이 갑자기 일어납니까? 천만에요. 지금까지 쌓이고 쌓인 것이 폭발했을 뿐입니다. 착하고 성실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사고치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당한 것뿐이지요. 아하수에로는 제국의 황제 노릇을 하느라 바빴는지 모르지만, 가장이 되는 데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입니다. 돈 벌어다주고 출세하는 게 가장노릇이 아니거든요. 가족의 아픔과 마음속의 상처까지 들여다보고 챙기는 것이 가장노릇 제대로 하는 거죠. 정말 우리 편이 돼 주어야 남편이고 아버지인 것입니다. 왕이 될수록, 즉 밖에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는 실패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아요. 그만큼 시간과 열정의 분배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다움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살아갈 때 세상의 어떤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수에로보다 높으신 왕이시고, 세상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간직한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서로 사랑을 만들어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사랑스럽고 뭘 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더욱 사랑을 만들어내서 그 사랑으로 가정이 넘쳐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삶을 꾸미고 그 아름다움을 가지고 함께 복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서 성숙하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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