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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대로 행할것을 맹세하라 (느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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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왜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사는 걸까요? 좋은 것, 싫은 것을 드러내고 살면 어렵고 힘들고 끊임없이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피차 편하기 위해서 가면을 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가면을 씁니다. 자신의 체면 때문에 가면을 씁니다. 자기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성공과 출세를 위해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노란색 가면을 썼다가 상황이 바뀌면 빨간색 가면으로 재빨리 바꿔 씁니다. 세상에서는 가면을 적절하고 재빠르게 바꾸는 사람들을 가리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떨 때 가면을 씁니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인간의 가면은 언젠가 벗겨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면을 쓰고 살았습니다. 종교의 가면, 전통의 가면, 포로 생활의 가면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벽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를 깨닫게 되면서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가면을 벗기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면으로 지키고자 했던 자기들의 삶이 오히려 황폐해지고, 악해지고, ‘회 칠한 무덤’같이 된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본 모습을 보고 견딜 수 없어 울고 또 울며 회개합니다.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가면의 뿌리까지 벗겨냅니다. 철저하게 알몸이 됩니다. 죄와 과거의 실패, 자신의 부족함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고발해서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철저하게 벗은 순간은 기뻤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니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알몸으로는 세상에서 맞는 풍파를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참 모습니다. 알몸으로는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둠을 이기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권세보다 더 강한 장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할 뿐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어둠의 세력보다 더 강력한 전투 장비,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0-13)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지 않고 넉넉히 이길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제3의 율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의로워지려고 해도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한 자신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1-24) 자신이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율법을 통해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동시에 율법은 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율법도, 세상도 여러분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감격이야 말로 우리가 믿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의 삶이 올바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견고한 언약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인간적인 가면을 벗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합니다.
그들이 첫 번째로 취한 전신갑주는 ‘언약’입니다. 9장 38절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인을 친다’는 말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이 말의 뜻은 ‘도장을 찍다’ 입니다. 느헤미야, 시드기야, 제사장, 레위인과 방백들을 비롯해 84명의 지도자들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들이 본래 율법을 사랑해서 도장을 찍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율법을 무겁게 여겼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율법을 벗어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역사는 율법을 배반하는 역사입니다. 이들에게는 율법이 큰 짐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법 중에는 이런 법도 있습니다. “안식일에 머리카락에 붙은 이를 잡는 것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를 잡기 위해서 참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그것은 일이다.” 이들에게 율법은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이 율법에 스스로를 얽매입니까? 지도자뿐만 아니라 율법에 도장을 찍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도 ‘저주의 맹세’를 합니다. ‘저주의 맹세’는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모든 저주를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율법에 맹세를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하는 것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스스로 율법의 종이 되려고 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독일 나치 정권은 ‘자신들이 세계를 침략하고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하라고 목사들을 협박했습니다.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목사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중에 한 목사가 감옥에 들어간 후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비로소 자유가 무엇인지 알았다. 진정한 자유란 ‘-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에로의 자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 수 많은 노력을 했지만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씀의 종이 되기 시작하면서 말씀이 자기 안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로 하여금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도망갈수록 우리는 말씀에 눌립니다. 말씀이 우리의 짐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그 말씀은 우리의 복이 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행복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할렐루야!

저는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자유케 할 것을 믿습니다. 그 자유의 복을 누리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약속을 이루고자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실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말씀에 묶어야 합니다. 여러분, 말씀의 종이 되십시오. 말씀이 여러분의 복이 될 것입니다.

거룩의 옷을 입다

그들이 취한 두 번째 전신갑주는 ‘구별’입니다. 거룩의 옷을 입었습니다. 10장 30절입니다.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그들은 이방 사람과 자신을 구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은 인종을 차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에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했고 예수님의 족보에도 이방 여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방 여인이나 남자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은 인종 차별 문제가 아니라 종교 문제입니다.
당시 이방 사람과 결혼을 한 것은 애정 때문이 아니라 물질 때문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3장 28절을 보면 출세 때문에 이방 사람과 결혼시키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결혼한 사람들이 어떻게 결혼 생활을 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이들은 율법을 따라 음식을 가려서 먹거나 율법을 따라 절기를 지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도권을 갖고 있는 이방의 남자나 여자가 자신들의 음식을 강권했을 것입니다. 힘의 논리에 따라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들이 열심히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은 자신들이 이방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어 우상을 자신들의 안방으로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은 그들의 순수한 믿음과 혈통을 지켜서 그들 가운데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선택해 말씀 하시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셨습니다. 에스라는 포로에서 귀환하고 나서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사람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던 이들이 “이제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가정,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믿음의 전통을 이어나가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별보다 더 큰 헌신은 없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했다면 그 남자는 그 여자를 구별하여 취한 것입니다. 구별했다는 것은 다른 모든 여자를 선택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이 동기가 되는 전적인 헌신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 삶의 동반자에게 모든 관심과 초점을 맞추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이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우상이 들어오는 통로는 어디입니까? 우리 가정 안으로 악한 세력이 들어오는 것은 온 힘을 기울여 막아야 합니다. 신앙은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직장에서는 세상 사람처럼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 가운데로 악이 들어오는 이유는 구별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별된 삶을 살 때 우리는 세상의 표적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말로 공격을 받고, 우리의 신앙 때문에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구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것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안식의 복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한 세 번째 전신갑주는 ‘안식’입니다. 10장 31절입니다.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 칠 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안식일이나 성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날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들 중에는 이방인들과 상거래를 하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서 오히려 안식일에 쉬는 사람에게 게으르다며 핀잔을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안식일에 돈을 버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안식일에 물건을 사거나 팔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상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는 것에 관심을 갖겠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의 우선순위를 지키겠다는 결심입니다. 만약 우리가 안식일에 돈 거래를 하는 것이 죄악이라고 정죄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자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분들은 버스요금을 내고 버스를 타고 교회에 옵니다. 어떤 순장님은 순 예배에 잘 나오지 않는 분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을 대접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선교를 위해서, 긍휼 사역을 위해서 물건을 판매합니다. 돈 거래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과 돈을 어디에 많이 사용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많은 요일 중에서도 안식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우리에게 세 가지 회복을 주십니다. 첫 번째는 예배를 통한 영적 회복입니다. 두 번째는 쉼을 통한 육체의 회복입니다. 세 번째는 만남을 통한 관계의 회복입니다. 안식일은 이런 복을 누리는 날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서는 안식일 뿐만 아니라 안식년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안식년을 지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7년 째 되는 해는 1년을 쉬었습니다. 때문에 6년째 되는 해에는 2년동안 먹을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년을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500년 동안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더니 하나님께서 강제로 안식년을 주셨습니다. 포로 생활 70년이 바로 그것입니다. 역대하 36장 21절에는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어떤 분들은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그 말씀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 질 것이다.’, ‘내가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15장 4,5절은 안식의 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안식을 통해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가 풍요로워 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이뤄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대로 자원하는 헌물

이들이 취한 네 번째 전신갑주는 ‘헌물’입니다. 32, 33절입니다.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32절에 ‘스스로 규례를 정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1년에 이분의 일 세겔을 성전세로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제 다시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년에 삼분의 일 세겔로 정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원래 정한 이분의 일 세겔보다 적게 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헌금의 중요한 원리를 배웁니다. 믿음의 분량을 따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헌금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헌금은 기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분량 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33절에서 39절은 이 외에 상세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땔감도 성전에 바쳤고, 첫 열매, 첫 아들도 성전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성전에 바쳤습니다. 자신의 형편을 따라 믿음대로 결정하고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은 당시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들의 손으로 채우리라 결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린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용된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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