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말씀과 부흥 (느 08:1-18)

첨부 1



말씀과 부흥 (느헤미야 8:1-18)
 
오늘날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비극은 ‘풍요속의 빈곤’입니다. 악착같이 땀 흘리고 일해서 집과 자동차도 사고 생활은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가정 안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생깁니다. 이혼을 하기도 하고 자식들이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은 풍요롭게 누렸을지 몰라도 영적인 것은 곤비하게 살아온 결과입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황폐케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육적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물질의 필요와 함께 영적인 충만함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외적인 조건을 갖추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이 재건되었다고 거기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자신들이 7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것이 물질적인 문제가 아닌 바로 영적인 문제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재물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결국 하나님까지 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예루살렘 성이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이 아닌 재물과 우상에게 마음의 빗장을 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켜주던 성읍 문 빗장을 이방 나라들에게 열어준 것입니다. 유린과 착취의 고통 가운데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차는 영적 부흥을 갈망하며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그들은 말씀을 갈망하며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하나님을 버렸던 그 실수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 참된 말씀을 깨닫고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부흥의 두 가지 요소

우연의 일치인지 이들은 그 성에 많은 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문에 모였습니다.
성경은 말씀의 기능을 물에 빗대어서 설명합니다.

첫째, 물은 씻어내는 기능이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과거를 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임할 때 그 말씀은 우리의 과거와 분노를 가지고 갑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모여서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새로와지기를 갈망했습니다.

둘째, 물은 마시는 것입니다. 인체의 70%는 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 육체 가운데 물이 적당량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체 내의 물이 부족하면 마시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결과로 자신들이 겪은 인생의 목마름을 벗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시고 싶어합니다.이들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임이니라’는 영원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때에 어떤 풍요를 누릴지라도 목마르고 배고프고 고생합니다. 끊임없이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보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내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아시고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7, 38)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수문 앞에 모여서 그들에게 말해 줄 사람을 부릅니다. 그 사람이 에스라입니다.
백 년이 넘는 이방 민족의 지배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문화와 생활, 모세의 율법과 신앙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또 그 말씀을 수집합니다. 그리고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정치와 행정 지도자 느헤미야를 사용하셨던 하나님은 이제는 제사장이요, 학사인 에스라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포로에서 돌아온 탁월한 두 인물을 통해 그 은사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는 1절 말씀에서 영적 부흥의 두 가지 요소를 발견합니다.
첫 번째는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준비된 사람 에스라가 어떻게 말씀을 선포하는지 2절부터 4절을 보겠습니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그 우편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 좌편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에스라는 혼자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준비된 강단에 선지자들을 세우고 레위 사람을 세웁니다. 이 당시에 모여있는 인원은 삼만 명에서 오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백성들이 아람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에스라가 히브리말로 기록된 율법을 읽으면 그들이 번역하고 어려운 낱말은 이해하기 쉽도록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배는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은 함께 증거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증거하지만 여러분도 제게 증거하는 겁니다. 말씀은 영과 영이 교통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렇게 온전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한 날짜를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7월 1일에’라고 되어있습니다. ‘7월 1일’은 ‘나팔절’입니다. 10일은 속죄일이고 15일에서 21일은 초막절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월은 특별히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7월 1일이 더 강조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백성들이 성을 완성하고 새로운 삶을 출발하기 원하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7월 1일, 우리 나라 월력으로 말하면 새해 첫 날에 말씀을 들고 그들 앞에 섰습니다.
이 날에 에스라가 말씀을 선포한 이유는 모든 것이 말씀이 아니고는 시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받았습니다. 말씀이 없이는 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아브라함을 부르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모여 있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그 생명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의 시작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도 하나님의 선포, 말씀의 임재가 없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스라는 이 하루를 귀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날에 말씀을 듣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온전히 받아라

본문에서는 첫날 에스라가 ‘남자와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서’ 말씀을 전했다고 대상자들을 두 번이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진리요, 구원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없어질지라도 설교는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전도는 이 땅에서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계속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에스라가 새벽부터 정오까지 적어도 6시간 이상을 하나님 말씀을 읽습니다. 백성들은 갈망하는 마음으로 6시간 이상 서서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자세에 대해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8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말씀을 듣는지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에스라가 말씀을 펼 때에 백성들이 일어섰습니다. 당시 이들의 습관은 말씀을 들을 때는 앉아 있고 기도할 때는 일어나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에스라가 말씀을 펴자마자 그냥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받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백성이 일어나니 에스라가 말씀을 읽기 전에 ‘광대하신 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자 일어났던 백성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몸을 납작하게 폈습니다. 자신의 모든 육체를 땅바닥에 댄 것입니다. 이것은 ‘전능한 하나님 당신이 어떤 말을 하실지라도 그 말씀을 내 모든 존재로 받겠습니다’라는 간절한 믿음의 고백이고 표현인 것입니다. 말씀의 주인이시고 말씀 자체이시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온전히 받기 원하는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상황에 맞는 말씀을 분별해 들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을 선택해서 듣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말씀 그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지 백 년의 세월을 거쳐 깊이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마음과 온 영을 다해서 말씀 그대로가 자신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란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쓰신 말씀은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이 다 받아들여집니다.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바꿔서는 안됩니다. 나를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심겨질 때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이 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는 사람은 사단에게 마음을 빼앗겼거나, 이 세상 염려와 재리와 유혹 때문에 근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아멘’하며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서 반응합니다. 9절에서 12절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말씀을 들으며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크고 두려워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죄가 하나씩 하나씩 발가벗겨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 부끄러워서 웁니다. ‘오 하나님 나 같은 존재가 어찌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어른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자기의 가장 악한 모습을 말씀 안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악한 모습 속에서 가장 선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제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가장 절망스러운 모습으로 ‘주님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하는 베드로를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진정한 모습으로서 그 영혼을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회개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희망이 솟아 오르는 것을 누리면서 웁니다. 그때 지도자들이 ‘울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여호와의 성일이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느헤미야는 오히려 ‘너희는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 근심하지 말라 말씀의 찔림 받을 때 근심하지 말라. 말씀이 내게 다가올 때에 근심하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그의 사신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말씀을 만났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요,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자신의 생각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그 말씀의 능력이 사로잡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말씀을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어른의 신앙은 말씀에 사로잡히는 신앙입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너희가 말씀을 재어보고 따져보고 해석해보고 말씀이 네 기분에 맞으면 따라왔지만 이제는 사신 하나님의 말씀이 너를 사로잡았으므로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이것이 너의 힘이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제는 말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3절에서 18절까지는 초막절을 지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군데에서 그들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했다고 나옵니다. 12절 ‘여호와의 말씀을 앎으로 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그리고 17절에서 기뻐한 내용이 나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화려한 집이 아닌 가지로 얼기 설기 지은 초막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진 것은 우리의 기쁨과 관계 없습니다. 소유는 중요하지만 소유가 우리를 평안하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내가 가난과 부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합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채워질 때에 우리는 자족의 삶, 자유의 삶, 해방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