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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부의 위기를 극복하는 느헤미야 (느 0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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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칼이나 죽음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갈라놓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고난과 좌절을 겪기도 하고 ‘내가 의를 위해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닌가?’ 마음속에 근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사랑으로 그 모든 상황과 죄악을 넘어서서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온전케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어둠의 세력들, 대적자들도 결코 쉽게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4장에서 우리는 대적자들이 어떻게 외부로부터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는가 보았습니다. 그들은 조롱과 비난의 말을 퍼붓고 열등감을 자극하고 그들의 현실을 비웃었습니다. 그래도 안되자 가족들의 생명을 노리겠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무력 시위를 합니다.

환란이 다가올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밖에 흩어져 있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흩어지면 스스로 지킬 수 없다’며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봅니다.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삽을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기도하는 서로를 바라보며 도전을 받습니다. 이제껏 모든 일이 늘 안된다고 패배감에 젖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는 결심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구나.’ 그런 흥분감에 사로잡힙니다.

내부로부터의 공격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흥분과 감격가운데 있을 때 대적들은 이들을 무너뜨리려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법을 바꾸어 공격했습니다. 열등감대신 승리의 감격을 공격해 옵니다. 외부를 공격했다면 이제는 내부의 혼란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일꾼들이 전사가 되어 영적으로 충만하자 그들은 육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공격해 들어옵니다. 어떻게 외부의 대적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했는지 5장 1절에서 5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혹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곡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 잡히고 이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얻자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니 속량할 힘이 없도다

영적으로 충만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한 손에는 삽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일하면서 싸우는 그들을 공격해오는 것은 성벽재건의 현장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을 분열시키고 분란시키고 공격해 오는 것은 바로 그들의 가정 안이었습니다. 무력의 위협 때문에 으로 성 밖의 백성들이 간단한 가재도구와 식량을 가지고 성 안에 들어와 살면서 두 가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가난한 백성들이 굶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가난한 백성들을 이용하는 유다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며칠 간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집 안의 양식이 떨어져 갑니다. 적들이 노리고 있어서 밖에 나가 구할 수도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양식이 부족합니다. 유다 백성의 가장들은 굶주리고 있는 아내와 자식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적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아내와 자식이 굶는 마당에 힘을 내고 용기 있게 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은 단지 굶는다는 배고픔이 아니었습니다. 성 안 부유한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성을 중심으로 사는 문화는 성 안에 있는 사람이 성 밖에 있는 사람보다, 성 중앙의 사람들이 성벽 가까이에 있는 사람보다 부유합니다. 백성들은 양식을 구하러 성 안에 있던 부유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부유한 사람들은 양식을 그냥 빌려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자를 받습니다. 밭과 토지를 전당 잡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밭과 포도원을 전당잡혀야 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됩니다. 아내들이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성 밖에서 온 가난한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처음엔 참자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성벽을 재건하던 그들은 ‘이것이 거룩한 사업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굶주리면서까지 희생하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것을 먹으면서 일하는가?’ 원망이 생겼습니다.

굶주림과 가난의 문제는 성벽 재건 때문에 일어난 문제는 아닙니다. 그 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흉년이 되고 일이 시작되자 더 심각하게 대두된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방인에게 착취당할 뿐 아니라 우리의 동포들에게도 착취당하고 있는가? 진정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들은 상대적 빈곤함을 참지 못하고 느헤미야를 찾아가 울부짖습니다.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느헤미야는 이것이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아무리 큰 것이라도 내부로부터의 공격보다는 심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적은 물리치거나 함께 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부의 문제, 형제, 가족, 민족, 함께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잘못된 사람들을 쫓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내부의 문제로 일어난 위기를 세가지 방법을 통해 극복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그는 감정적, 의지적 대응을 합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느헤미야가 민족의 지도자들, 부유한 자들에게 노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울부짖고 있는 백성들의 앞에서 분노를 발하고 있습니다. ‘밭과 토지를 잡고 고리대금을 하는 것이 정말인가? 어떻게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것을 하는가?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소.’ 라며 화를 냈던 것입니다.
사실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잠언에는 ‘노하기를 쉽게 하는 자는 어리석음을 행한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노하는 것은 나쁜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때 우리는 분노해야 합니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때

형제가 형제를 착취하고 유린하며 자기 부와 소득의 수단으로 삼을 때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향해 저주하면서 분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저주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연악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피곤하고 지쳐 약해졌을 때 쳐들어 왔습니다. 르비딤 골짜기에서 두 민족은 전쟁을 했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산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 백성이 이기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백성이 전세에 밀려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 손을 계속 들고 있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하나님이 아말렉을 향해 ‘내가 반드시 아말렉을 쳐서 도륙하여 무찌르겠다’고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한 사울 왕 때 그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약한 자를 공격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약한 자를 공격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도 화를 내신 일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 곳에서부터 자기들이 기르는 양을 소중하게 가져옵니다. 비둘기도 가져옵니다. 그런데 예물 판단관이 그 예물을 보고 ‘흠이 있어서 안된다’며 자기들이 준비한 예물을 사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이유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이용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참지 못하신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의 연약함을 이용해 착취할 때 우리는 느헤미야 처럼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느헤미야는 분노를 가졌지만 분노가 정당하고 이유가 바르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생각하고 중심에 계획했습니다. 7절부터 9절을 보겠습니다.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그는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절제합니다. 분노를 가지고 주님 앞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획합니다.
느헤미야는 귀인과 민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총독이 자신의 임지에서 첫번째 해야 하는 일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유지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들과 정면대결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성벽 재건 같은 외형적인 것 보다도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했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공인으로서, 지도자로서 잘못을 지적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모두가 승리하기

만약 여기서 느헤미야의 행동이 끝났다면 느헤미야가 옳은 말을 했고 지도자들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의 패배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형제가 싸울 때 한 쪽만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나 어떤 단체가 내적인 문제로 싸웠을 때 한 편이 이겼다는 것은 다른 편의 패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패배를 의미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멈춥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을 모으고 집회를 갖습니다. 느헤미야의 원래 목표는 대적들이 공격하기 전에 신속히 성벽 쌓기를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모두의 승리를 위해 공중집회를 엽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을 쌓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의 성벽을 쌓고 승리하기 위해서 입니다. 만약 성벽 안에서 서로를 착취하는 백성들이 있다면 성벽을 쌓는다고 해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커져도 그 안에 형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능력도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만큼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34절, 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성벽의 재건 뿐 아니라 영적인 부흥이었고 영적인 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성벽이 쌓아지는 것 이상으로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속 사람이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한 지도자들을 깨우쳐서 이르고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지도자들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느헤미야의 능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도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만을 바라라

세 번째, 느헤미야는 지도자들보다, 백성들보다 먼저 자신을 화해의 제물로 내어놓습니다. 1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첫 번째 그는 전통적인 과오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전 총독들이 행했던 악한 습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금을 걷고, 땅을 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을 스스로 끊겠다고 백성들 앞에서 결심하고 실천한 것입니다.
두 번째,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포기합니다. 총독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세금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왕이 왕궁으로부터 주는 돈으로만 살기로 결심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축복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1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가 돈의 축복을 원했다면 이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돈은 우리를 도와줍니다. 권력도 우리를 축복해 줍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를 도와주면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권력이 나를 도와줬다면 나는 나를 도와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줬다면 나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다윗이나 요셉의 신앙보다도 위대합니다. 다윗과 요셉은 가장 심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최고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만이 우리의 길

느헤미야는 자기자신을 먼저 화평의 제물로 아낌 없이 드리며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자. 낮은 자는 높은 자를 용서하고, 높은 자는 낮은 자를 사랑으로 대하자.’ 라고 했을 때 민족의 지도자, 민장과 귀족들이 그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찌니 저는 곧 이렇게 떨쳐져 빌찌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대로 행하였느니라

회중이 다 ‘아멘’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에 오직 ‘아멘’ 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그 분의 삶에는 두 단어만 있습니다. ‘네’와 ‘아멘’ 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어떤 어려움과 환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있을지라도 ‘네’와 ‘아멘’만 하게 되길 축복합니다.

어떤 부흥사 목사님이 “‘조금 있다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결국 결심을 실행하지 못하고 죽을 때 아차차 후회하며 지옥에 갑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잘못을 차차 고치겠다, 차차 실행하겠다’ 는 것은 믿음의 언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실 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소중한 것일지라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아멘’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신 그 분께 우리의 삶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위로하고 회복시켜주시고 여러분의 삶을 깊은 사랑으로 다듬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존재 안에서, 생명을 내어주시는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여러분이 새롭게 사랑의 힘으로 일어나기를 주님께서 기도하시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옳고 그름으로 행동하지 맙시다. 비난과 불평가운데 행동하지 맙시다. 나의 의로움을 가지고 행동하지 맙시다.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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