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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꾼과 전사들 (느 0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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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과 전사들 (느헤미야 4:1-23)
 
1장에서 느헤미야는 기도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자신의 지혜나 노력으로 이루려고 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선한 손길과 도움을 간구합니다.

2장에서 그는 왕을 설득하고 허락을 맡아 총독으로서 자재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는 3일동안 침묵하고 기도하면서 자신이 기도중에 본 환상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성벽을 건축할 것인가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이 다 세워지자 그는 백성들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아닥사스다 왕이 우리를 후원하니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성벽을 재건하자’ 고 백성들을 설득합니다.

그리고 3장에서 그는 각 백성들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담해 줍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신의 기능에 관계없이 일을 맡겨줍니다. 분담의 원리요, 협동의 원리요, 은사의 원리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느헤미야는 큰 어려움 없이 일을 진행해 나갑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게 정말로 큰 문제는 왕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되는 성벽재건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자신들의 대적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산발랏과 도비야는 근심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성공이 자신들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느헤미야를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 사회적, 경제적 이유때문입니다.

실패를 바라는 대적자

당시 예루살렘 성은 훼파된 지 오래였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과 주변 나라들은 성이 훼파되어 스스로 안전을 지킬 수 없는 유대인들을 적당하게 이용하면서 풍족한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성벽이 재건된다면 주권과 자치권이 인정되어 자신들이 그동안 적당히 약탈하고 이용했던 노동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이집트에서 페르시아까지 동서를 연결하는 무역로입니다. 많은 대상들이 짐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이 파괴된 이후엔 그들은 안전을 위해 그 주변 도시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루살렘이 재건된다면 무역상들은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빠르고 안전한 예루살렘을 다시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역상들에게서 얻고 있던 수익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경계하고 근심한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 성벽을 재건하려 하다가 여러가지 어려움 때문에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비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힘써 협력하고자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산발랏과 도비야는 분노하고 격동했습니다.
4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유대인들이 포기하지 않자 대적들은 분노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벽재건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이들은 고심한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비난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군대와 사람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비난의 언어가 유대인들에게 전달되도록 조작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산발랏이 다섯 가지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가지 비난은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발랏의 뒤에는 사단의 세력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다섯 가지 비난은 엄밀히 말하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단은 근거 없는 이야기로 어설프게 공격하지 않습니다. 한 번 공격해 약점을 물고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산발랏이 공격한 것은 2절에 나옵니다. 사단이 처음 공격한 영역은 그들의 ‘열등감’이었습니다.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사실 이들은 미약했습니다. 성벽도 없고 유린당하고 착취 당하고 어린아이들은 거리에서 잠을 잤습니다. 패배의 역사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보다 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그들의 능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느헤미야가 오기 십 여년 전에도 성벽을 세우려다 실패했습니다. 백년 전부터 시작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미약한 힘을 모아 성을 재건하려 할 때 ‘너희들은 너희의 처지를 알아라. 너희가 그것을 하겠느냐?’ 라고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에게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들은 육체와, 느헤미야가 가져온 재료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세 번째로 산발랏과 사단이 공격하는 내용은 가장 정수리인 제사와 믿음입니다. ‘너희들이 이 성을 다 짓고 나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려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봐라. 그가 진정 살아있다면 너희가 왜 이 모양 이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냐? 그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라면 왜 아직까지 이 일을 못하고 있느냐?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너희를 버린 것은 아니냐?’.
동일한 공격을 우리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갈 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단은 우리의 믿음을 공격해 들어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불신하도록 사단은 계속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네 번째, 느헤미야와 유대인의 계획을 공격합니다.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2마일 가량 되는 성벽을 유대인이 힘을 모아 한 쪽에서부터 시작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3장에서 본 것처럼 가족 단위, 사람 단위로 일을 줬습니다. 그리고 ‘자 우리가 함께 일어나서 이 성을 재건하자’고 합니다. 이 느헤미야의 계획을 비웃고 유대인의 열심을 비웃는 비판인 것입니다. 계획을 하기는 어렵지만 약점을 잡아 비난하기는 쉽습니다. 사단은 그렇게 우리의 약점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산발랏은 현 실정의 상황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이들의 말처럼 성벽이 소화되고 무너져 내려 있습니다. 재료가 부족합니다. 변변치 않은 자재로 성벽을 재건해봐야 그 성벽이 얼마나 가겠냐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듯 도비야는 ‘너희들이 재건하는 성벽은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무너질 약한 성벽이 될 것이다’ 그렇게 조롱하고 비난합니다. 격려를 들어도 힘든 때에 적들의 비난과 백성들의 소문을 들으면서 느헤미야와 일꾼들의 마음은 참담했을 것입니다.

비난을 두려워 말라

이렇게 산발랏이 집요하게 비난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의 힘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을 듣느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 마디 말 때문에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격려의 말을 들으면 힘이 나지만 비난의 말을 들으면 자기 자신이 할 수 있어도 ‘정말 가능할까? 내가 할 수 있을까?’ 한 번쯤 의심하게 됩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격려의 말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비난의 말은 폭력입니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평생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가슴에 박혀있는 비난의 말, 상처의 말 때문에 평생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비난의 말은 그만큼 위력이 있고 사람을 기죽게 합니다.
느헤미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중심을 향해 철저하게 공격해 들어오는 비난의 말을 들으며 느헤미야는 괴로워했습니다. 백성들도 괴로워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아닥사스닥 왕께서 나를 신임하시기로 군대와 함께 나를 보내셨다. 너희들이 나를 반대하는 것은 왕을 반대하는 것이다.’라고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난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비난의 내용이 사실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예상되어 있는 일입니다. 사단의 세력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반대합니다.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도 흠도 티도 없으셨지만 그분은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도 핍박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도 조롱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산상수훈 8복의 말씀 가운데 한 가지가 핍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핍박이 다가올 때 대적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핍박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집니다. 비난에 대해서 침묵을 지킬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난과 모욕 가운데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 사람의 인정이나 말로 승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겸손으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동으로 열매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핍박을 받아들이는 자는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가라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와 연약한 마음을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원수들이 우리를 업신여깁니다. 저 원수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이방인의 먹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주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거룩하게 되어 나가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죄와 잘못을 다 정리하고 예배드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느헤미야는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의지합니다. 그것이 솔직하고 진실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자신의 연약한 마음, 분노의 마음을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력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로운 것으로도 역사하시지만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느헤미야와 그 백성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주님 안에서 용납과 자유를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께서 마음껏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전사요, 하나님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느헤미야와 지도자들은 기도를 마치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일했고 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들의 연약함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고난과 비난이 있기에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벽 절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7절과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것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온 백성이 기도했고 열심히 일해 성 높이를 반이나 쌓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들의 집에 있는 자기들의 형제와 가족들이 적들의 칼 앞에 침략을 당할 수 있다는 다급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적들의 근처에 있는 유다 사람들은 열번이나 와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기도해서 성을 반이나 쌓았는데 왜 하나님은 도와주지 아니하시고 적에게 공격당하게 하시는 것일까?’
우리도 그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적당한 선에서 건져주시기도 하시지만 때로 하나님께서 꼭 도와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 심한 고난가운데 몰아 넣기도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난 가운데 밀어 넣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믿음이 없이는 현재까지는 감당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다음에 전개되는 일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더 강하고 더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 어떻게 할 것을 아시고 시험하십니다. 광야에서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제자들이 ‘주님,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상황을 해결하는 능력을 찾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 그들의 마음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있다 할지라도 떡을 살 곳이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먹이겠습니까?’ 불평의 언어로 나갑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주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이 다입니다.’라며 어느 아이가 가지고 온 물고기 두 마리과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나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더 강한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염려로 백성들의 마음은 산란해집니다. 이것을 안 느헤미야는 백성을 다 모읍니다. ‘우리가 다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 앞에 서지 아니하면 우리는 멸망할 것이다. 우리 함께 무장해 일하고 기도하며 싸우자. 성을 지키지 못하면 가족을 지킬 수 없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13절,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성 뒤 낮고 넓은 것에 백성으로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하고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교회는 운명 공동체 입니다. 한 사람이 잘 됐다고 해서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 함께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우십시다. 서로 비방하고 분리하지 맙시다.
교회에서만 기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일터에서 일하십시오. 그러면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과 아스돗 사람 같은 그 모든 대적들이 여러분 앞에서 종이 호랑이 같이 물러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승리케 하실 겁니다. 어떤 비난의 언어에도 기죽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격려하십니다.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 당신은 반드시 아버지의 뜻을 이룰 것입니다.’ 비난의 말은 우리를 죽일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고 승리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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