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느 구도자의 기도 (시 119:57-72)

첨부 1


시편은 아름다운 시로 이루어진 성경이다. 그래서 시편을 읽을 때는 “장”이라 말하지 않고 “편”이라고 부른다. 이 아름다운 시의 대부분은 ‘다윗’이라는 진실한 구도자에 의해 쓰여졌다. 다윗은 평범한 가정에서 출발하여 가업인 목축에 종사하던중 사무엘이라는 선지자에 의해 왕이 된 사람이다. 왕이 되기 전의 다윗도 역시 진실한 신앙인 이었지만 왕으로 부르심을 받고난 이후의 다윗은 그 이전에 비하여 훨씬 강도높은 구도의 훈련을 받게 되었다.

사람이란 누구나 허물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다윗의 생애는 역대 어느 왕과 비교하여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허물이 없었다. 다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일 외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이토록 완벽할 정도로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누구 보다도 많은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1. .주의 법을 따르렵니다(57-63).
1)자신의 소원이 오직 한가지임을 고백하였다.
지금 다윗이 처한 환경은 ‘사울’이라는 현직 왕에게 이기고 있는 중 이었다. 그가 이겨야했던 이유는 차기 왕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거의 잡힐뻔한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반대로 자신이 사울을 없앨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세운 왕이기에 절대로 자신의 손으로 왕을 해치울 수 없다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자신을 죽이려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당방위’라고 한다. 그러니 죽일만하면 죽여도 괜찮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기를 거부했다. 상대방은 비록 자신에게 불법을 행할지라도 나만은 법을 지키겠다는 결심이었다.

이토록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그를 받쳐주는 믿음의 힘과 결심 때문이었다. 62절에 “한 밤중에도 자다가 벌떡일어나” 주의 은혜를 기억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만큼 그가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았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공포를 “의로우신 주님”을 생각하며 극복해 나갔다.

2)이런 소원을 갖자.
어쩌면 다윗의 소원은 소원치고는 보잘것 없이 시시하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보다 훌륭한 소원은 없다. 성경의 원리는 언제나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시면”이다. 자기를 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은 일을 거듭 반복하고 있다. 남이 나를 손해나게 하고 세상이 나를 외면할 지라도 주의 법을 떠나서는 안된다. 나 한사람 부터 주의 법을 지켜야 한다.

이제 부터 우리의 기도제목을 바꾸자. 다윗처럼 “주의 법을 따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지금 까지 살아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찬송만 부를 것이 아니라 우리도 곰곰히 주께서 내게 내려주신 은혜를 기억하므로 결심을 더욱 굳게 해야 한다.

2. 주의 법을 가르치소서(64-69).
1)이 몸을 가르치소서
.주의 법으로 자신의 몸을 가르쳐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결심이다. 원수가 자신을 죽이려 할지라도, 손해가 날지라도 주의 법을 따르겠다는 결심이다. 6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 찬양의 내용은 “주께서 약속을 지켜주셨다”는 것이었다. 그 약속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나, 결국 하나님은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끝까지 보호해 주셨고 결국 사울은 전쟁중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다윗은 왕이 되었다. 66절은 주의 명령에 대한 믿음과 슬기로움, 지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결국 깨달음과 지혜로움은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고백이다.

67절에 주께서 벌을 내리시기 전에는 잘못되게 살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주의 말씀만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밧세바와의 일을 통한 징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유일한 흠이었다. 자신의 생애에서 ‘단 한번’의 실수--.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 경험이 그로하여금 평생을 빗나가지 않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해주는가에 따라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불법을 행할지라도 나는 주의 법에 충실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요, 도리다.

2)주의 법을 배우자.
주의 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기록되어진 수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전달되어졌다. 신자는 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신자를 ‘성도’ 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초대교회가 그렇게 부른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도’라는 호칭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도라고 불리움받기를 원한다면 주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것 만으로는 성도가 될 수 없다.

3.고난이 나를 유익하게 했습니다(70-72).
1)명령을 배웠습니다.
다윗의 고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들판에서 잠을 자야했고, 산속을 헤메어야 했다.먹고 싶은 것 먹을 수도 없었다. 이기는 생활은 고달픔 그 자체다. 더군다나 죄가 있어서 이기는 것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아무죄도 없이 이겨야 하는 것이 고통이다. 단기간의 도피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박해 속에서 무슨 감사가 나오겠는가?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고난도 감사가 된다. 진정한 성령충만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차이가 없다.

70절에 걱정거리가 없으면 무사태평이 된다. 그러니 무엇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발전은 언제나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프리미엄이다. 고난은 깨달음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저자의 고난경험은 도리어 약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이 체험을 통하여 깨닫고 보니 세상에 있는 어떤 보배와도 비교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2)고난 체험은 나를 유익되게 한다.
고난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자신의 과실로 인한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지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을 한다면 고난은 별로 없다. 그리고 그것을 고난이라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이 나에게 지시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다소간 나에게 해가 될지라도 그대로 따를 때 불가피하게 겪는 것이 고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세상에 나를 해할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다가 겪는 고난은 결코 나를 손해나게 하지 않는다. 당장에는 그것이 고통이지만 그것은 훌륭한 예방주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까? 우리는 욥의 고난을 익히 잘알고 있다. 그가 믿음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면 고난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분명한 신앙의 보증작업이 바로 ‘고난’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하나님은 그를 훌륭한 왕으로 세우시려고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거치게 하셨다. 결과 그는 훌륭한 성군이 되었다. 우리는 믿음이 강해질수록, 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클수록 고난을 겪을 수 있다. 그것은 쓰임을 받기 위한 기초단계임을 잊지말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