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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진보의 조건 (아 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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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가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아가란 뜻은 노래 중의 노래( song of song)란 뜻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만이 참 왕이심을 알고 고백하면서 부른 노래가 아가서 입니다. 아가서는 참으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노래 중의 노래를 부르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의미를 모르고 읽으면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합니다. 본문은 성도와 주님 사이의 단결을 말합니다.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에 대해서 쓴 책이라고 이해를 하시고 본문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어미새가 둥지를 치고 알을 낳았습니다. 알에서 새끼들이 부화되어 먹이를 기다립니다. 어미새는 새끼들에게 줄 먹이를 구해와서 어떤 새끼에게 줄까요? 모든 새끼들이 입을 다 벌립니다. 그 중 어떤 새끼에게 먹이를 줄 것 같습니까? 입을 가장 크게 벌리는 새에게 준다고 합니다. 그 말은 가장 먹기를 갈망하는 자에게 먹이를 집어 넣어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네 입을 크게 열라. 열면 하나님께서 채 워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의 내용은 주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입을 크게 벌리고 주님! 내 비어진 이 부분을 채워주시기를 원하는 내용이 실려져 있습니다. 입을 크게 벌려 갈망하는 자에게 주님이 만나주시고, 주님이 그에게 필요로 하는 것들로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조금 더 쉽게 본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2절입니다. '내게 입 맞춰주기를 원하니' 이것은 주님, 내게 입을 맞추어 주세요. 주님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며, 주님의 기름이 향기롭고, 주님의 이름이 쏟은 향수같으며 처녀들이 곧 주님을 사모하는 자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를 데려가 주세요. 자. 함께 달려갑시다. 하나님이 나를 자신의 궁전으로 데리고 가셨으니 우리는 정말 행복할 것입니 다. 갈망하는 자를 만나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궁전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영적 진보는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하지 않습니다. 인류사회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 다. 육체와 정신적인 것을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고, 영적인 면을 사모하면 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비 그리스도인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을 세부분으로 만 드셨습니다. 사람은 곧 영과 혼과 육의 그릇으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어떤 가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잘 살려고 돈을 법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에서 조금 채워지면 음악을 찾고 오락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어 졌을 때 진정한 우리의 만족이 와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마실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침실이 불편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운동이나 오락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하면 그것에 싫증을 냅니다. 문제는 우리가 추구하는 그 어 떤 것이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든 것을 갖추고도 내면에 허전함을 느끼고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영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과 혼과 육이라고 했는데, 육적인 욕구들과 혼적인 욕구들이 있습니다. 혼은 정 신적인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이 영적인 부분을 함께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기는 영으로 번역됩니다. 흙으로 사람의 육을 만드시고 혼을 만드시고 영적인 부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적인 부분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항상 영적인 부분이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든 것을 다 채워도 늘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 사실을 체험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부를 다 누렸습니다.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채워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합니다. 육이나 혼적인 것을 채우려고 한평생 노력했고 다 채워져도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그 말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서 채워주는 영적인 부분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육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영과 육 과 혼을 갖추신 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육적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십자 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하십니다. 그것은 정말 채워져야 할 부분이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영적인 부분이 꽉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 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제자들이 참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해 왔지만 주위의 많은 핍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마지막 떠날 때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갈망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언제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나도, 질병에서 벗어나도 만족함을 얻지 못합니다. 잠시는 있을 지 몰라도 그 만 족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내가 이 질병에서 고침만 받으면 나 는 만족하리라고 합니다. 내가 가난할 때 내가 이 가난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나는 만족하리라고, 나는 늘 감사하면서 살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가르칩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영적인 부분과 혼적인 부분을 채워주려고 계속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그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 부분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적인 부분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영적인 부분이 채워지면 가난해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이 채워지면 병들어도 만족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얻을 것이다. 찾을 것이다. 분명히 열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인용합니까? 우리의 육적인 부분과 우리의 정신적인 부분, 우리의 욕심을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채워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세상에서 부자일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 드리라는 말은 영적인 부분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 부 분을 채워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적 부분을 채워주기 위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육적이고 정신적인 어떤 것들을 채우려고 교회를 아무 리 &51922;아다녀도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계속 불평합니다. 찬양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나 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찬양도 말씀도 기도도 모두가 우리의 영적인 부분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지, 우리의 육적인 것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육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채우려고 하려면 요즘 텔레비젼에 나와서 열변을 토하는 김용욱 교수의 소리를 듣는 것만큼도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연속극을 보는 것보다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런 부분을 채워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욕심을 가지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부분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을 채워줄 주님을 사모해서 정말 주님을 만나서 그 영적인 부분이 채워지면 내일 일에 대해서 염려가 없습니다. 찬양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과 함께라면 가난해도 나는 좋아. 병들어도 나는 좋아. 그것은 곧 영적으로 채워진 자의 입술을 통해서 그런 흘러나온 하나의 표현입니다. 지어낸 노래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본문의 1장 2절 말씀을 보면 '입맞춤'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공허함을 느끼고 깨달은 사람이 주님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의 내용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 진보하는 것은 이미 영적으로 주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로 성도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신앙 안에 서 성장해야 할 조건은 먼저 주님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영적 부분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영적 부분을 채워 달라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하는 표현과 같은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배고프지 안 은 사람은 식당에 다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처음 군에 가보면 먹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고프면 모두 다 먹을 것입니다. 쌀 한톨도 남기지 않습니다. 반찬도 절대 남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서 메뉴를 보면 그 메뉴들의 음식들이 다 맛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메뉴판을 뒤적이다가 먹을 것이 없다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갈급한 마 음으로 교회에 오면 하나부터 열 가지가 다 먹을 것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으면 와서 먹을 것이 없습니다. 뒤적입니다. 평가합니다.

교회는 영적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의 입 맞춤이라는 것은 주님에 대한 영적 갈망입니다. 좀 더 주님과 가까이 가고 싶고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 갈망이 생기는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때 영적 갈망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참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라는대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채워주려고 하나님이 계신 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짖었습니 다. 그래서 오히려 영적 부분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잡아서 그를 결박했습니다. 영적인 궁핍함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갈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 울 만큼 주님을 사모한 자가 없습니다. 바울만큼 매일매일 주님을 추구한 자가 없습니다. 진정 예수님만이 내 영적 부분을 채워주고 나의 인생의 참다운 것을 깨닫게 해줄 분이심을 그래서 내게 입 맞춰 주기를 원하니 이것은 곧 영적 갈망을 가진 자의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 여기 네 기름이 향기로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전달 되어집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도바울 이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영적인 갈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진 자가 곧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3절 하반절에 '처녀'라고 이야기합니다. 처녀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정말 하나님이 없이는 나는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 갈망하는 자들을 아시고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만나주십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가장 처음 만난 사람이 마리아입니 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도 그는 다시 오실 것을 갈망했습니다. 주님을 갈망하는 마리아에게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을 갈망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을 갈망하는 시몬에게 나타나셨고, 동방 박사들에게 나타나셨고, 목동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반드시 주님은 주님에 대한 갈망을, 영적인 갈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만나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서 전혀 주님을 못만나고 외적인 부분만을 보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영적 갈망이 생깁니다. 영적 궁핍함을 느끼게 되어질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나보고 갈망하게 되어집니다. 그럴 때 주님은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영적 부분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아도 항상 그 자리에 있던지 다시 계속 내려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 에 오신 것은 그들의 영적 부분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51922;아 다니면서도 영적 부분에 대한 사모를 하지 않습니다. 계속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을 채워 달라고 예수님을 &51922;아 다니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서 왕이 되면 우리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욕구를 다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제 자들은 다시 이전 삶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따랐던 수 제자 베드로를 만나서 질문을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말은 영적인 부분의 갈급함을 느끼고 갈급함을 채 워주기를 나에게 요구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물어봅니다. 네가 바라던 데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를 채워주지 못했다. 내가 온 것은 영적인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서 왔다. 정말 그것을 알고 나를 사모하는가?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 에게 영적인 부분을 채워 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습니 다. 최고의 가치있는 삶을 삽니다. 순교적인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순교합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비유에서 한 여인은 6명의 남편이 있어도 정신적이나 육체적 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공허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 났습니다. 주님은 그의 비워진 영적인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만족을 체험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세운 목적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녀도 왜 교회를 다니는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알고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이 채워지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만족한 마음으로 떠날 수가 있습니다. 채워지면 언제 떠나도 상관 없습니다. 채워지지 않으면 떠나기가 아쉽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떠날 때 솔로몬의 고백처럼, '주여 내게 입 맞추어 주기를 원 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주님임을 고백한다면 영원하신 주님께서는 그와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썩어질 세상을 추구해 간다면 아무리 추구해가도 마지막 떠날 때에 아쉬움만 남게 될 것입니다. 갈망하는 자가 곧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 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주 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됩니까? 4절 말씀을 보면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며' 왕이 나를 자기의 궁전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여기 침궁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침궁은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잔치집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기다렸던 다섯처녀가 주님을 만났을 때 주 님이 잔치집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곳은 가장 행복한 곳입니다. 안식과 누림이 있는 곳입니다. 목마름과 배고픔이 해결될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만날 때 만이 인생의 목마름과 인생의 배고픔이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인생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습과 아버지에 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갈망했을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을 만나주십니다. 교회 밖의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이 탕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들을 만나주시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입을 맞추어줍니다. 아버지의 모든 사랑을 아들에게 불어 넣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을 만날 때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비어진 영적인 부분을 가득차도록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들이 주님에 대한 갈망을 가졌으면 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부분이 비어 있음을 알고 영적인 부분을 갈망하십시오.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만나주실 것입니다. 영적 깊은 곳, 곧 침궁으로 인도되어 주님안의 진 정한 교통을 통해서 주님처럼 내가 다 이루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늘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우리와 교통하면서 우리의 영적인 부분을 채워주시기 위한 주님과의 계속적인 교통이 이루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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