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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노래 (아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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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자와 양, 아버지와 자녀, 왕과 신하, 주인과 종, 남편과 아내, 신랑과 신부 등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적인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관계는 누가 무엇이라고 하여도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교제한다고 할 때, 완전하게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친밀한 관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남녀간의 사랑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를 알게 됩니다. 현진건이 쓴 'B사감과 러브레터'라는 단편소설을 읽어보신 분 있습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B사감은 남녀간의 사랑을 반대하면서도 가장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 사랑은 때로는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B사감은 병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실제로 남이 보지 않는데서는 사랑을 열렬하게 사모합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이성적인 사랑의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녀간의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설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아가서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가의 뜻이 무엇일까요? 얼마전 우리 사회에 큰 문제가 된 아가동산의 아가일까요? 우리말 성경은 한자어로 아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할' 아(雅)와 '노래' 가(歌)를 사용하여 '아담한 노래'라고 부른 것입니다. 아주 고상하게 표현한 것같지만 사랑의 노래를 아담한 노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좀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 사랑의 노래를 '노래들 중의 노래'(song of songs)라고 하였습니다. 노래들 중의 노래가 사랑의 노래입니다.

이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과 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관계로 맺어지는 두 사람의 사랑의 연합입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우리를 사랑하는 연인관계에서 결혼하여 부부를 이루며, 서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함께 연구하면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있으며, 그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요 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하여 첫 번째로는 성과 사랑의 문제를 살펴보고, 두 번째로는 아가서의 특성과 목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과 사랑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똑같이 만들지 않고 남녀로 구분하여 만드셨을까요? 여권주의자들은 이렇게 남녀를 구분하는 일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점점 심화되어 갈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난 5월14에 이례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성경이 보수적이며 대중적인 NIV 성경의 저작권자인 국제성경공회(International Bible Society)와 존더반(Zondervan) 출판사가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성명의 내용은 항간에 떠도는 페미니즘 성향의 언어가 도입될 것이라는 설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여성 대명사로 표현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남성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이나 남성의 성을 제거하거나 동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예를 들면 성경에 '형제들아'라는 말을 '형제 자매들아'라는 말로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국제성경공회와 존더반 출판사는 '고려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페미니즘의 주장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 어느 정도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남녀간의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남녀로 구분하여 창조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어떨까요? 세상은 얼마나 단조로울까요? 남성만 있는 세상이라든지, 여성만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남성과 여성이라는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두 사람이 부모를 떠나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아십니까?

그러면 성과 사랑은 어떤 관계일까요? 요즘 세대는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성 관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의 표현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랑의 최고의 절정은 성 관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관계에 분명한 규칙을 주고 있습니다. 성 관계는 결혼한 관계에서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성 관계를 가질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는 성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는 성경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성을 사용한 결과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방법으로 성을 사용하므로 인생의 허무, 공허, 이것을 메우기 위한 마약복용, 성병, 가정파괴, 자녀들의 이탈 등의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성도덕 문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지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는 이러한 잘못된 성 문화를 모방하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은 잘못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인간의 생활에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특히 창조 시에 남녀간에 서로 사랑하면서 생육하며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표현방법 가운데 하나인 성이 왜 문제가 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성생활을 파괴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 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9)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권고는 사람에게 성욕이 있다는 것과 결혼관계에서만 성을 사용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사랑이나 성의 문제를 무조건 금기시하거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저속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속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본성에 해당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이나 성의 올바른 사용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신약시대에 헬라철학은 육체를 악과 비참의 근원으로 이해하였고, 역시 성도 죄악시하였습니다. 이러한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수도원 운동이나 금욕주의를 통하여 성을 억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운동이나 금욕주의는 성을 억제하고 세상과 단절하여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부도덕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 들어온 이러한 헬라의 철학은 육체를 저급한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성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저급한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도 성과 결혼생활을 저급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가 회심하기 전에 여러 여자들을 상대하면서 사생아까지 낳은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가 회심한 후에 그의 신앙고백집인 '참회록'(Confession)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나를 회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아내를 원하지도 않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믿음의 법칙 위에 굳게 설 따름입니다.'(VIII. 12) 어거스틴의 이 말은 성, 심지어 아내와의 성 생활조차도 저급한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만약에 사랑의 절정인 성을 이러한 방법으로 이해한다면 아가서에 나타나는 사랑과 성은 이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가서는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서로에 대하여 사랑을 고백하다가 결혼하여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사랑의 절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한 사람은 사랑의 절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가서를 읽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아가서의 특성과 목적
아가서에는 우리가 읽기에 낯이 뜨거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여자에 대하여는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없는 것은 아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것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같구나 …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꿀을 먹는 쌍태노루 새끼같구나.'(아4:1-5) '내 신부야 네 입술에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아4:11)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여인에 대한 이러한 표현을 볼 때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사랑의 표현방법 등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서에서는 신부와 신랑의 사랑 표현방법을 아주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쌍의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고, 사랑 안에서 고민하고, 사랑 안에서 성장해 갑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하게 되고, 사랑의 기쁨을 누리며, 결혼하여 신부가 신랑을 설득하여 친정집으로 가는 이야기(아3:4; 8:1),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들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으나 다음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1) 사랑과 기대(아1:2-3:5) (2) 결혼식과 신혼방에 대한 이야기(아3:6-5:1) (3) 신혼생활(아5:2-6:14) (4) 깊어지는 결혼생활(아7:1-8:4) (5) 성숙되어 가는 사랑(아8:5-14) 이러한 내용들을 볼 때 아가서의 특성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녀의 사랑과 결혼생활을 소재로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입맞춤이나 침실에서의 사랑의 행동들도 리얼하게 묘사합니다. 이것이 너무 리얼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 번역하면 아주 외설적인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약 2년 전에 대한성서공회에서 번역한 '표준새번역'은 읽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상당히 외설적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그 중에 한 대목을 소개하면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입맞춰 주세요./ 숨막힐 듯한 임의 입술로./ 임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 임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내음,/ 사람들은 임을/ 쏟아지는 향기름이라 부릅니다./ 그러기에 아가씨들이 임을 사랑합니다./ 나를 데려가 주세요, 어서요./ 임금님, 나를 데려가세요,/ 임의 침실로.'(아1:2-4) 우리가 아가서의 내용을 읽을 때 이보다 훨씬 진하다고 느끼는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외설적으로 보여질 정도로 남녀간의 사랑과 신랑과 신부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묘사하고 있는 이 아가서가 성경 66권에 포함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금욕을 피하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적인 욕망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다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무엇을 생각하였을까요? 이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이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는 점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사54:5-6; 렘2:2; 겔16:8-14; 호2:16-20).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교회를 그의 신부로 말하고 있습니다(계19:7; 22:17).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말하는 에베소서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하라고 하고, 또한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2-33)고 하였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지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역사상 이 아가서를 모두 하나님과 그의 교회, 즉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의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12세기 중반의 수도사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uny)는 아가서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며 주님은 우리가 언제나 들어갈 수 있는 침실로 설명하였습니다. 중국의 선교사요 지금의 '해외선교부'(OMF)를 창설한 허드슨 테일러는 아가서에 대하여 강해서를 내었습니다. 그의 책 제목이 아가서의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데, '연합과 교제'(Union and Communion)입니다. 그는 신랑과 신부는 서로 사랑의 관계를 사모하고 갈망하고 있듯이 신부인 교회와 신랑인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관계를 결혼생활을 가지고 다루고 있습니다. 아가서에 나타나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가 강렬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듯이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러한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하여서 부부와 남녀간의 사랑은 의미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두 부분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 신랑과 신부와의 사랑의 관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하나님의 우리와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이 관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아가서 1:2-4은 술람미 여인이 왕에게 사랑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이 사랑의 말은 신랑의 사랑을 간절하게 사모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왕의 침실로 인도해 달라는 간절한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방을 따로 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따로 방을 쓰는 것을 제외하곤 분방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고전7:5). 부부간의 사랑이 절정으로 무르익어 가는 때는 침실에서입니다. 지금 술람미 여인은 신랑이신 솔로몬을 기다리고 있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여서 올바른 부부관계를 경험한 신부는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고 침실을 아름답게 단장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관계입니다. 지금 현재 이러한 관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바꾸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알고 싶으시면 결혼하십시오. 결혼하기 전에는 아무리 침실의 신비함을 설명해도 모릅니다. 여러분! 아기를 낳아 보아야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가 자라가는 것을 보아야 부모님들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이뻐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결혼하여야 침실에서의 사랑과 술람미 여인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에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사랑이 아름답게 외설적으로 느껴질 만큼 서정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다른 젊은 남자들에게는 닫혀진 동산이요 막힌 담이지만 그 사랑하는 자에게는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하는 사랑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홀딱 빠져 있고, 그것 때문에 병이 났다는 사실조차 숨기지 않습니다(아5:8) 이렇게 신랑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사랑 못지 않게 신랑도 신부와의 교제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1:15)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며,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교제를 경험해 보신 분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밀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신부가 신랑에게서 사랑의 노래를 들으며 침실에서 보내는 아름다움보다 더 신비로운 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술람미 여인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끝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사랑의 노래를 속삭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이 사랑의 교제를 사모하십시오. 정말 신비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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