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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떼의 발자취 (아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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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는 솔로몬과 그의 애인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 아가서를 사랑의 3각 관계로 해석을 합니다. 즉 솔로몬이 왕위에 있을 때 팔레스타인 북방 술람미라는 마을에 어여쁜 딸을 둔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과부는 가난하여 처녀 딸에게 포도원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포도원을 지키던 중, 양치는 목동을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결국 약혼을 하게 됩니다.

이때 솔로몬 왕이 팔레스타인 북방을 순회하다가 이 아가씨의 아리따움을 보고 그를 예루살렘 왕궁으로 데려와 사랑을 주려고 하였지만 이 아가씨는 목동 청년만을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수포로 돌아가, 결국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솔로몬은 자신의 실패한 짝사랑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인의 굳은 절개를 노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정통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을 소개한 이유는 오늘 본문에 솔로몬 왕을 목자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비밀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아 1:2)
'나에게 입을 맞춰 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현대인의 성경)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라고 한 말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표시로 입을 맞춰 주기를 바란다는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입을 맞추는 행동은 성경에서 많이 발견되는 장면인데, 형 에서의 낯을 피해 하란으로 도주한 야곱은 외사촌 여동생 라헬을 만나자, 생전 처음 보는 라헬이지만 붙들고 입을 맞추었다(창 29:11)고 하였습니다. 족장 이삭은 그의 아들 야곱에게 축복하기 전 가까이 와서 입을 맞추라고 합니다. 주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본 아버지가 아직 '거리가 멀지만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눅 15:20)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 입을 맞추는 것은 술람미 여인이 그의 사랑하는 애인 솔로몬에게 사랑의 표시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말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는 말인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자가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 정상이지 여자가 남자를 붙들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별로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 여자는 다소곳하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현숙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세는 즉 주님과 성도의 관계에도 해당됩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들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여겨, 접근해 오시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남자는 능동적이어야 하고, 여성은 수동적인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어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는 그의 사랑을 받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일 4:10)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선수적이며 능동적인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닦아오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나 요즘은 이런 전통적인 사고가 많이 깨지고 있습니다. 어제가 바렌타인 데이라는 것인데 이날은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선물을 주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고 들었습니다. 성경적인 사상과 우리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타락한 행동입니다. 미혼 남녀들은 반드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술람미 여인은 적극적으로 닦아오는 솔로몬의 사랑에 감동되어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고 고백을 합니다. 포도주는 세상 사람들이 먹고 마시면서 즐기는 수단이고, 추구하는 낙입니다. 저는 그런 낙을 체험해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지만 저는 짐작하기를 이런 낙은 제 정신을 잃는 낙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세상의 낙을 버리지 못한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거나, 야외에 갈 때면 당연히 진로 한 병 정도는 마셔야 속이 뚫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집사님들도 그런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집사가 되었던, 장로가 되었던, 목사가 되었던 이런 분들은 아직 세상 줄과 재미를 끊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성도가 지녀야 할 성화의 삶, 혹은 경건이 무엇인지를 유념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성도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베풀어주시는 사랑에 감동되는 그 감격과 기쁨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고, 2차, 3차를 찾아 헤매는 세상의 낙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즐거움과 평안, 그리고 만족함으로 알고 맏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포장마차에서 한잔 술로 고통을 잊으려고 하기보다,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위로와 은총의 손길을 체험하여야 하고, 현실의 불안과 절망으로 실의에 빠질 때 주님의 말씀을 열고 묵상하면서 나를 이 악한 환경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약속으로 받으며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부흥이고 능력 있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부흥을 도모하여 세상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잊으려고 추한 모습으로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늘을 헤치고 이기고 성공의 내일을 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부분의 설명도 있으나 생략하고 술람미 여인의 용모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5-6)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피부가 검다고 진술합니다. 얼마나 검으냐하면 계달의 장막같다고 합니다. 계달의 장막이란 흑염소 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뜻하는데,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얼굴이 검은 정도가 아니라 색감마다고 합니다. 이렇게 검게 된 이유는 포도원을 지키면서 거센 바람과 따가운 일광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술람미 여인의 이런 고백을 통하여 그가 얼마나 진솔하며, 겸손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부화장을 한 신부를 보셨겠지오? 얼굴의 약점은 모두 감추고 아름다움만을 나타내려고 꾸미고 가꾼 것이 신부화장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만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데, 술람미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피부가 검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검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나 아담의 원죄로 인해 검어지기 시작하였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의와 부정의 바람과 세속의 강렬한 햇빛에 거슬리다 보니 어느덧 검게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검은 부분이 없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런 검은 것들을 숨기려는 것보다 술람미 여인처럼 주님 앞에 나는 마음과 생각이 검습니다 라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입니다. 더욱이 속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 솔직하게 죄인임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진솔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검은 술람미 여인이지만 그는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다'는 말을 계속합니다. 비록 비천한 시골 처녀의 몸으로 세파에 시달려 얼굴은 검어졌을망정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몸매와 용모는 아름답고 화려하여 솔로몬의 장막 못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도 인위적으로 가꾸고 꾸민 모습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인데, 인간적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내 어미의 아들들이'란 말에서 술람미 여인의 신분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친아버지를 일찍 사별하였고, 어머니가 개가를 하여 많은 남자 형제들을 낳았는데, 거센 남자 형제들이 술람미 여자를 구박하고 학대한 끝에 결국 포도원으로 내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술람미 여인은 의부 아버지의 포도원이나, 형제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술람미 여인의 포도원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혼 적령기의 처녀라면 마땅히 여성으로서 몸을 가꾸고 단장하여 멋진 남성을 만나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포도원 일에 매달려 미혼 여성으로써 하여야 할 일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내 몸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가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포도원을 잘 지켰습니까? 주님 앞에 현숙한 처녀와 같이 신앙의 몸단장을 잘 하였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포도원을 지키기 위하여 영적인 몸단장은 흐트러뜨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술람미 여인이 포도원에 매였던 것처럼 세상의 직업에 매이고, 사업에 매이고, 돈과 명예와 지식에 얽매여 영혼의 얼굴이 세상의 근신과 걱정의 비바람과 일광에 그을려 검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굴을 펴십시다.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 부흥을 도모하라고 큰 명제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다. 말씀을 펴들고 묵상하십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있었던 것같이 여러분의 얼굴에도 은혜의 광채가 빛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7-8)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목자로 지칭하면서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고 합니다. 그리운 솔로몬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질문이고, 솔로몬은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고 화답합니다.

이 말씀에서 솔로몬이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 두 가지를 언급하였는데, 첫 번째는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와야 한다 것'이고, 두 번째는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염소 새끼를 먹이는 것'입니다. 많은 양들이 지나간 곳에는 양들의 발자국이 남게 마련이고, 양들의 발자국 사이사이에는 목자의 발자국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점을 환기시키면서 나를 만나려면 앞서간 양들의 발자국을 따라와야 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양들이 그를 따랐으며, 크고 작은 양들의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베드로, 요한, 바울과 같은 분들의 큰 발자국도 있으나 그들의 음성을 듣고 순종으로 따라간 무수한 작은 양들의 발자국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병들어 고생하는 양의 발자국도 있고, 마음의 깊은 상처로 아파하는 양의 것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생하며 지친 양들도 있고, 가정의 어려움으로 상심하며 실의에 젖어 있는 양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자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갔습니다. 왜입니까? 왜 고생스럽게 따라갔습니까? 발자취를 따라가면 분명히 은혜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포도주보다도 더 아름답고 짙고 달콤한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따라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 뵙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걸어간 신앙인들의 발자국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분명히 사랑의 주님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슬픔과 고통을 치료해 주십니다. 믿습니까?

두 번째로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염소 새끼'를 먹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서 염소새끼는 계약의 상징물(창 38:17)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염소새끼를 먹인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약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고 잊지 않으며 순종으로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는 방법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씀을 떠나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도, 지혜도, 열정도 통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약속만이 우리를 주님 곁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읽어야 하고, 들어야 하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깊은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좋게 여기십니까? 여러분은 나 자신도 검은 부분이 있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이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양떼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만나서 그의 사랑에 흠뻑 취해 보십시오.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을 체험하시고 은총과 축복을 누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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