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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하는 신앙인의 7가지 신앙법칙 (시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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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세계에 전운이 감돌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도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지난 일이지만 1994년 북한 핵 개발 문제로 우리 나라가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는 것은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정경모 씨가 지은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94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핵 개발 문제로 말을 듣지 않는 북한을 응징하려고 페리 국방장관에게 개전 준비 명령을 내리고, 군 수뇌부를 펜타곤에 불렀습니다. 당시 '작전계획5027'에 따라 군 수뇌부는 북한과의 전쟁 시뮬레이션을 했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가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한 군 수뇌부에 전달되었습니다.

1. 전쟁개시 90일 만에 미군의 사상자가 5만2000명이 납니다. 이 숫자는 베트남전쟁에서 10년간 미군이 입은 피해와 맞먹는 수치입니다.
2. 미국이 지출할 직접적인 전쟁비용만은 약 610억 달러로 추산되었습니다.
3. 한국이 입을 전쟁피해액을 포함하면 실제 전쟁비용은 1조 달러가 되었습니다.
이 돈은 1300조원으로 우리 나라 13년간 정부 예산이고 45년간의 국방비입니다.
4. 남한의 민간인 사망자는 사상자를 제외하고 대략 100만 명이 예상되었습니다.
5. 국군 예상 사상자 49만 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현재 60만 국군의 80%입니다.
6.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공격당하면 그 참화는 너무 커서 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가 되었습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 사고는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3분에 일어났습니다. 원자로를 식혀주는 냉각수 공급이 중단되어 연료봉이 가열되고 핵연료가 녹으면서 원자로 내부의 물이 1분만에 초고온, 초고압의 수증기로 바뀌어 폭발하였습니다. 이 폭발로 원자로가 있던 건물은 산산조각이 났고, 강력한 방사능이 방출되었으며, 이 사고로 반경 약 100킬로미터까지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 중에 2개가 미사일 공격으로 터지면 우리 나라가 수십 년간 사람이 살 수 없는 방사능 오염지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결과를 보고 받고 클린턴 대통령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고. 전쟁 보류 결정을 내리고, 카터를 북한에 보내고, 제네바 회의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해서 합의점을 끌어낸 것이 바로 '북미 기본합의서'입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도 이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고 받고 미국이 선제공격을 해도 우리 나라는 전쟁할 의사가 없음을 통고하여 클린턴이 전쟁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평화통일 되는 그 날까지 조심해야 합니다. 역시 하나님의 방법은 화해의 길입니다. 전쟁을 하면 우리는 같이 죽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려야 합니다. 러시아가 문을 열 듯이 북한도 문을 열 것입니다. 그때 우리 남북이 하나가 되면 우리는 세계로 다시 웅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상황이 어떻게 위급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1편에는 '지킨다'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이 시편 기록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의인이 필요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을 원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성공적인 신앙인의 신앙법칙 7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제 1법칙> 영원을 향한 추구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 이 시편 기록자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하면서 영원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지한 모습으로 영원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참된 신앙이 가능합니다. 미국의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울적할 때마다 차에서 잘 때가 많았습니다. 차에서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 신비한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 선하게 살겠습니다. ' 그 다음에는 환경이 새롭게 보입니다. 어려운 상황도 어렵지 않게 보입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영원에 대한 추구로, 다시 하나님 추구로 발전해야 합니다.

별 세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시속 20만 킬로미터로 달리는 지구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조화, 이 질서, 이 신비함을 느끼면서 나의 존재의 왜소함에 질식할 것 같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그 신앙이 성공적인 신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나를 압도하는 존재를 향해 눈을 들어야 합니다. 나는 똑똑한 것 같지만 나 자신도 모르고 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이는 것만 추구하며 살면 인생의 방황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눈을 들어 영원한 것을 추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신앙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제 2법칙> 항상 겸손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이 시편 기록자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고 한 고백은 결국 '나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런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독불장군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 혼자 무엇을 하겠다고 요동치면 삶의 작품은 나올 수 없고 일은 꼬이게 됩니다.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서로 돕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믿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믿어주어야 합니다. 믿음 도우미가 되어서 배우자를 돕고, 자녀를 돕고, 초신자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특히 나를 돕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되기보다 항상 겸손하게 도우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서도 물질과 지위 때문에 마음을 높이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상하게 무엇인가 있으면 마음이 높아집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풍성하고 넉넉할 때 더욱 겸손해야 사실상 그 사람이 참된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카터는 대통령 때에도 주일 학교 교사와 아이들의 신발 정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처럼 항상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그의 신앙은 견고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제 3법칙> 과거의 실패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산을 향하여 눈을 들겠다는 고백은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옛말에 '톱밥에는 톱질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지나간 과거와 같은 톱밥을 가지고 톱질을 해 봐야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톱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 톱질보다는 송진을 묻히라는 말입니다. 톱밥에 송진이 묻을 때 이 톱밥은 어느 나무보다도 단단한 합판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우리의 삶에 깨지고 부서진 파편 조각이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거기에 믿음과 은혜의 송진만 묻혀지면 우리는 더 쓸모 있는 재목이 될 것입니다.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이 67세 되던 어느 겨울날, 그의 실험실에 불이 났습니다.

그때 실험실에 있던 모든 기구와 자료들이 한꺼번에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아내와 아들과 동네 사람들을 불러 같이 불구경을 했습니다. 수십 년간의 업적이 잿더미가 되는 것을 태연히 바라보는 그에게 아들이 묻습니다. '아버님! 실망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끌 수 없는 불인데, 실험실을 잃었다고 해서 웃음마저 잃으면 되겠니?' 얼마나 훌륭한 자세입니까? 이런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돕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벌어진 슬픈 일에 현재의 눈물을 지나치게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제 4법칙> 설레는 희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편 기록자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하면서 산을 바라보는 모습 속에서 미래에 대한 설레는 희망을 가지고 기대감을 가지는 모습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과거의 절망을 소유하지 말고 미래의 희망을 소유해야 합니다. 희망은 배의 돛과 같습니다. 그 돛이 없으면 배가 바른 방향으로 가지 못합니다. 절망은 어떤 경우에도 인물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인물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항상 넘치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반신반의하지 마십시오.

회색분자처럼 빛 바랜 기대감을 가지지 말고, 설레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시고, 기대감을 가지고 간절히 예배하십시오. '오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 어떤 은혜를 주실까?' 그러면 예배 자세도 다르고, 눈동자도 다르고, 반드시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새로 재미있는 영화가 개봉된다고 하면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곳에 갑니다. 영화 그림이 참 멋있습니다. 내용은 별 것 아닌데 그림과 음향 역할이 참 큽니다. 그런 것들에 우리의 감정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감정을 한 바탕 풀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양식으로 남는 것은 없습니다. '재미있었다!' 하고 끝납니다. 정작 우리 영혼에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서 나올 때부터 예배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중요성은 잃어버리고 다른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를 10년 넘게 듣다보니 별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식으로 회의를 가지면 교회생활과 예배생활은 갈수록 침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늘 설레는 마음으로 예배하면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예를 들면, OOO 순복음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의 얼굴에 늘 기대감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예배를 살아있게 만들어주고 은혜를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원천입니다. 기대감이 넘치면 기적이 넘칩니다. 항상 희망찬 기대감으로 기적을 예배하십시오.

<제 5법칙>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시편 기자가 산을 향해 눈을 들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찾은 것은 눈앞에 보이는 평지의 삶만 추구하지 말고 높은 곳에 시선을 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평지의 삶, 평지의 문명에 너무 몰두해 있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위해 일하고, 그것을 목표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 허무한 것입니다. 영적 IMF가 오면 순식간에 다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교회를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어느 날 마틴 루터가 식사를 하는데 상 아래서 개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루터의 손에 있는 고기를 따라서 개의 시선이 전후좌우로 움직입니다. 그처럼 개가 상 위의 주인을 바라듯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세상을 더 의지하고 자기를 더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에게 뛰어들지 못하고 결국 행복을 놓치게 됩니다.

요즘에 번지점프가 유행입니다. 그러나 이 번지점프를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체격도 좋아 보이고, 생긴 것도 임꺽정같이 생기고 입만 열었다 하면 옛날에 싸움질하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친구들이 막상 뛰어 내리라고 하면 뛰어 내리지 못하고 무서워 벌벌 떠는 것을 봅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용기, 실제적인 헌신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번지점프를 하면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질문한 후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외치며 뛰어내리는 것 같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도움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져주십니다. 구름다리를 건널 때 아래를 쳐다보면 현기증이 나서 다리를 건널 수 없습니다.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고 의젓하게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건널 수 있습니다. 눈앞의 현실만 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현실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옛말에 뱀이 참새를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먼저 뱀은 참새를 보면 몸을 현란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새가 쳐다보게 합니다. 그 다음에 갑자기 참새를 톡 쏘아봅니다. 그러면 참새가 깜짝 놀라 경직이 됩니다. 그리고 뱀의 강렬한 눈빛에 빨려들어 오도가도 못하다가 그냥 잡혀 먹힙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기가 질려 현실에 잡혀 먹힙니다. 산을 향하여 눈을 드십시오. 그리고 은혜의 성산에 계신 하나님을 쳐다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바라보시고, 나의 찬란한 미래를 그려보십시오.
신앙생활을 희생하고, 교회생활을 희생하며 미래를 추구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느새 강물에 휩쓸려서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단의 강렬하고 화려한 눈빛에 결코 현혹되지 마십시오.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문제는 누구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위'를 쳐다보며 계산을 초월한 인생에게는 어떤 경우에서도 절망이란 없습니다. 그처럼 희망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재기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미국 수정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처음에 뉴욕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목회를 포기하려니까 할 일이 없었습니다. 죽고 싶었지만 자살할 수는 없어서 죽을 기회를 만들려고 차도를 걸어다녔습니다. 하루 종일 뉴욕 시내 차도를 걸어다니는데 차가 치지는 않고 욕만 하고 갑니다. 그날 밤 목사님은 지친 몸과 마음으로 공원에 누워 밤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갑자기 마음속이 오늘 본문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 그 음성을 듣고 그는 벌떡 일어섭니다. 그리고 멋지게 재기의 길을 걷게 됩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 문제가 없는 교회, 문제가 없는 직장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한 군데에는 분명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곳은 바로 공동묘지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어차피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항상 있음을 긍정하고, 문제 중에서도 주님을 찾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제 6법칙> 하나님을 모든 삶의 기본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라는 믿음! 얼마나 간단합니까? 이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다른 새로운 것을 좇아 여기저기 다닐 것이 없습니다. 이미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목사님들이 참 애를 씁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 할 것 다 해봅니다. 제자훈련도, 총동원주일도, 이슬비 전도도, 열린 예배도 한번씩은 다 해봅니다. 그래도 잘 안되는 모습을 보면서 전의를 상실한 목사님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모방하려고 한데서 나온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부흥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의논하고 조직하기에 몰두하기보다는 다시 복음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정말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힘으로도 안되며 능으로도 안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습니다. 그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기적을 볼 것입니다. 성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최선을 다해보십시오. 3절에서 하나님이 졸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은 실수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어련히 알아서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며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미국 버지니아에 한 신실한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충성스런 부부였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식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를 위해 7년을 기도했는데, 마침내 그 기도가 응답되어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이름도 지었습니다. 아들이면 사무엘, 딸이면 에스더라고 짓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마취에서 깨자마자 산모가 아이를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주저합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를 보자고 했습니다. 결국 아이를 데려왔는데 그 아이를 본 순간, 산모는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쳤습니다. 아이의 얼굴은 마치 외계인 같았고 온 몸은 뒤틀린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모는 통곡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교회에도 충성했는데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남편도 병원을 뛰쳐나갑니다. 한참 밤길을 걷다가 다시 아내에게 돌아와 말합니다. '여보! 이 땅에 기형아로 생긴 천사가 하나 와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야 되는데 그 천사가 냉대 받지 않을 가정으로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뽑아주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가 이 아이를 잘 길러보도록 합시다. ' 그 남편의 말을 듣고 아내도 울고, 의사도 울고, 간호사도 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기형아를 보낼 때는 보낼만한 가정에 보내십니다. 나에게 주신 자녀, 나에게 주신 상황과 환경은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 작은 진실도 결코 놓치지 않고 배려하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 우리는 친구 좋아하는데 그 관계가 오래 갑니까? 오직 하나님만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부부는 일생 동반자요 변함없는 동지입니다. 그래도 죽음의 순간까지는 함께 못합니다. 한참 좋을 때에는 한번쯤 '우리 죽을 때도 같이 죽자!'고 말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철이 들어서 이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도 죽을 때에는 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삶의 기본 밑천으로 삼으면 어찌 우리의 삶에 낭패가 있겠습니까?

<제 7법칙> 헌신의 원리를 알고 실천하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 우리는 여기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헌신의 땀'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도 헌신의 땀을 흘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도 없으며, 축복을 받을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약 50년 전에 두 여인이 비슷한 시기에 영화계에 데뷔해 명성을 떨쳤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콜린 타운센트'였고 또 한 사람은 '마릴린 먼로'였습니다. 그런데 곧 그들의 삶은 뚜렷하게 갈라졌습니다. 타운센트는 주님을 영접 한 후 목사와 결혼해 조용히 선교지로 선교하러 떠났고 먼로는 육체파 배우로 각종 화제를 뿌리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먼로는 타운센트를 만나 말합니다. '콜린! 네가 너무 행복해 보여!'

주님이 없고, 헌신하는 삶이 없으면 사람은 절대 행복할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온 가족이 함께 헌신하는 삶을 살면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천국의 모습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의 장례식에 가면 너무 적막하고 너무 쓸쓸한 느낌이 듭니다. 아쉽게도 그런 분들은 대개 살아 계실 때 헌신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분은 고독한 상황에 자기를 찾아주는 친구가 없게 됩니다. 헌신을 통해 친구를 많이 만드십시오. 그러면 결정적 순간에 그들이 나를 돕습니다. 모르는 분도 많이 도우십시오. 그분이 나를 돕지 못해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십니다. 지난 수요일에 광고한 가난한 외국인 신학생들을 여러분들은 원래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도와보십시오. 마음에 감동되면 그 한 사람의 교육을 맡아보십시오. 육적인 자녀 외에 나에게 영적인 자녀 한 사람이 더 있다고 여기고 후원해보십시오.

대부분 모슬렘 권에 사는 그들이 나중에 언더우드와 같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이유는 그러한 헌신에의 부르심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한 헌신을 통해 남을 도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욱 헌신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삶이 남에게도 유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가 사는 모습이 하도 좋아서,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 조금 삶의 속도를 조금만 늦추시고,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손길을 펼치십시오. 우리는 혼자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신실한 형제와 자매들이 있습니다. 저도 인터넷 사역을 하면서 그런 신실한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희망의 불꽃이 점화되면 희망의 불씨를 나눠줄 벗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현실의 어둠을 보고 원망하고 투덜거리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 들라고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그 소명을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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