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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포로 부터 자유케 하는 말씀 (시 119:11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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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창세기 3장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은 범죄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두렵고 무섭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갖는 첫 번째 감정은 공포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아담이 느끼는 공포감은 오늘날 죄를 짓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감정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공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것이든 실패에 대한 것이든, 불치병에 대한 것이든 버림받음에 대한 것이든 삶은 순간마다 우리를 옥죄어 오고 지치게 하며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과거의 실패에 대한 좌절감은 현재를 구속하고, 구속당한 현재는 미래를 근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포에서 자유케 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을 통해 공포에서 자유케 될 수 있을까요?

마음과 삶에서 일치된 고백
말씀을 통해 공포에서 자유하려면 첫 번으로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다같이 113절에서 120절까지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말게 하소서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주의 율례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저희 궤사는 허무함이니이다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를 사랑하나이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라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의미도 됩니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이중 가치관, 이중 생활, 이중 신앙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죄는 두 마음을 품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두 마음을 품고 있진 않은가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이중적이진 않은가요? 우리가 교회에 들어와 모두 함께 예배드릴 때 거룩하고 경건한 것처럼, 삶에서도 겉과 속이 일치하는가요?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죄를 사랑하는 동시에 죄를 멀리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을 미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채찍의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나님께서 미지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성도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향하는 온전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죄악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114절에서 시편 기자는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은신처가 되시고 방패가 되십니다. 우리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패나 은신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때 그 곳은 어떤 피난처보다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일치됨을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입으로 주님을 고백함과 동시에 마음과 삶에서도 주님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하고 순결하게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850명과 함께 갈멜산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갈멜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엘리야는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새요, 은신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십니다. 그분은 전혀 부족함이 없으시고 흠이 없으시며, 그 마음이 아침 저녁으로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머뭇머뭇 거릴 때 두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머뭇거리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어선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은신처가 되시고 방패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드려 하나님을 섬기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마음을 품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때 세상이 주는 어떤 두려움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말씀을 통해 공포에서 자유케 하는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온전히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121절에서 124절까지 말씀입니다. “내가 공과 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주의 인자하신 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주의 율례로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기자는 많은 환란을 당한 듯 합니다. 만약 그가 다윗이라면 사울 왕과 블레셋 사람에게 끊임없이 추격 받았던 상황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두려워할 만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121절과 122절에 “내가 공과 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서 ‘보증하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과 압박자와의 사이에 하나님께서 보증이 되셔서 자신을 보호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시길 자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시길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증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는 어떤 시험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겨낼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공포에서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은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들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온전히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강조합니다. ‘권고하다’라는 표현은 귀를 기울여 듣고 알아준다는 뜻입니다. 무서움, 두려움, 염려, 불안 등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채무를 감당하시고 우리의 어려움에 대해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인생의 짐을 맡긴다고 말을 하면서, 두 마음을 품은 것처럼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보증인 되신 하나님께 인생의 짐을 모두 맡겨야 합니다. 자녀들의 문제까지 맡겨야 합니다.

123절에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구원과 말씀을 바라보느라 자신의 눈이 피곤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정성이 지극해 눈이 피곤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자신의 주변을 바라보느라 눈이 피곤하진 않았는지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맡긴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서 은혜와 은총을 입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공포, 염려, 아픔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 미래까지도 맡겨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넘겨야 합니다.

십자가로 죄를 씻어야
말씀을 통해 공포에서 자유케 하는 세 번째 방법으로 우리의 거짓 행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125절에서 128절까지 말씀을 읽겠습니다. “나는 주의 종이오니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이 죄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죄는 과녁의 중앙을 뚫지 못하고 옆으로 비껴 맞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죄입니다. 죄의 기준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이 있다고 하더라도, 죄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행하는것이 곧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품는 것조차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으로 품는 죄조차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죄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지 않고, 우리의 삶에 관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죄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걷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깨닫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127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때,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가득할 때 우리는 죄를 구별하고 경계할 수 있습니다. 128절에는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당신의 법령을 어김없이 따르고, 모든 거짓된 길을 역겨워하리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거짓과 죄들을 미워할 뿐 아니라, 역겨워해야 합니다. 그것을 토해내야 합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에 있다면 우리의 눈은 흐려지고 말 것입니다. 수도관에 녹이 슬고 불순물이 끼어 있다면, 그 수도관에서 나오는 물은 깨끗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깨끗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더러움에서 깨끗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어린양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 우리가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고 역겨워하는 길은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유혹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에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머리에서 흘리는 보혈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합니다. 못에 박혀 매달린 주님의 손과 발에서 흘리는 보혈이 우리의 손과 발로 짓는 모든 죄를 깨끗케 합니다. 창에 찔린 주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보혈이 우리의 몸으로 짓는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 행위를 역겨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할 때, 사단이 주는 공포와 염려 그리고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하고 다시 한번 삶의 거짓 행위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 행하여 하나님에게서 평안을 얻고, 거짓된 공포에서 자유하는 성도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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