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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헛된 욕망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말씀 (시 119: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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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도’로 증명돼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행하며 언제나 마음에 담아 담대히 복음 전하고 말씀 속 하나님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의 네 번째 주제는 ‘헛된 욕망에서 자유케 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죄의 길에서 벗어나 진리와 일치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켜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진리의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헛된 욕망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헛된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첫 번째로 헛된 욕망에서 자유케 하기 위한 기본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33절에서 35절까지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하나, 하나님께 말씀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라는 구절은 119편에서 여덟 번이나 반복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적 조명을 바라며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지식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역동적인 가르침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방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생명의 길로 돌이킬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끝까지 순종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 주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확신하며 지키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우쳐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깨닫게 하소서’를 ‘내게 설명하소서’라고 풀이했습니다. 말씀을 배운다는 것은 말씀을 깨우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은 뜻과 의지가 부족하기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일전에 방글라데시에 선교 여행을 갔을 때, 북쪽 지방 찔마리와 남쪽 지방 치타콩의 습관이 정반대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엄지손가락으로 비슷하게 표현해도 지역에 따라 뜻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 이면의 뜻을 깨닫고 나서야 현지인들에게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은 있었지만, 율법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깨우침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형식주의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탄생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강도 만난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돼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지식에 머물지 말고, 말씀을 깨닫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셋,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첩경’이란 넓고 탁 트인 길이 아니라, 좁고 짧은 길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지름길이지만, 여기선 하나님께로 바로 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진리는 행함으로써 온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무지나 게으름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의 말씀을 행하도록 기도하고 그것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헛된 욕망에서 자유케 하는 방법은 36절에서 37절까지 말씀에 있습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나,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교훈에 몰두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에는 반드시 넘어지게 하는 거친돌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의 유혹이며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된 탐욕을 자극하고 부추깁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헛된 욕망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탐욕은 죄로 나아가는 첩경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합니다.

헛된 욕망의 시작은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서 비롯합니다. 물질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하나님보다 우선할 때 죄가 됩니다. 사람은 물질과 돈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됩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해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면, 그것은 분명히 사탄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헛된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물질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헛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둘, 허탄한 것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허탄한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의미로 인간의 명예에 대한 유혹, 지위에 대한 집착, 도덕적 범주를 벗어난 쾌락과 향락 등을 의미합니다. 허탄한 것의 특징은 우리의 욕구나 본능을 비정상적인 쾌락과 향락으로 유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왜곡시켜 미혹함으로써 영혼을 파괴합니다. 결국 헛된 욕망으로 인해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고 결국 생명의 길에서 떠나게 합니다. 성도는 그릇된 것들에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허탄한 것을 보지말고 주님의 길을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은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들풀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7-8)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영혼은 잠깐 있다가 쓰러지는 들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삶은 풀과 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도에 소성케 하소서”라는 표현은 ‘주의 길을 따라 생명을 얻게 하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허탄한 것을 추구하다 멸망의 길로 가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을 얻게 해 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헛된 욕망에서 자유케 하는 목적은 38절에서 44절까지 말씀에 있습니다.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하나, 우리로 새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써 헛된 욕망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 새로운 삶을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38절과 39절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 주시고 비난에서 건져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헛된 욕망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심으로 새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확증이요, 표시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하나님의 말씀은 죄와 사망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 언제나 말씀과 함께
둘, 진리의 말씀이 나의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서 떠나지 않을 때 헛된 욕망에서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41절에 ‘성경이 주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십니다. 낮의 해도 우리를 상치 않고, 밤의 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진리의 말씀이 떠나지 않을 때, 우리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식 때 신랑 신부는 서로 서약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약의 내용들을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사랑’에 대한 고백은 남아 있습니다. 사랑은 집 안을 채우는 내용물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고 장식이 화려한 집이라도 그 안에서 사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한 가정이라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마지막으로 헛된 욕망에서 자유케 하는 말씀에 대한 고백은 45절에서 48절까지 말씀에 있습니다.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 담대하게 말씀 전해야
하나, 우리가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에서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라는 말은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억지로 말씀을 지키고 강제적으로 계명을 준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 담대함을 주십니다. 믿는 사람은 왕 앞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자유케 하며 능력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7-28).

하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도’로 증명돼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전도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1년에 한 명은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복음을 전합니다. 그 말씀이 새 생명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전도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 두 손을 들어 환영하는 것입니다.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는 말씀은 환영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강제가 아니며 억지는 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축복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축복하고 새 생명을 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손을 들다’라는 표현은 ‘축복하다, 기도하다, 찬양하다, 경배하다’ 등 다양한 의미로 쓰입니다. 여기선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삶을 의뢰하고 말씀에 따라 살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주의 계명을 사랑하기에 두 손을 들고 환영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라는 뜻입니다.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정리해 보면, 헛된 욕망에서 자유하기 위한 기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시며 행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헛된 욕망에서 자유하는 방법은 주님의 교훈에 몰두하는 것이고 허탄한 것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길에서 떠나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헛된 욕망에서 자유하는 목적은 새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구원과 사랑에 관한 복음이 있습니다. 헛된 욕망에서 자유케 하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 손을 들어 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우리의 입을 진리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긴 보화를 캐내어 소유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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