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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과 고난 (시 119:6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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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바다에서 청어 잡이를 하는 영국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북해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런던에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가지고 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어부들이 아무리 잘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 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한 어부만은 북해에서 잡은 청어들을 싱싱하게 산채로 런던에 가지고 와서 큰 재미를 보았습니다. 동료 어부들은 이상하게 여겨 그 비법을 물었더니 그 어부가 고민 끝에 말하기를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었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어부들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모두 잡아먹지 않나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기는 하지만 두세 마리밖에 못 먹지요. 그러나 그 통에 있는 다른 많은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열심히 헤엄치며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청어들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청어를 잡아먹는 메기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청어를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인 것처럼, 이 세상에 고난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바른 삶, 건강한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라고 하였는데 이 시인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잘못된 길로 가다가 고난을 통해서 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보듯이 고난은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쓴 약과 같습니다. 육체의 질병을 완전하게 치료받고 나서도 여전히 마음과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영혼이 여전히 병들어 있는 사람도 있고, 삶이 온전히 치료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삶을 건강하게 치료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고난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긴장하게 되면서 창조적인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
이런 관점에서 고난을 볼 때 고난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 된 우리의 삶을 바로 잡아 주는 좋은 치료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수술 받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수술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잘라 낼 것은 잘라 내고, 바르게 할 것은 바르게 함으로 병들었던 몸에 다시 건강을 얻게 해 줍니다.

오늘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병들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병들었기 때문에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병들었는데도 수술을 받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식이 병들었을 때 즉시 그를 입원시켜 치료받게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병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병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부모는 강제로 그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치료는 고통이지만, 그러나 그 치료를 통해서 비로소 그는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병든 우리를 치료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깊이 병든 우리를 보시고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것 같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려고 고난을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이며, 동시에 그 죄로 말미암은 병을 고치시려는 사랑입니다. 자식의 잘못을 벌하는 아버지의 채찍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식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그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그 잘못을 돌이키게 함으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그 채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고난을 하나님의 구원의 한 도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내시어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며 고난 당하게 하신 것도 그들을 그의 택한 민족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런 혹독한 광야에서 단련시키므로 그들을 영적인 민족이 되게 하셨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질긴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 다져진 이스라엘 자손들이기에 오늘날에도 이 사막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 농업 부국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수 천 년 동안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정말 강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의 역사를 통해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겼고, 수많은 지혜의 책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난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고난의 유익
성도는 인생의 고난이 결국 믿음이 강해지는 계기요,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과 의뢰의 관계로 들어가는 과정임을 믿는 사람입니다(67절). 아브라함과 이삭도, 야곱과 요셉도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바울과 디모데도 고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그 고난은 그들을 더욱 강한 성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의 삶을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방황했던 시기로 고백합니다(67절). 고난이 없던 평안의 시기가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쉬웠다는 그의 고백은 고난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는 것과 현재 누리고 있는 평안이 꼭 복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시편 기자가 고난을 통해 배우게 된 것은 “주의 율례”였습니다(71절). 평안할 때 얻은 것이 살찐 고기와 금은이었다면, 고난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은 ‘말씀’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라도 성도에게 말씀의 소중함을 가르치십니다.

말씀과 고난
고난의 시기를 경험한 시편 기자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랑해야만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78, 80절). 비록 고통이 힘들지만 언제나 주님의 판단은 옳기에(75절), 그리고 현재의 고난 역시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결과임을 알기에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고난을 이기기 위한 세상의 지혜와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호소하지 않습니다. 단지 말씀에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말씀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위로를 사모했습니다(76절). 그는 말씀으로 고난의 문제를 헤쳐 나가는 것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74절). 그는 고난의 시기를 통해 죄를 천하게 여기게 되었고, 세상의 허탄함과 교만함을 보았습니다. 본문을 통해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고난의 때일지라도 말씀을 의지할 때 수치스러운 삶이 어떻게 존귀한 삶으로 바뀌어 가는지 잘 가르쳐 줍니다.

현대인의 병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가운데 고난을 보내심은 우리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병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보여주신 창조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인간의 욕망대로 살아가는데 그 병의 원인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병은 물질문명의 병입니다. 인간의 육체만을 위하여 발전시킨 물질문명이 바로 인간의 영을 병들게 하였고, 영이 병들면 결국 우리의 삶 전체가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의 한 부분이 아프면 그곳만 아픈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아프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 아픔 때문에 위축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영이 병들 때 우리는 전체적으로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라 편리한 도시 생활을 이룩하였지만, 우리의 육체는 더 많은 병에 시달리고, 우리의 마음은 각박하여지고, 우리의 양심은 마비되었으며, 우리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겉으로는 풍요로워진 것 같지만 실상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가난뱅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이 무지를 일깨워 주는 각성제(覺醒劑)입니다.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가 다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만들고 우리의 육체적 건강을 헤쳐, 결과적으로 우리를 전체적으로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그런 문명의 이기들을 다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를 좀먹는 독소(毒素)임을 깨닫고 그것을 경계하며 부지런히 우리의 영성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이 보내신 고난이 올 때 더욱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지난날들을 반성하면서 영적 각성을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길
우리가 이렇게 영적 각성을 위해 노력할 때 고난은 물러가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고난을 벗어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을 따라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시는 초청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우리가 살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주시기 위한 채찍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자기 편의와 이익만을 추구하던 지난날의 욕심을 다 벗어버리고, 겸손히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며 그릇되게 행하였던 삶에서 돌이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따라 바르게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 길만이 바로 고난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고난은 끝나지 아니하고 우리를 계속 몰아붙일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될 때, 즉 교만과 어리석음을 벗어 던지고, 겸손과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로 나아가 그의 계명과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아갈 때 고난은 우리를 떠날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교만과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임과 동시에 우리를 그 병에서 건져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떠나 제 멋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을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눈을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그를 두려워하면서 그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고난은 물러가고 하나님이 우리를 병에서 구원하여 새사람 되게 하시고 우리를 그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고난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하고, 고난을 통하여 겸손해져야 하고, 고난을 통하여 지혜로워져야 하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사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문명의 때를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품인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이 물질 문명의 악마성을 똑똑히 보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전진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요구하고 계신 하나님의 채찍이며 사랑입니다.

욥이 까닭을 알 수 없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으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라고 고백 한 것처럼, 여러분도 오늘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이론적으로, 머리로만 알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직접 뵈오며, 가슴으로 받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고난이 여러분에게 이런 변화를 가져온다면 이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은혜이며,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고난을 통해 믿음이 자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를 분명하게 보시며, 그 말씀을 좇아 아름다운 삶을 이룩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 중에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게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나가기 원합니다.' 란 가사는 의미가 참 깊습니다. 내가 고생될 때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몸이 괴로울 때 엄마를 더 찾게 되는 것입니다. 객지에 있는 사람들 이 일이 잘 되어가고 건강할 때는 부모생각 안하다가 일의 낭패를 당하고 몸이 아파 누웠을 때 몹시 고향 생각이 나고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성도들과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할 때는 여러 방법으로 가깝게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사랑으로 어루만지기도 하시고 채찍을 가하여서 따끔한 맛을 보게도 하십니다. 우리가 환란을 만났을 때 주님의 품속 깊숙이 찾아 안겨야 합니다. 마태 3장 12절에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낸다고 하셨습니다. 키질을 할 때 보면 바람이 일고 바람이 일면 알곡은 키를 잡은 사람 앞으로 굴러들어 오고 쭉정이는 키 밖으로 날라 가 버립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환란의 바람이 볼 때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가는 기회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우리들의 고난을 유익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직면해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고난을 통해 믿음이 자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를 분명하게 보시며, 그 말씀을 좇아 아름다운 삶을 이룩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 중에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게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나가기 원합니다.' 란 가사는 의미가 참 깊습니다. 내가 고생될 때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몸이 괴로울 때 엄마를 더 찾게 되는 것입니다. 객지에 있는 사람들 이 일이 잘 되어가고 건강할 때는 부모생각 안하다가 일의 낭패를 당하고 몸이 아파 누웠을 때 몹시 고향 생각이 나고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성도들과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할 때는 여러 방법으로 가깝게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사랑으로 어루만지기도 하시고 채찍을 가하여서 따끔한 맛을 보게도 하십니다. 우리가 환란을 만났을 때 주님의 품속 깊숙이 찾아 안겨야 합니다. 마태 3장 12절에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낸다고 하셨습니다. 키질을 할 때 보면 바람이 일고 바람이 일면 알곡은 키를 잡은 사람 앞으로 굴러들어 오고 쭉정이는 키 밖으로 날라 가 버립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환란의 바람이 볼 때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가는 기회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우리들의 고난을 유익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직면해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독일에 있는 어떤 집의 지하에 히틀러의 세력을 피하여 숨어 지낸 유태인이 있었습니다. 후에 그가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하실 벽에다 다음과 같은 용감한 글귀를 새겨놓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귀한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분노를 녹이시고, 좌절감을 해소하시고 외로운 가슴에 사랑을 채우시고, 어린 아이들이 모래 위에 남긴 자국을 파도가 씻어 버리듯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해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웅덩이에서 당신의 절망을 끌어내시어 아름다운 새 길을 가게 해 주시고,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산을 넘게 해 주십니다. 당신이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소년을 위대한 어른으로, 죄수를 선량한 시민으로, 알콜 중독자를 교회의 장로로 변하게 해 주시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도 태양이 있음을,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사랑이 있음을, 나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실 때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습니다.”

내가 세워지는 그 날을 향하여..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그렇게도 울었듯이 나, 한 영혼 세우시기 위해 주님의 눈물은 마르실 날 없으십니다. 모든 고난, 모든 가시, 모든 통증의 포커스는 나를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한 시나리오입니다. 그 시나리오를 이루시기 위하여 많은 일들과, 많은 사람들이 액스트라로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세워지기까지는 고난도, 가시도, 통증도 중단되지 않을 수 있으며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어떤 사람들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한사람 세우시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라도 다 동원하시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나 한 사람 바로 세우시기까지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 어떤 일,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지금의 현실,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그 누구, 내가 그토록 아파하는 그 통증, 내가 그토록 뽑아내고 싶어 하는 그 가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시고 파송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도구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바로 세워지지 않은 채로 아무리 가시를 뽑아낸들, 상황을 바꾸려 한들 싫어하는 일을 안 한들 미워하는 사람이 망하기를 바란들 꿈쩍이나 하겠습니까? 그 모든 일이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임을 우리는 어리석어 지나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의 요구를 거절함은 부모에게 요구를 들어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아이를 세우려함 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단단한 매로 후려침은 그 아이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 아이를 바른 사람 만들려함 때문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의 가고자 하는 길을 막는 것은 그 아이를 망하게 함이 아니라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두고 보기에도 아깝고, 바라만 보기에도 아까운 우리들의 가는 길을 막으시고 시간시간 후려치시고 때마다 찌르는 가시를 두시고 그렇게도 애절하고 처절한 간청에도 두말도 않으시고 거절하심은 우리를 세우려 하심입니다. 우리를 알곡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러므로 기도의 응답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내가 세워지는 일입니다. 상황의 변화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산은 언제나 산이고 바다는 언제나 바다이듯, 잘 변하지 않는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에 집중하려 하십시요. 하나님은 아무리 우리의 요구가 급하고 절박해도 '쓰레기통에 밥 담아 주시는' 실수를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많은 고기 잡으려 하기 전에 먼저 베드로 자신이 변했듯 먼저 내 생각을 바꾸고 내 마음을 변화 시키고, 내 영혼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베드로가 세워질 때 안 잡히던 고기도 잡히고 안 변할 것 같던 바다도 변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세워지던 그 밤에 하나님은 에서의 돌 같은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야곱이 세워지니 원수가 친구로 죽음이 삶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요나 한 사람이 세워지니 니느웨 성이 구원받았고 나오미 한 여인이 세워질 때 풍성한 추수 때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워지지 않은 채로 하나님을 향하여 트집을 잡으려 합니다. 먼저 손 내밀어 화해하지 못하면서, 먼저 고개 숙여 용서하지 못하면서 아직도 작은 일에 큰 상처받으면서, 아직도 인정받지 못함에 그렇게 섭섭해 하면서, 전심과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겨 본적이 없으면서, 언제나 당당하고 아직도 목이 곧은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문제해결과 소원성취 위해서는 몇날 며칠을 부르짖으면서도, 내가 세워지기를 위해서는 하룻밤도 지새우지 못하면서, 아직도 그분을 향하여 무슨 할말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아직도 이기적이고, 아직도 자고하며, 아직도 기회만 있으면 안 믿으려하고, 아직도 욕심 덩어리이며 아직도 세워지지 않은 당신을 마음에 품으시고 오래 오래 기다리시며 애태우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본적이 있으십니까? 오히려 하나님 때문이라고 핑계대고 하나님 책임이라고 자신의 연약함을 합리화 시키며 무너지고 망가져 가는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눈물을 느끼실 수는 있으신 건가요?

아닙니다. 그분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 책임은 더더욱 아닙니다. 아직도 내가 세워지지 않음이 이유입니다. 아직도 내가 너무 잘나고 깨어지지 않음이 이유일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바로 세워지는 곳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세워지는 시간이 응답의 때입니다. 회복의 시간입니다. 대적이 사라지는 때입니다. 가시가 뽑히는 때입니다. 추수 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잊고 계심이 아니고 여러분을 버리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능하심이 아닙니다. 내가 아직도 세워지지 않음이 절대적인 이유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세워지던 날 하나님은 요셉을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세워지던 날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내가 세워지는 때가, 하나님이 나를 세우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시간에 오십니다.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을 그 시간에... 그 시간은 내가 세워지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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