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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갑시다. (시 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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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이 시는 그 내용에 별다른 주석을 달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의 노래 그대로입니다. 감사 예물을 드릴 예배 자들이 문을 들어서 성전 뜰로 걸으며 부른 노래입니다. 여기는 짧은 두 노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에의 부름입니다.(1-3) “온 땅이여 즐거이 부를 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나아갈 지어다.” 다음 중요한 노래할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더 이상의 다른 구차스런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감사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무슨 힘으로 살고 있습니까? 이런 문제로 고민해 보셨지요! 답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삶이 지칠 때 있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일 때 있습니까? 나는 왜 이리 무능하냐고 자신을 미워해 보셨습니까? 죽어버릴까? 이런 가슴앓이를 사람은 다 경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러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대통령께서 우리 경제가 어렵기는 해도 위기라 할 수준은 아니라 했습니다. 저는 경제도 문제지요.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더 걱정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춥고 배고픔을 잘 견디어 왔습니다. 그때 비하면 정말 잘 사는 사회입니다.

한국겔럽연구소에서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여론 조사했습니다.(2004.6.17 조선일보 A5면) 역대 대통령은 박정희(47.9%) 2위 김대중(14.3%) 정치인 1위 박근혜(6.6%) 2위 정동영(6.5%) 기업인 1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17.4%) 2위 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꽃 1위 장미(41.6%) 2위 백합 (7.5%) 탤런트 1위 최불암(4.1%) 2위 이영애(3.5%) 생선 1위 고등어(27.1%) 2위 갈치 (23.1%) 노래 1위 만남(1.8%) 4위 찬송가(0.9%) 옷 색깔 1위 검은색(23.0%) 2위 흰색(16.0%) 국가 1위 미국(15.4%) 2위 호주(15.3%) 좋아하는 직업 1위 공무원(21.1%) 2위 교사(14.1%)

Ⅰ.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걸핏하면 하나님, 사람을 불평합니다. 이 시는 이스라엘에 제정된 절기에 성전에서 감사제를 드릴 때 부른 노래입니다.(출 34:22-23) 그때 백성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찬송했습니다. 그 기쁜 찬송에 “온땅”이 부름을 받습니다. 세계에서 모여든 모든 사람은 감사해서 어쩔 줄 모릅니다. 이 자세가 성전에서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의 예배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 성전에 옵니다. 이것을 큰 즐거움으로 압니다. 누구도 고통스럽거나 힘들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당시엔 지방에 성전이 없었습니다. 전국에서, 세계에서 모입니다. 누구도 멀다고 투덜거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감사했습니다. 가슴이 터지도록 찬송했습니다. 예배는 유대인의 생활 전부였습니다. 감사와 찬송이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는 전철이나 버스에서 자리를 잡기위해서 경쟁을 하는 것을 봅니다. 유대인과 대부분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성전 먼발치에서 드리는 예배도 감지덕지였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게을리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다 감사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들이 예배를 게을리 한 예를 봅니다. 그것은 곧 우상숭배였습니다. 십일조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어서 여기서 제사장들이 꾸중한 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지금도 세계 정치를 이끌고 있습니다. 세계경제를 주물럭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비록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의구세주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습니다. 십일조(수입의 십분의 일)는 하나님의 것이라 믿습니다. 이것을 내가 손대면 절대 안 된다고 믿습니다. 바치면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잘 삽니다. 여기도 우리는 그의 것이라 합니다.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더 이상 군소리를 할 수 없습니다. 찬송과 감사는 길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찬송에 감사가 담겨있습니다. 찬송을 많이 부르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습니다. 감사헌금 잘 하는 사람 다 복을 받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했다고 이상한 사람이 시비를 건 일이 있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 아시지요. 그는 공개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은밀하게 해야지. 자기 나타내는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그 일이 떳떳한 일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드러내 놓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런데 가롯유다는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당시 장정 1사람의 1년 노임이었답니다.(300데나리온) 요즈음 일당(남자)이 60,000원 치고도 2천 1백 90만원입니다. 거액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였던 본훼퍼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값비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감사는 싸구려 향유를 드릴 때 있습니다. 어느 환자의 실화입니다. 미국에서 최고의 전문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6개월 동안 힘든 치료를 받고 병이 나았답니다. 입원비, 수술비, 약값, 특진비 엄청난 돈이었답니다. 그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환하게 웃으면서 수납계에 냈습니다. 또 치료해 준 주치의 선생님께 거액의 사례를 했습니다. 간호사, 수련의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옥 갈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어떤 불평도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향유 몇 천만 배 보다 더 귀하지요. 그런데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습니다. 병을 깨뜨렸습니다. 잘 포장해서 쇼핑백에 담아 드리면 어떻습니까! 이는 자신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또 너무 값지고 귀한 것이어서 예수님이 쓰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Ⅱ. 감사의 생활화 합시다.
현대인은 교회 예배에 특별한 관심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들도 핑계가 있습니다. 설교가 현실적이 아니라 합니다. 찬송이 감동적이 아니라 합니다. 지금 교인들의 마음이 감사, 찬송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생각되어지지 않습니까?

사실 예배는 감사와 기쁨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자랑이었습니다. 기쁨이고 자부심이었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시편을 교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부터 가슴이 메어집니다. 흐느낍니다. 어떤 이는 통곡합니다. 너무 감사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 교독문에서부터 감사, 기쁨,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에 늘 감사,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지루한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느 날 금요 밤 기도회였습니다. 우리 교회 자랑거리를 몇 가지씩 적으라 했습니다. 그리고 고칠 점을 적으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첫 번째가 우리 목사님 설교라 했습니다.(97%) 저는 일면 좋기도 했지만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아마 지루하지 않고 짧은 설교이어서........ 우리 문화 가족들, 감사할 일이 많으시지요. 이스라엘 예배는 늘 감사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늘 감사했습니다. 찬송도 감사 찬송이었습니다. 정말 멋진 모습이지요.

어느 신학대학 교수님의 글입니다. 서른 두 살의 젊은이, 결혼해서 두 자녀가 있습니다. 늦깎이 신학생입니다. 그는 등록금과 생활을 위해 학교수업을 마치고 소금에 절인 갈치장사를 합니다. 차로 동네와 시골 장터를 다니면서 팝니다. 그런데 토요일입니다. 오늘 생선을 다 팔아야 합니다. 그래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난감합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일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이 물건 팔리게 해 주세요.” 그런데도 물건은 너무 많이 남았습니다. 신학생 내외는 너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는 중대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이 물건을 차에 싣고 천안 백석동 쓰레기 처리장으로 갔습니다. 물건이 너무 많아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기를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래도 내외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일성수와 감사를 저울질 하신다는 것을 알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감사해야지요. 정말 우리는 감사할 꺼리가 많습니다.
어려움 중에 바친 마리아를 봅시다. 그는 부자가 아닙니다. 고아입니다. 예루살렘 그 보다 더 잘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는 감사했습니다. 정말 멋쟁이 아가씨입니다. 그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려 져야합니다. 마리아는 감사를 눈치보고 하지 않았습니다. 비난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우리도 그런 자세가 아름답습니다. 경제가 위기라 합니다. 앞의 신학생을 보세요. 그는 적자지만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합니다. 시편 100편은 감사의 노래입니다. 성전에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찬송했습니다. 그들은 어지간한 병이 들어도 예배는 참석합니다. 농사일, 자기의 백가지 천 가지 일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예배였습니다. 예배는 감사와 찬송이었습니다. 감사는 우리의 본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금년 여섯 달을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감사뿐이지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 때문에 감사 못합니다. 자꾸 내 중심으로 살다보니 감사가 어려워집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면 감사가 자연스럽습니다. 나를 비워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감사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마리아의 감사를 배웁시다. 정말 그는 양유가 100병이 있어도 다 드릴 사람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감사하지요. 눈높이를 낮춥시다. 낮은 곳으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늘 감사합시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감사에 바탕을 두고 삽시다. 늘 승리합시다.
박충웅 목사 (대구문화교회)

 (2005-06-2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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